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진양성(晋陽城): 중국에서 풍수가 가장 뛰어난 도시

중은우시 2019. 1. 30. 00:32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중국에 이런 용흥지성(龍興之城, 개국황제가 태어난 곳)이 있다. 춘추시기에 성이 만들어진 후, 여러 황제를 배출했다. 그러나 송나라에 이르러 철저히 파괴된다.


춘추말기, 진(晋)나라의 대경(大卿) 조간자(趙簡子)의 가신 동안(董安)은 태원분지의 북단 진수(晋水) 북안(北岸), 현옹산(懸瓮山) 동쪽에 진양성(晋陽城)을 축성한다. 춘추말기(기원전455-기원전453), 진나랴의 대권을 장악한 지씨(智氏)는 한씨(韓氏) 및 위씨(魏氏)와 연합하여, 조씨(趙氏)를 공격한다. 조씨는 진양을 근거지로 3년을 버티며 굳게 지킨다. 진양성이 곧 수몰될 때쯤, 조양자(趙襄子)는 암중으로 한, 위 두 집안과 연합하여, 결국 한, 위가 창끝을 돌려서 일거에 같이 지씨를 소멸시킨다. 그후 세 집안이 진나라를 나눠가진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역사는 전국시대로 접어든다.


춘추시기, 진나라는 100여년간 패주로 있었고, 만일 삼가분진이 없었더라면, 역사는 아마도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진양은 태원군(太原郡), 병주(幷州)의 치소(治所)이다. 이곳에서는 역사상 많은 황제를 배출한다.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은 8살때 진왕(晋王)이 되어 태원으로 가고, 16년후에 등극하여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열어 서한의 태평성세를 이룬다; 북제의 고환(高歡), 고양(高洋) 부자는 진양을 기반으로 하여, 북제를 건립한다; 수나라의 양광은 여기에서 진왕이 되고, 나중에 황제에 올라 수양제가 된다; 태원유수 이연은 진양에서 거병하여, 618년 당나라를 건립한다.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의 고향은 바로 병주 문수이다.


오대십국의 이존욱(李存勖), 석경당(石敬瑭)은 진양을 기반으로 각각 후당, 후진을 건립한다.


후진의 하동절도사 유지원(劉知遠)은 다시 진양을 근거지로 하여, 거란군이 남하하여 후진을 멸망시킬 때인 947년 유지원은 진양에서 황제에 올라 후한(後漢)을 건립한다.


950년, 후한의 한은제(漢隱帝) 劉承佑)는 대장 곽위(郭威)를 시기하여, 그가 개봉에 남겨둔 가족을 멸족시킨다. 951년 곽위가 업도에서 후주를 건립한다. 후한의 한고조 유지원의 동생인 하동절도사 유숭(劉崇)은 후주에 불복하여 진양에서 북한(北漢)을 건립한다.


곽위는 후주를 건립한 후 황위를 시영(柴榮)에게 물려준다(곽위의 자식은 모두 죽임을 당해서 조카인 시영에게 물려준 것이다). 960년, 후주의 대장인 조광윤은 황교병변으로 송나라를 건립한다. 북송은 전후로 무평(武平), 후촉, 남한, 남당등 할거정권을 멸망시키고, 북한이 마지막으로 남은 할거정권이 된다.


979년, 송태종 조광의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북한을 정벌한다. 송나라군대는 먼저 북한을 지원하는 요군을 궤멸시키고, 다시 태원을 맹공한다. 북한의 군주 유계원(劉繼元)은 버티지 못하고 성을 나와 항복한다. 이렇게 북한은 멸망한다.


진양은 자고이래로 제왕의 용흥지지이다. 혹은 할거정권이 중앙정권에 반항하는 근거지였다. 그래서 "용맥(龍脈)"이라고 알려졌다. 진양성의 지형이 험준하고 성은 높고 호성지는 깊어서, 수비는 쉬우나 공격은 어려웠다. 백성들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용맹하고 사나워서 통제하기 어려웠다.


송태종은 이 곳에서 다시 할거정권이 나타나서 북송정권을 위협할 것이 겁나고, 동시에 진양성의 군민들이 장기간 완강하게 저항한 것에 분노하여, 이 땅은 "흥성할 때도 맨 마지막에 굴복하고, 쇠락하면 가장 먼저 반란을 일으키는 곳"이라고 하여, 개봉과 태원은 성수(星宿)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진양을 파괴시킨다. 성에 살고 있던 사대부, 부호들은 개봉, 낙양으로 이주시키고, 성을 불태운다. 그리고, 수만명을 보내어 진양 북쪽의 계주산(系舟山)을 깍아없앤다. 이를 "발용각(拔龍角)" 즉 용의 뿔을 뽑아버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명을 내려 분수(汾水), 진수(晋水)의 제방을 터트려서, 진양성이 물에 잠기게 하여 폐허로 만든다. 그리고 아무도 이곳에 거주할 수 없게 하여, 철저히 파괴시킨다.


용흥지성 진양은 송나라이후 철저히 폐허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