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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진종(宋眞宗) 조항(趙恒): 송태종의 셋째아들인 그는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21. 4. 13.

글: 노황설사(老黃說史)

 

송태종 조광의(趙光義)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왜 황장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고, 황삼자에게 넘겨주었을까? 황삼자 조항은 조광의의 장자도 아니고, 황후소생도 아닌데 어떻게 하여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을까?

 

송태조 개보9년(976년) 십월 십구일 밤,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은 그의 동생 조광의를 불러 술을 마시고, 함께 궁안에서 잠든다. 다음 날 새벽(양력 11월 14일), 조광윤은 만세전에서 붕어하니 향년 50세이다. 송태조가 붕어할 때, 효장황후는 급히 환관 왕계은(王繼恩)으로 하여금 황자 조덕방(趙德芳)을 입궁시켜 후사를 처리하게 한다. 그러나 왕계은은 곧바로 남부로 가서 조광의에게 알리고, 조광의가 급히 입궁하여 등극하니, 그가 송태종이다.

 

조광윤의 죽음과 조광의가 황위를 물려받은 것에 대하여 후세인들은 많은 의문을 가진다. 그리하여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말이 널리 퍼진다. 조광윤은 전통적인 관습대로 황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전하지 않고, 동생 조광의에게 전하였으므로 후세인들은 조광의가 형을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 것이라 의심한다.

 

자신이 황위를 이은 것이 합법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조광의는 '금궤지맹(金櫃之盟)'을 꺼내들어 증명한다. 소위 '금궤지맹'은 두태후(杜太后, 조광윤, 조광의, 조정미의 생모)가 임종때 조보(趙普)를 불러 유언을 기록했는데, 황위를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도록 요구했으며, 송태조 조광윤이 죽은 후 동생 조광의가 물려받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유서는 금궤에 넣어두었기 때문에, '금궤지맹'이라 부른다.

 

조광의가 도대체 어떻게 황위를 이어받았는지는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송태종의 즉위는 스스로 오른 것이고, 태감 왕계은의 공이 크다는 것이다. 송태종 조광의가 즉위한 후, 왕계은은 신임과 중용을 받는다. 태감의 우두머리로 하북의 병력을 오랫동안 거느린다. 994년, 수만의 병사를 거느린 이순(李順)이 한주(사천성 광한), 팽주(사천성 팽현)을 연파하고, 성도를 점거한다. 그리고 국호를 대촉(大蜀)이라 한다. 왕계은은 검남,양천초안사로서 군대를 이끌고 2로로 사천에 들어가 성도를 함락시키고 이순을 생포한다. 왕계은은 성도를 점령한 후, 선정사로 임명되고 순주방어사가 된다.

 

조광의에게는 사료에서 찾을 수 있는 후비가 12명이고, 그들과의 사이에 모두 9남7녀를 낳았다. 9명이 아들은 각각 황장자 조원좌(趙元佐), 황차자 조원우(趙元佑), 황삼자 조원간(趙元侃), 황사자 조원빈(趙元份), 황오자 조원걸(趙元傑), 황육자 조원악(趙元偓), 황칠자 조원칭(趙元偁), 황팔자 조원엄(趙元儼), 황구자 조원억(趙元億)이다.

 

조광의의 황위는 약간 "내로부정(來路不正)" 즉 부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했다. 황위를 물려줄 때, 그가 당시에 했던 말대로라면, 두태후가 남긴 유언에 따라 '형종제급' 즉 넷째동생 조정미(趙廷美)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런 결과를 그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이 장애를 제거하기로 한다. 태평흥국7년(982년), 송태종은 넷째동생인 진왕(秦王) 조정미가 황위를 계승할까 두려워, 조정미가 노다손(盧多遜)과 모반을 꾀했다고 모함하여, 조정미를 서인으로 폐하고 부릉(涪陵)으로 유배보난다. 옹희원년(984년), 조정미는 방주(지금의 호북성 방현)로 보내어지는데, 우울하게 지내다가 병사한다. 나이 겨우 38살이었다.

 

다섯째 동생 조광찬(趙光贊)은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조정미가 죽자, 조광의의 후계자는 자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자를 세우는 전통에 따르자면, 태자의 자리는 황장자 조원좌의 차지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실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정미가 모함받은 사건에서 한 사람이 나서서 조정미가 억울하다고 호소한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조광의의 장자인 조원좌이다. 조원좌는 넷째숙부 조정미가 억울하게 부황에게 모함을 받은 사실을 잘 알았고, 그래서 앞에 나서서 억울하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조광의가 결심을 바꾸지는 않았다.

