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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가르7

건륭제(乾隆帝): 전형적인 중국식 지도자 글: 인신공분(人神共奮) 1. 당신과 '지도자의 사고방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양주(揚州)에는 "사가법기념관(史可法記念館)"이 있다. 해방전에는 "사공사(史公祠)"라고 불렸다. 그 안에는 항청명장(抗淸名將) 사가법의 의관총(衣冠塚, 시신이 묻힌 것이 아니라 옷과 갓을 묻은 곳)이 있으며, 건륭제가 직접 지시하여 만든 것이다. 건륭제는 사가법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추서하고, 사가법의 사생취의(捨生取義)의 고풍양절(高風亮節)을 찬양했다. 이 시호는 흥미가 있다. 모두 알다시피 사가법은 항청민족영웅이다. 1645년, 청나라군대가 양주성으로 쳐들어오자, 회양독사(淮揚督師)인 사가법은 청나라에 투항하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성이 함락된 후 자결한다. 청군은 양주에서 중원으로 쳐내려온 후에 가장 강력한.. 2022. 2. 23.
청나라 오대장군(五大將軍)의 관할구역은? 글: 풍장안량(風長眼量)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청나라때 8대총독(總督)은 지위도 높고 권력도 큰 봉강대리(封疆大吏)라는 것을. 1개 성 혹은 수개 성의 군정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청나라의 오대장군은 또 무슨 관직이었을까? 원나라에서 창조적으로 행성제도(行省制度)를 .. 2019. 1. 25.
1690년 울란부통(烏蘭布通) 전투: 유목민족 철기시대의 종말 글: 비상역사(非常歷史) 표질여장풍(驃疾如長風) 시경여경도(矢勁如驚濤) 분습천리지외(奔襲千里之外) 절원주야지경(折轅晝夜之傾) 달리는 건 바람과 같이 빠르고 활쏠 때는 거센파도처럼 힘있고 천리 밖까지 달려가서 기습하고 하룻밤낮에 적군을 무너뜨린다. 이것으 고대 농경민족이 .. 2019. 1. 2.
건륭제는 왜 6번이나 강남으로 내려갔는가?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청나라 300년역사중에서 단지 2명의 황제만이 6번 강남을 내려갔다. 한 명은 강희제이고, 다른 한명은 그의 손자인 건륭제이다. 강희제가 강남으로 6번이나 내려간 것은 국계민생을 위해서였고, 적지 않게 실질적인 일들을 했다. 그러나, 건륭제가 6번 강남으로 내.. 2018. 2. 4.
강희제의 근검절약 글: 양진(楊珍) 강희제는 강건성세의 개창자이고, 중국고대에 몇 안되는 명군이다. 그의 웅재대략과 문치무공은 세상사람들이 이미 많이 평가했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이 어린 나이에 등극한 만승지군이 사치하지 않고 근검절약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강희제의 일상생활은 비교적 간.. 2015. 2. 10.
건륭제의 어용보도(御用寶刀) 글: 문재봉(文裁縫) 스크린에서 관중들이 잘 알고 있는 건륭제는 손에 일년 사계절 부채가 들려 있다. 그의 우아하고 고귀한 기질을 보여주는 이외에 필요한 때면 부채가 방어무기로 쓰이기도 한다. 매번 위기의 시각에 이 부채는 건륭제의 손에서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적을 사지로 몰.. 2012. 10. 20.
강희제의 돌론노르회맹에 대한 두가지 시각 글: 후양방(侯楊方) 1691년 강희제는 카르카몽고(지금의 몽골공화국)의 수령들과 돌론노르(Dolon Nor, 지금의 내몽고에 위치)에서 회맹(會盟)을 가졌다. 이 돌론노르회맹은 외몽고(몽골공화국)이 청나라제국의 판도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써 2천년간 지속되던 몽골고원의 중원에 대한 위협이 .. 2007.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