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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북송(北宋)이 개봉(开封)을 도읍으로 정한 것이 실수였을까?

by 중은우시 2024. 5. 16.

글: 고과노인(孤寡老人)

북송의 국도는 개봉이다. 이곳은 북방으로는 강적이 버티고 있다. 황하(黄河)라는 천험(天险) 외에는 더 이상 수도를 방어하는데 험준한 지형이나 지물이 없다. 나중에 금나라 군대가 밀고 들어오자 추풍낙엽처럼 무너져서 북송이 멸망하게 된다.

그래서, 북송이 개봉을 도읍으로 삼고, 다른 곳으로 천도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계속 잘못이라고 인식되어왔다.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赵匡胤)은 한번 장안(长安)이나 낙양(洛阳)으로 천도할 것을 제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송태종(宋太宗) 조광의(赵光义)가 반대했고, 그후 몇달이 지나지 않아 조광조는 사망한다.

기실, 천도가 곤란하다는 정치적 요소를 제외하고, 북송이 천도하지 않은 것은 그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봉은 연운십육주(燕云十六州)를 수복하는데 후방보급총기지로 더 없이 적합했다. 수운(水运)이 편리하여, 북송 전국의 물자는 이곳으로 집중시키는 것이 가장 편리했고, 북방전선과의 거리도 적당했다.

장안이나 낙양으로 천도한다면, 연운십육주를 수복하려 할 때, 다시 개봉을 핵심기지로 건설해야 하고, 전선의 대군에 물자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일 정말 연운십육주를 수복한다면, 북방에 장벽이 생기는 것이니, 개봉은 국도로 상당히 적합한 장소가 된다.

그래서, 송태조는 천도할 생각은 있었지만, 정말 결심을 내려서 진행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에게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연운십육주를 수복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금을 모아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몇년을 더 살았더라면 분명히 북벌을 진행했을 것이다.

북송시기 개봉을 중심으로 한 운하도

송태조 조광윤이 죽은 후, 송태종도 같은 목표가 있었다. 북한(北汉)을 멸망시키고, 두 차례에 걸쳐 북벌을 감행한다. 제1차는 직접 전장으로 나아가서 어가친정한다. 전쟁에서 져서 그렇지, 만일 이겼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북송이 개봉을 국도로 삼은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중후기 무력이 충분하지 못해서, 북방의 강적을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황제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송신종, 송철종은 모두 목표를 가진 황제들이었다. 그들이 변법을 견지한 목적은 바로 연운십육주를 수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 두 황제가 재위할 때는 정말 영토를 개척하기 위한 군사행동이 있었다.

송진종까지도 요나라의 침입에 저항하며, 어쨌든 친정까지 하고, <전연지맹(澶渊之盟)>을 맺었다.

송인종시기, 서하의 전성기였는데, 북송은 서하(西夏)에게도 압박을 받고 있었다.

송휘종시기, 동관(童贯)은 서하를 꼼짝 못하게 눌러놓고, 십여만대군으로 연운십육주를 북벌했다. 전투를 잘 해내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금나라가 기회를 노리게 된 것이다. 당연히 금나라군대가 개봉성으로 밀려들어올 때, 송휘종과 송흠종은 너무나 유약했다.

북송의 무력이 충분하지 못하게 된 근본원인은 사대부집단에 있었다. 황제도 타협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협조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송태조와 송태종은 사대부집단의 요구를 살펴주고나서도 군대의 전투력을 유지시킬 능력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황제들은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사대부집단이 강력해지면서 북송의 무력은 약해진다. 무력이 약해지면서 개봉을 수도로 삼은 것이 잘못된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기실, 개봉은 국도로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