 

조정미가 죽은 후, 조완자는 상심하고 두려움에 결국 미쳐버린다. 그리고 조그만 잘못을 저지른 시종을 날카로운 칼로 찔어죽여 버린다. 옹희2년(985년), 병세는 약간 호전되고, 송태종은 크게 기뻐한다. 그리하여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중양절에 궁안에서 연회를 여는데, 조원좌는 막 병세가 호전되어 부르지 않았다. 여러 왕들은 연회가 끝난 후 돌아갔고, 돌아가는 길에 마침 조원좌의 집이 있었다. 조원좌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두 황상의 연회에 참석했구나 나만 부르지 않은 것을 보면 나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분노하여 술에 취한 후 밤에 궁에 불을 지른다. 송태종은 어사를 보내 조원좌를 체포한다. 그리고 중서성에 보내어 심문하고, 평민으로 폐한 후, 균주에 안치한다. 재상 송기(宋琪)가 백관을 이끌고 세번이나 상소를 올려 조원좌가 경사에 머무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다. 조원좌는 황산까지 갔다가 다시 불려와서 남궁에 유폐되고, 사람을 보내어 감시한다.

 

황장자 조원좌는 미쳐서 쫓겨났다. 그러니 그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없었다. 황장자를 빼면, 황차자 조원우의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조원우는 부친이 죽기 5년전에 미리 병사한다. 태평흥국7년(982년) 조원우는 광평군왕에 봉해지고, 다음 해에 진왕에 봉해진다. 옹희연간에, 개봉윤 겸 시중이 되고, 허왕에 봉해지며, 중서령의 관직을 더한다. 순화3년(992년)에 병사하니 나이 겨우 27살이었다. 그는 후사도 남기지 못한다.

 

조광의의 넷째동생도 죽고, 장자는 미치고, 차자도 죽었다. 조광의의 나이도 이미 많아졌다. 몸도 날로 쇠약해진다. 사후의 일도 생각해 두어야 했다. 지도원년(995년), 참지정사 구준이 송태종에게 태자를 세울 것을 권한다. 두 사람이 상의한 후 조원간을 태자로 세우기로 한다. 이는 조원간에 있어서 '하늘에서 굴러떨어진 떡'이라 할 수 있다.

 

조원간의 첫이름은 조덕창(趙德昌)이며, 송태종 조광의의 셋째아들이다. 모친은 송태종의 비빈인 이부인이다. 조덕창은 어렸을 때 영특하고 용모도 특이했다. 여러 왕들과 놀이를 할 때 작전을 짜는 것을 좋아해서 스스로 '원수(元帥)'라 칭했다. 그리하여 송태조의 사랑을 받고, 그를 궁안에서 기른다. 태평흥국8년(983년), 검교태보, 동중서문하평장사의 관직을 받고 한왕에 봉해진다. 그리고 이름을 조원휴(趙元休)로 개명한다. 옹희3년(986년) 7월 다시 이름을 조원간으로 개명한다. 단공원년(988년) 양왕에 봉해지고, 순화5년(994년) 구월 수왕에 봉해지며, 검교태부, 개봉부윤이 된다.

 

지도원년(995년), 조원간은 태자에 봉해지며 이름을 다시 조항(趙恒)으로 개명한다. 조항은 송태종의 장자도 아니고, 황후소생도 아니어서 원래는 황위와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장형 조원좌가 미쳐버리고, 둘째형 조원우가 급사하면서 그는 행운으로 태자에 오른다.

 

근대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단(呂端)은 큰 일에서는 멍청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이는 어느 원수를 평하는 말이다. 여기의 여단은 바로 송태종때의 재상이다. 조광의의 그에 대한 평가는 "작은 일은 멍청하게 처리하지만, 큰 일은 멍청하게 처리하지 않는다."이다.

 

여단은 유주 안차현(지금의 하북성 낭방시 안차구) 살마이다. 대대로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후진의 병부시랑 여기(呂琦)의 아들이고, 상서좌승 여여경(呂餘慶)의 동생이다. 여단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했다. 처음에는 부친의 음서로 천우비신의 관직을 받고, 후주때는 저작좌랑, 직사관이 된다. 북송이 건립된 후, 성도지부가 된다. 송태종때는 우간의대부, 참지정사가 된다.

