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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의41

북송(北宋)이 개봉(开封)을 도읍으로 정한 것이 실수였을까? 글: 고과노인(孤寡老人)​북송의 국도는 개봉이다. 이곳은 북방으로는 강적이 버티고 있다. 황하(黄河)라는 천험(天险) 외에는 더 이상 수도를 방어하는데 험준한 지형이나 지물이 없다. 나중에 금나라 군대가 밀고 들어오자 추풍낙엽처럼 무너져서 북송이 멸망하게 된다. ​그래서, 북송이 개봉을 도읍으로 삼고, 다른 곳으로 천도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계속 잘못이라고 인식되어왔다.​송태조(宋太祖) 조광윤(赵匡胤)은 한번 장안(长安)이나 낙양(洛阳)으로 천도할 것을 제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송태종(宋太宗) 조광의(赵光义)가 반대했고, 그후 몇달이 지나지 않아 조광조는 사망한다.​기실, 천도가 곤란하다는 정치적 요소를 제외하고, 북송이 천도하지 않은 것은 그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개봉은 연운십.. 2024. 5. 16.
이비웅(李飛雄)사건: 북송 최대의 사기극 글: 조대반(趙大胖) 1 북송 태평흥국3년(978년) 봄의 어느 저녁, 봉상(鳳翔) 주질(盩厔, 지금의 섬서성 周至縣, 중국발음으로는 盩厔, 周至가 같다)의 관청 마굿간에 관마(官馬)를 탄 남자가 출현한다. 그는 스스로 개봉(開封, 북송의 도성)에서 온 황제의 사자(使者)라고 하면서 변방으로 가서 공무를 집행해야 하니, 말을 몇 필 내달라고 요구한다. 마굿간을 지키는 병사들의 우두머리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게 문건을 내놓거나 혹은 신분을 증명할 물건을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이 사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품 속에서 조정의 고관들이 사용하는 말끈(馬纓)을 꺼내어 그에게 보여준다.(고대의 말끈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군수물자였다. 일반백성은 말을 키울 수는 있.. 2023. 3. 16.
송진종(宋眞宗) 조항(趙恒): 송태종의 셋째아들인 그는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는가? 글: 노황설사(老黃說史) 송태종 조광의(趙光義)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왜 황장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고, 황삼자에게 넘겨주었을까? 황삼자 조항은 조광의의 장자도 아니고, 황후소생도 아닌데 어떻게 하여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을까? 송태조 개보9년(976년) 십월 십구일 밤,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은 그의 동생 조광의를 불러 술을 마시고, 함께 궁안에서 잠든다. 다음 날 새벽(양력 11월 14일), 조광윤은 만세전에서 붕어하니 향년 50세이다. 송태조가 붕어할 때, 효장황후는 급히 환관 왕계은(王繼恩)으로 하여금 황자 조덕방(趙德芳)을 입궁시켜 후사를 처리하게 한다. 그러나 왕계은은 곧바로 남부로 가서 조광의에게 알리고, 조광의가 급히 입궁하여 등극하니, 그가 송태종이다. 조광윤의 죽음과 조.. 2021. 4. 13.
역사상의 "태종(太宗)": 모두 "내로부정(來路不正)"한 황제들이다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중국 수천년의 왕조사에서 묘호(廟號)는 아주 연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묘호"와 "시호(諡號)"는 모두 어느 정도에서 황제일생의 공과시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다만 후세의 황제는 시호의 수가 늘어나서, 자손들이 조상을 위하여 시호를 정할 때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기 어려워졌다. 다만 '묘호'는 '시호'를 대체하여 황제에 대한 개관정론(蓋官定論)의 중요한 근거이다. 가장 원시적인 묘호는 상(商)나라때 건립된다. 당시에는 단지, "태(太)", "고(高)", "세(世)", "중(中)"의 4종이었다. 그리고, "조유공이종유덕(祖有功而宗有德)", 조는 공이 있는 황제에게, 종은 덕이 있는 황제에게 붙인다는 기준으로 조종의 묘호를 정했다. 나중에 왕조가.. 2020. 10. 26.
진양성(晋陽城): 중국에서 풍수가 가장 뛰어난 도시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중국에 이런 용흥지성(龍興之城, 개국황제가 태어난 곳)이 있다. 춘추시기에 성이 만들어진 후, 여러 황제를 배출했다. 그러나 송나라에 이르러 철저히 파괴된다. 춘추말기, 진(晋)나라의 대경(大卿) 조간자(趙簡子)의 가신 동안(董安)은 태원분지의 북단 진수(晋水.. 2019. 1. 30.
조광윤의 죽음과 관련된 2명의 소인물 글: 백가잡평(百家雜評) 중국역사상의 풍운인물로서 조광윤의 일생은 전설로 충만하다. 그는 여러가지 수수께끼를 남겼는데, 그중 가장 큰 수수께끼는 바로 그의 죽음이다. 976년 십월 십구일 밤, 조광윤은 동생 조광의를 불러서 술을 마신다. 다음날 새벽에 조광윤이 돌연사하니 향년 50.. 2019.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