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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47

당나라이후 장안을 왕조의 수도로 삼지 않은 이유는? 글: 청수(清水) ​ 진, 한, 당의 휘황찬란한 역사는 모두 수도를 관중지구에 두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통일왕조는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더 이상 어느 왕조도 관중을 수도로 삼거나, 관중을 기반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북송도 낙양으로 천도할 생각은 하였지만, 장안으로 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주원장도 관중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시의 관중지구는 이미 너무 파괴되어 할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관중지구의 쇠퇴원인은 여러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인 점도 있고, 정치적인 점도 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제중심의 이전이다. 특히 대운하가 개통되어 남북경제가 연결된 후, 관중의 경제적지위는 점차 저하된.. 2024. 4. 11.
진실한 대당 장안(長安): 그다지 번화하지 않았다... 글: 해변적서새라(海邊的西塞羅) 아래의 도면은 당나라때의 장안성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의 주택지역(坊)과 상업지역(市)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높은 담장, 제도적으로 법률로 엄격히 통제했다. 이런 기이한 도시의 구성방식은 중국역사상 아주 유명한 "방시제도(坊市制度)"이다. 그렇다. 비록 지금이 대다수 영화드라마작품에서는 성당시기의 장안이 얼마나 번화했는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역사적으로 진실한 성당의 장안성은 아마도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정제(整齊), 숙목(肅穆), 냉청(冷淸)했었다고 할 것이다. 전체 도시의 25개 관도(官道)는 동서로 14도(道), 남북으로 15도(道)이다. 전체 장안성은 이들 도로로 모두 108.. 2023. 7. 18.
삼국시대 조위(曹魏)는 왜 5개의 도성(都城)을 두었을까? 글: 역사D학당 역사상 많은 왕조는 정치, 군사, 경제적인 여러가지 고려하에 수도 이외에 일부 중요도시에 도성을 설치했고, 그 지역중심 및 전략요충지로서의 작용을 발휘하게 했다. 예를 들어, 진나라때는 구도(舊都) 옹성(雍城)과 신도(新都) 함양(咸陽)을 두었고, 동한(東漢)왕조는 서경(西京) 장안(長安)과 동경(東京) 낙양(洛陽)을 두었으며, 명나라는 북도(北都) 북경(北京), 중도(中都) 봉양(鳳陽), 남도(南都) 남경(南京)의 세개의 도성을 두었다. 그런데, 삼국시대 조위는 그중 특별한 경우이다. 나라의 강역은 북방의 절반인데, 다섯개의 도성을 설치한다. 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위나라는 장안(長安), 초(譙), 허창(許昌), 업(鄴), 낙양(洛陽)을 오도(五都)로 하였다" 도성의 수량은 심지어 강.. 2021. 12. 12.
장안(長安)은 왜 서안(西安)으로 개명했는가? 글: 장금(張嶔) 중국고대도시발달사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안개명(長安改名)'이다. 명나라 홍무2년(1369년), 명나라의 북벌군이 관중평원을 점령한다. 그해 삼월 명태조 주원장은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천년이상의 수도역사를 지닌 고도 장안에 지금까지 사용되는 새 이름을 부여한다: 서안. 비록 이번 '개명'에 대하여 후세에는 여러 논쟁이 있고, 심지어 어떤 아마추어역사가는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고도장안'의 격을 떨어뜨리게 된 것이 이번 개명으로 인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상, 반대로 이 고도가 다시 한번 화려한 변신을 이룬 것이 바로 이 개명으로 인해서이다: 파괴된 '구도(舊都)'에서 서북의 '중진(重鎭)'으로 변신한 것이다. 후세인들이 그리워하는 당나라의 장엄한 장안성은 당나라말기부터.. 2020. 7. 2.
당현종은 왜 고선지(高仙芝)를 참형에 처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안록산의 말발굽이 남하하여 기세등등하게 당나라의 양경(兩京)인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으로 몰려들었다. 천하가 태평성세를 오래 누렸고, 곳곳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이런 시기에 전투라는 것은 아주 낯선 단어가 되어 있었다. .. 2019. 12. 13.
수양제는 왜 고구려를 끝까지 공격했는가? 글: 야독사서(夜讀史書) 수나라는 중국역사상 단명한 통일왕조중 하나이다. 왕조는 겨우 37년간 존속했다. 수나라는 수문제 통치시기와 수양제 통치전기에 휘황한 전성기를 누렸다. 다만 수양제가 재난적인 삼정고구려(三征高句麗) 전쟁후에 국력이 신속히 고갈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 2019. 10. 3.
당나라때 사람들은 "무측천시대"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보았는가? 글: 독사품생활(讀史品生活)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무측천의 인생궤적은 여러 중요한 시간들이 있었다. 638년 입궁하고, 649년 감업사로 출가하였으며, 655년 황후에 오르고, 674년 천후(天后)에 올랐으며, 다시 683년 임조칭제(臨朝稱制)하고, 690년에는 처음으로 황제를 칭한다....이렇게 말할 .. 2019. 5. 28.
이자성은 북경의 실패후 왜 남경으로 가지 않았는가? 글:천애간점(天涯看點) 1644년, 이자성은 산해관에서 패배한 후 북경에서 퇴각한다. 1년도 되지 않아, 이자성의 근거지인 섬서는 청군에 의해 남북에서 협공을 받는다. 이자성은 할 수 없이 대순군을 이끌고 대본영 서안에서 퇴각한다. 처음에 이자성의 생각은 하남을 거쳐 남경으로 가는 .. 2019. 1. 7.
관우의 과오관참육장(過五關斬六將)의 노선도 글: 동리채국(東籬採菊) 삼국연의에서, 관우가 조조에 투항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비록 조조가 관우를 후대했지만, 그 군웅혼전의 시기에 관우는 여전히 유비에게 마음이 향해 있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관우는 조조를 떠난다. 이어서 오관을 지나면서, 여섯장수를 벤다. 오.. 2019. 1. 7.
무측천의 출생지 논쟁 글: 화운초(和運超) 사천 광원시(廣元市)는 여러해동안 관광선전에서 삼국중진이라는 것과 여황고향이라는 두 가지 레테르를 붙여왔다. 2017년 사천성은 사천역사명인문화전승 창신공정을 시행하여, 전문가학자의 회의를 거쳐, 공식적으로 제1차 10대역사명인을 공표했는데, 무측천도 그 .. 2018.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