 

지도원년(995년), 여단은 재상에 오른다. 호부시랑, 동평장사가 되고, 문하시랑, 병부상서가 된다. 송태종이 여단을 재상으로 삼으려 할 때 누군가가 여단은 사람됨이 일을 멍청하게 처리한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조광의는 여단을 굳이 쓰겠다고 하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단은 작은 일은 멍청하게 처리하지만, 큰 일은 멍청하게 처리하지 않는다.

 

송태종은 확실히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에, 여단은 그의 의사결정을 지지한다. 지도3년 이월, 송태종 조광의의 병세가 위중해진다. 조정에서 새 황제를 누구로 세우느냐를 두고 명쟁암투가 일어난다. 이황후와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왕계은은 조항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계은은 송태종의 병세가 위중한 틈을 타서, 암중으로 참지정사 이창령(李昌齡), 전전도지휘사 이계훈(李繼勛), 지제고 호단(胡旦)등과 연락하여 이황후와 함께 연금되어 있던 조원좌를 옹립하고자 한다.

 

삼월이십구일, 재상 여당이 입궁하여 황상의 병세를 묻는다. 이때 태종은 이미 오늘내일 하는 중이었다. 여단은 태종의 좌우에 오직 왕계은과 이황후만 있고, 태자 조항이 보이지 않자, 왕계은이 옛날의 수법을 다시 사용하여 황위승계에 장난을 칠 것을 우려했다. 그는 급히 재상부로 돌아와 비밀리에 서신을 써서 심복을 통해 태자에게 보낸다. 그에게 빨리 입궁하여 불측의 사태를 막도록 하라는 것이다.

 

바로 이때 송태종은 이미 붕어했다. 이황후는 왕계은을 중서성으로 보내어 여단에게 말한다. 여단은 변고가 났다는 것을 알아, 바로 왕계은은 오히려 중서화각에 가두어두고, 사람을 시켜 왕계은을 감시하도록 한다. 여단은 중서성에서 만세전으로 갔고, 송태종의 생전 뜻을 들어 이황후와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결국 조항을 즉위하도록 만든다. 그가 바로 송진종이다.

 

송진종은 즉위후, 황위다툼과 관련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과 벌을 내린다. 여단은 이황후와 왕계은의 음모를 무너뜨리고 송진종을 옹립한 공로가 있어 우복야에 봉해진다. 함평2년(999년) 태자태보로 올린다. 함평3년(1000년)에 여단이 사망한다. 나이 66세였다. 사공에 추증하고, 시호를 정혜(正惠)로 내린다. 왕계은은 쫓겨나 우감문위장군으로 균주에 안치되고, 유배지에서 죽는다.

 

송진종의 즉위후, 조원좌가 자신과 모친이 같은 형님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조원좌를 좌금오위상장군에 봉하고, 송태종이 박탈한 초왕의 작위를 회복시켜준다. 그가 병치료하면서 조회에 나오지 않도록 해주었고, 검교태사, 우위상장군으로 다시 올려준다. 송진종은 태산에 봉선한 후, 조원좌에게 태부의 실직을 준다. 분음에 제사를 지낸 후에는 태위 겸 중서령으로 삼고 다시 태사, 상서령 겸 중서령으로 하고 천책상장군, 흥원목을 내리고, 검을 차고 대전에 오를 수 있도록 하고, 조령상서부칭명(詔令上書不稱名)의 대우를 해준다.

 

송진종의 아들 송인종 조정(趙禎)이 즉위한 후, 다시 큰아버지 조원좌를 강릉목에 봉하고, 식읍을 늘려준다. 천성5년(1027년) 십이월 조원좌는 사망한다. 향년 63세이다. 그는 제왕으로 추봉된다. 명도2년(1033년) 다시 노왕으로 고쳐지고, 나중에 다시 위왕으로 고쳐 봉해진다.

 

송진종 조항은 즉위초기 정사에 근면했고, 근검절약했다. 오대십국이래의 세금을 감면해주어, 사회가 비교적 안정된다. 농산물의 생산이 늘어나고, 방직, 염색, 종이제작, 도자기제작등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한다. 무역도 성행한다. 그리하여 북송은 경제번성기에 접어든다. 역사에서 '함평지치(咸平之治)'라 부르는 시기가 된다.

 

다만, 송진종의 재위기에 나타나는 특징적 사실은 송나라 건립초기, 북방의 요나라와의 사이에 여러번 힘겨루기가 있었고,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송태종의 북벌이 실패한 후, 송나라조정은 전략을 바꾸어야만 했다. 점점 적극적인 공격에서 수동적인 방어로 바뀐다. 연운십육주를 수복할 수 없어서 북방의 험준한 방어요새가 없었다. 요나라의 기병은 언제든지 황하로 달려올 수 있었다.

