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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1690년 울란부통(烏蘭布通) 전투: 유목민족 철기시대의 종말

by 중은우시 2019. 1. 2.

글: 비상역사(非常歷史)


표질여장풍(驃疾如長風)

시경여경도(矢勁如驚濤)

분습천리지외(奔襲千里之外)

절원주야지경(折轅晝夜之傾)


달리는 건 바람과 같이 빠르고

활쏠 때는 거센파도처럼 힘있고

천리 밖까지 달려가서 기습하고

하룻밤낮에 적군을 무너뜨린다.


이것으 고대 농경민족이 본 유목민족의 모습이다. 오랫동안 풀을 따라 이동하고, 물을 따라 이사하며 살다보니, 말등에서 자란 유목민족은 기동성이 좋았다. 상대적으로 문화수준이 열악하므로, 유목민족이 아주 강인한 의지와  끈기도 배양되었다. "위로는 백발노인부터 아래로는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모두 활을 들고 싸움에 나선다" 이 모든 것은 유목부락이 냉병기시대에 농경사회에 대하여 큰 군사적 우세를 점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유목부락의 기동성은 냉병기시대의 농경민족이 극히 피동적인 입장에 처하게 만든다: "네가 나를 칠 수는 있지만, 내가 너를 칠 수는 없다."는 난감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방어하려면 곳곳을 막아야 하므로 힘도 많이 들고 물자도 많이 들뿐 아니라, 전선이 천리나 이어지게 된다. 유목민족은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한번 쳐서 성과를 얻으면 물러난다. 곳곳을 막으려 해도 곳곳을 모두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공격하려면, 유목부락의 전체 민족은 말등에 타고 다니므로 패배하면 그냥 도망치면 된다. 농경민족은 경작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본거지를 수비하기 어려워져서 대거 출동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는 중국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났다. 중원을 통일한 강력한 한무제시대에도, 비록 겨우겨우 유목민족인 흉노를 격퇴시켰지만, 이를 통해 '구호모천하지반(口戶耗天下之半), 해내피파(海內疲罷)"이 참중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 만일 한무제 말기 및 한소제 한선제 두 황제가 개혁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왕조는 다시 진시황이 갔던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원이 분열되거나 왕조가 쇠약해지면, 유목부락은 더욱 중원을 노리게 된다. 오호난화, 요금칭웅은 바로 그 분명한 사례이다. 그리고 몽골의 원, 만주의 청이 겨우 수십만인구로 중원을 쳐들어와 주인의 자리에 앉았는데 이는 유목민족의 무력에서의 우세가 최고조로 발휘된 사례이다.


그러나, 생명에는 항상 생로병사가 있듯이, 혁혁함과 영광도 결국은 어두워질 때가 있는 법이다. 유목민족의 기병의 무력은 여전했지만, 화기의 전쟁터에서 역할이 점점 커지게 되면서, 유목민족의 역량은 점점 약화된다. 1690년의 울란부통전투는 전투에ㅔ서 화기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에 대하여 천년이상 계속하여 보유하고 있던 주도권과 우세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준가르부(準噶爾)는 오이라트(厄魯特)몽골 즉 막서몽골(漠西蒙古)의 4개 부락중 하나이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에 오이라트몽골은 준가르(Zungar)부, 호쇼트(和碩特, Khoshut)부, 두르베트(杜爾伯特, Dorbet)부, 토구트(土爾扈特, Torgut)부의 4부락으로 나뉜다. 준가르는 이리하(伊犁河) 일대에서 유목을 했고, 호쇼트부는 지금의 우르무치와 그 동쪽지역에 있었으며, 두르베트부는 지금의 어얼지스강(額爾齊斯, Extrix River)강 중상류지역에 있었고, 토구트부는 지금의 신강 타청(塔城)지역일대이다. 준가르부는 유목지역이 이리하에 가까워, 물과 풀이 무성하고, 중앙아시아와 중원의 통상을 할 수 있어 세력이 점차 강대해진다. 우두머리인 갈단(葛爾丹)은 대단한 인물이다. 동서로 다니며 정벌을 해서 수년만에, 천산남북, 금산동서를 장악한다.


시간적으로, 막서몽골의 준가르부가 강성해지는 시기는 만청제국이 확장하는 시기와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모두 17세기초에서 17세기 중엽까지이다. 서북을 횡행하던 준가르칸국과 이미 중원에 들어가 주인으로 자리잡은 만청제국은 서로 국경을 마주하고 대치하는 상태가 된다. 하나의 산에 두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다. 갈단시대에 이르러, 준가르칸국은 이미 서부의 메마른 땅에서 칭왕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눈길을 중원의 땅으로 돌린다. 그리고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대만을 수복한 이후에 청나라는 강희대제의 통치하에 국력이 날로 세지고 있었다. 여하한 세력이든 자신의 통치지위를 노릴 수 없도록 해야 했다. 글하여 만청제국과 준가르칸국의 백년전쟁은 불가피하게 된다.


백년동안 지속된 새북의 각축은 18세기 중엽 건륭제가 준가르칸국을 점령하고 전 부족을 몰살시키는 비극으로 끝이 나지만, 강희제와 갈단이 울란부통초원에서 벌인 대결이 그 시작이었다.


