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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64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은 자손을 남겼을까? 글: 원재예(袁載譽) 1398년, 주윤문이 황제에 등극하여, 주씨 명왕조의 두번쨰 황제가 되었다. 다만, 황제의 자리가 안정되기도 전에 그의 숙부인 주체(朱棣)가 1399년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지금의 북경을 기점으로 당시의 수도인 남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주체의 군대는 파죽지세였고, 주윤문의 군대는 계속 패퇴한다. 1402년, 남경성이 함락되고, 황궁에서는 불이 나고, 주윤문은 행방이 묘연해진다. 얼마 후, 주체는 남경 봉천전(奉天殿)에서 황제에 오른다. 역사에서 "정난지변(靖難之變)"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전체 정난지변때 대부분의 역사애호가들은 주체의 반란이 4년의 시간을 들여서 건문제를 끌어내리는데 성공한 것에 탄식하는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은 주윤문이 도대체 죽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궁금해 .. 2021. 12. 1.
건문제(建文帝)는 정말 실종되었는가? 글: 종고관금(縱古觀今) 사료로 보면, 영락제 주체(朱棣)는 확실히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을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황궁은 불이 붙었고, 궁전이 모조리 불타버렸으며, 주윤문의 시체도 찾아내질 못했다. 그리하여 일련의 전설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주체가 후기에 계속하여 주윤문을 수색했다고 하고, 정화의 7차에 걸친 하서양(下西洋)까지도 모두 주윤문의 행방을 찾기 위한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주체는 왜 요란하게 주윤문을 찾아다녔을까? 혹시 뭔가를 감추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을까? 목적은 아주 간단하다. 세상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이다: 건문제는 내가 핍박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그는 아직 살아있다. 그저 민간에 도망쳤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시군살질(弑君殺侄)의 죄명을.. 2021. 1. 31.
정난지역(靖難之役)후 주체(朱棣)는 왜 5번이나 몽골정벌에 직접 나섰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정난지역이후, 주체는 성공적으로 조카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으로부터 황제위를 빼앗는다. 그러나 후세인들은 그가 '황위를 찬탈'한 일에 대하여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를 '영락대제(永樂大帝)'로 칭송한다. 주체의 주요 공적을 나열해 보자면, 북경천도, 영락대전편수, 정화하서양, 안남수복, 오정막북(五征漠北)이 있다. 특히 5차례에 걸쳐 막북을 친정(親征)한 것은, 후세의 찬양을 받는다. 자고이래 제왕이 직접 정벌에 나서는 일도 많지 않지만, 주체는 역사상 최초로 직접 장성이북을 친정한 황제이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된 것이다. 주원장이 원왕조를 쫓아낸 후, 몽골통치자의 잔여세력은 완전시 소멸되지 않고, 새외(塞外)로 도망쳐 '북원(北元)'을 건립한다.. 2020. 10. 31.
역사상의 "태종(太宗)": 모두 "내로부정(來路不正)"한 황제들이다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중국 수천년의 왕조사에서 묘호(廟號)는 아주 연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묘호"와 "시호(諡號)"는 모두 어느 정도에서 황제일생의 공과시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다만 후세의 황제는 시호의 수가 늘어나서, 자손들이 조상을 위하여 시호를 정할 때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기 어려워졌다. 다만 '묘호'는 '시호'를 대체하여 황제에 대한 개관정론(蓋官定論)의 중요한 근거이다. 가장 원시적인 묘호는 상(商)나라때 건립된다. 당시에는 단지, "태(太)", "고(高)", "세(世)", "중(中)"의 4종이었다. 그리고, "조유공이종유덕(祖有功而宗有德)", 조는 공이 있는 황제에게, 종은 덕이 있는 황제에게 붙인다는 기준으로 조종의 묘호를 정했다. 나중에 왕조가.. 2020. 10. 26.
남명(南明)에 기회는 없었을까? 글: 구어정(九魚亭) 주체(朱棣,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예비방안을 마련해 두었다. 북방은 어쨌든 리스크가 큰 곳이다. 그래서 남경에 온전한 행정조직을 보류해둔 것이다. 육부육과(六部六科)를 모두 갖추었다. 남명에 괜찮은 지도자만 있었더라면, 그 효율은 북경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남명이 판세를 뒤집을 기회도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회는 항상 스쳐지나가 버렸다. 송고종이 건염남도(建炎南渡)할 때, 그는 1인황제라 할 수 있었다. 병사도 없고 장수도 없다. 그리고 금나라군대에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그에게서 제왕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조구(趙構)는 결국 안정적인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점차 역량을 모아서 금나라와 대치한다. 조구는 비교적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가 .. 2020. 6. 26.
명성조 주체(朱棣)의 정난지역(靖難之役)때 주원장(朱元璋)의 다른 아들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글: 묘불쾌락(猫不快樂) 주원장은 중국황제사상 할 얘기거리가 아주 많은 황제이다. 그의 출신이든, 아니면 경력이든 아니면 건국후의 각종제도책략이건간에. 당연히, 이런 위인은 일반적으로 생육능력이 비교적 강한 편이다. 그가 2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 2020.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