 

경덕원년(1004년), 주전파인 구준등의 권유로, 조항은 친정에 나서 북상한다. 쳐들어온 요나라군대와 전연(澶淵)에서 회전을 벌인다. 당시 국면은 북송에 유리했다. 다만 조항은 요나라의 기세가 겁났고, 쌍방의 교전이 오래되고, 이기고 지기를 반복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매년 요나라에 일정한 은견(銀絹)을 주는 것을 조건으로 전연에서 화해하고 형제지국이 될 것을 약정한다. 바로 '전연지맹'이다. 

 

'전연지맹'은 송과 요간의 25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다. 그후 송과 요는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한다. 전연지맹을 체결한 후, 조항은 이를 자신의 자랑스런 업적으로 여겼고, 한동안 득의만면한다.

 

다만 한가지 어쩔 수 없는 사실은 '전연지맹'은 송나라가 번국에 세폐를 주고 평화를 얻는 방식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대신 왕흠약(王欽若)이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하지맹(城下之盟, 전연지맹을 가리킴)은 <춘추>에서 치욕이라고 일컷습니다. 전연의 조치는 만승지존으로서 성하지맹을 맺은 것이니 이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왕흠약의 말은 원래 구준을 폄하하려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허영을 좋아하는 조항에게도 찬물을 끼얹은 꼴이었다. 

 

왕흠약, 정위(丁謂)는 조항의 약점을 잘 파악했고, 기회를 틈타 송진종에게 아부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결국 재상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재상이 된 후, 왕흠약, 정위는 항상 천서(天書), 부서(符瑞)같은 것으로 조야를 고혹시킨다. 조항도 봉선에 탐닉하고, 궁궐을 크게 짓는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말년에 그의 명성은 형편없어진다. 건흥원년(1022년), 재위25년의 조항은 연경전에서 붕어한다. 향년 55세이다.

 

그외에 조항은 문학과 서예도 좋아했다. 그는 비교적 영향력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비교적 유명한 시는 <여학편(勵學篇)이 있다. 

 

부가부용매양전(富家不用買良田) 서중자유천종속(書中自有千鍾粟)

안거부용가고당(安居不用架高堂) 서중자유황금옥(書中自有黃金屋)

출문막한무인수(出門莫恨無人隨) 서중차마다여족(書中車馬多如簇)

취처막한무양매(娶妻莫恨無良媒) 서중자유안여옥(書中自有顔如玉)

 

현명한 인재를 갈구하던 송진종은 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독서할 것을 권했다. 시에서 지나치게 영화부귀, 공명이록을 추구하도록 한 것은 있지만 아주 생동감있는 비유로 천년동안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송진종은 재위초기에 좋은 황제가 되고자 노력했고, 그래서 '함평지치'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재위기간이 길어지면서, 곁에 있던 신하들이 아부하는데 익숙해지고, 일찌기 성주는 갈수록 혼주가 되어 간다. 토토는 <송사>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이러한데, 확실히 폐부를 찌르는 말이다: "진종은 영명한 군주이다. 그의 즉위초기에 재상 이항은 그가 너무 총명하여 너무 많은 일을 벌일 것을 우려하여 여러번 자연재해를 가지고 그의 사치심을 막으려 했고,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전연의 맹, 봉선의 일, 상서, 천서의 일들을 거치면서 일국의 군신들은 미쳐버린 듯했다. 아 괴이한 일이다."

 

송진종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후세에 평가가 높은 '진황한무(진시황화 한무제)'도 말년에 멍청한 일을 저지른다. 진시황은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지 않아 간사한 자들이 그 틈을 끼어들어 부소를 죽이고 호해를 세웠으며, 그리하여 진나라는 2세만에 망하게 된다. 한무제는 영명하였지만 큰 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군대를 자주 출동시켜 전쟁을 치렀으며, 말년에는 소인의 말을 듣고 무고의 화를 일으켜, 위황후와 태자 유거가 모두 죽게 만든다. 연루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얼마 후에 태자가 무고하다는 것을 알고 '사자궁'을 세웠으며 자책했다. 하늘에 '죄기조'를 써서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 "
짐은 즉위한 이래 광패하여 천하가 고통을 겪었으니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백성을 해하고, 천하를 낭비하게 하는 자는 모조리 파면하겠다"

 

그래서, 좋은 황제는 선시(善始)해야할 뿐아니라 선종(善終)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