울란부통전투과정에 관하여 고등학교 교과서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저, "좌익군이 우세한 화기로 갈단이 만마리의 낙타를 둘러싸서 만든 '타성(駝城)'을 격파하여, 갈단군이 대패한다"고 만 적었다. 확실히 이전과 달리 화기가 이번 전투의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1690년 갈단은 울란부통에 도착한 후, "낙타 만여마리의 다리를 묶어 땅에 눕힌 다음 등에 상자를 지게 하고, 다시 카페트를 적셔서 얹었고, 둥글게 둘러싸서 '타성'이라고 불렀다." 즉, 만마리의 낙타를 이용하여, 낙타의 발굽을 묶어서 지면에 눕히고, 낙타의 등에는 상자를 싣고, 다시 카페트를 물에 적셔 상자의 위를 덮었다. 이렇게 울란부통산을 둥글게 둘러싸는 방어선을 마련한다. 그래서 이를 '타성'이라고 불렀다. 갈단부대는 낙타와 낙타의 사이의 틈을 이용하여 다니면서 제정러시아에서 구매한 화총으로 목표물을 사격했다.


팔월 일일, 청군은 동시에 12개의 부대가 울란부통으로 진격하여 타성에 접근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죽여라'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며, 타성에 포연이 가득해진다. 갈단은 낙타의 사이를 오가면서 화총을 쏘게 하고, 구모(鉤矛)도 함께 써서 청군을 타격했다. 청군은 좌, 우 양익으로 나눈 다음 준가르군을 포위한다. 국구(國舅, 황제의 외삼촌)인 퉁국강(佟國强)이 그 총탄을 맞아 전사한다. 청군은 화포로 타성에 발사하여, 타성에 불이 붙는다. 그렇게 되자 만마리의 낙타로 만든 진이 혼란에 빠지고, 준가르군의 시신이 낭자해진다. 주력군은 거의 죽는다. 저녁이 되자 갈단은 잔여인원을 이끌고 홍산(紅山)으로 도망쳤다.


팔월 이일, 청군이 홍산을 겹겹이 포위한다. 갈단은 전멸의 위기에 처한다. 이때, 청군의 총사령관이 명을 내려 포위만 하고 공격을 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다. 갈단을 섬멸할 시기를 "성경, 우라, 커얼친 여러 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함께 협공하려는" 것이었다.


팔월 사일, 갈단은 거짓으로 사람을 청군 영장에 보내어 화의를 청한다. 청군이 경계심을 늦추자, 갈단은 협상을 하는 틈을 타서 잔여부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는다. 그리고 커부도(科布多)로 도망쳐서 돌아간다. 울란부통전투에서 청군이 대승을 거두고, 갈단의 주력은 거의 전멸한다. 일찌기 준가르에 항복했던 회흘부, 청해, 카자흐각부들은 속속 청군에 투항한다.


준가르칸국은 17세기초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반세기동안 천산남북을 종횡하며, 서북을 종횡하며 중앙아시아에 위명을 떨치는 강국으로 성장한다. 중국역사상의 흉노 돌궐등 기타 초원제국과 비교하더라도 일어서는 기세가 전혀 못지 않았다. 그리고 갈단은 칸위에 오른 후, 서로는 카자흐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남으로는 천산남로의 회흘부를 평정하며, 동으로는 막북의 카르카몽골을 격패시킨다. 세력이 티벳에까지 멀리 미쳤다. 그는 모돈선우, 유연, 야율아보기와 나란히 할만한 초원영웅이었다. 칸위를 이은 후 동서로 정벌했고, 중원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순풍에 돛단 것처럼 순조로웠다.


준가르철기를 이끌고 질풍노도처럼 외몽골초원을 석권하며 우란부통의 홍산에 올랐다. 그는 투지에 차서 멀리 관내의 금수강산을 내려다보았다. 갈단은 이때 분명히 300년전 몽골인들이 말채찍을 들도 세계제국을 세웠던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백년후에 준가르인이 말채찍으로 자그마한 중원을 점령하는데 뭐 그다지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그는 분명히 환상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일단 중원을 정복하면 갈단이라는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고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징기스칸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 후세인들에게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은 갈단이 보기에 그저 징기스칸의 몽골이 굴기한 것을 간단하게 재연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간단히 재연되지 않는다. 화기가 날로 성숙해지면서, 유목기병의 우세도 점점 약화된다. 농경문명처럼 화기를 연구하고 제조하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유목민족은 화기로 무장한 농경민족의 앞에서 천년이래의 우월한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피동적으로 두들겨맞는 지위에 놓이게 된다. 화포의 앞에서 공격해 들어가는 몽골기병은 풍차를 향하여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갈단의 실패는 그가 전쟁에서 화기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데 있었다. 유목민족의 운명이 서산에 지는 해와 같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데 있었다. 이제 초원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누구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일찌기 수백년전에 태어났더라면, 갈단은 아마도 징기스칸같은 영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백년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그의 인생은 그저 풍차를 향하여 돌진하는 돈키호테같은 비극적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울란부통전투는 중국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다. 농업민족이 유목민족에 대하여 수비에서 공세로 전환한 계기가 된다. 이후 역사상 중원을 수천년간 괴롭혔던 북방유목민족은 중원으로 남하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더 이상 중원의 우환이 아니게 되었다. 반대로 화기로 무자안 중원민족이 계속하여 변방을 확장하고 개척한다. 물란부통전투에서 중원을 노리던 준가르몽골은 이 변화의 희생양이 된다. 1756년 건륭제에 의하여 철저히 정복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