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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48

북송(北宋)이 개봉(开封)을 도읍으로 정한 것이 실수였을까? 글: 고과노인(孤寡老人)​북송의 국도는 개봉이다. 이곳은 북방으로는 강적이 버티고 있다. 황하(黄河)라는 천험(天险) 외에는 더 이상 수도를 방어하는데 험준한 지형이나 지물이 없다. 나중에 금나라 군대가 밀고 들어오자 추풍낙엽처럼 무너져서 북송이 멸망하게 된다. ​그래서, 북송이 개봉을 도읍으로 삼고, 다른 곳으로 천도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계속 잘못이라고 인식되어왔다.​송태조(宋太祖) 조광윤(赵匡胤)은 한번 장안(长安)이나 낙양(洛阳)으로 천도할 것을 제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송태종(宋太宗) 조광의(赵光义)가 반대했고, 그후 몇달이 지나지 않아 조광조는 사망한다.​기실, 천도가 곤란하다는 정치적 요소를 제외하고, 북송이 천도하지 않은 것은 그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개봉은 연운십.. 2024. 5. 16.
당나라이후 장안을 왕조의 수도로 삼지 않은 이유는? 글: 청수(清水) ​ 진, 한, 당의 휘황찬란한 역사는 모두 수도를 관중지구에 두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통일왕조는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더 이상 어느 왕조도 관중을 수도로 삼거나, 관중을 기반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북송도 낙양으로 천도할 생각은 하였지만, 장안으로 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주원장도 관중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시의 관중지구는 이미 너무 파괴되어 할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관중지구의 쇠퇴원인은 여러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인 점도 있고, 정치적인 점도 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제중심의 이전이다. 특히 대운하가 개통되어 남북경제가 연결된 후, 관중의 경제적지위는 점차 저하된.. 2024. 4. 11.
진실한 대당 장안(長安): 그다지 번화하지 않았다... 글: 해변적서새라(海邊的西塞羅) 아래의 도면은 당나라때의 장안성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의 주택지역(坊)과 상업지역(市)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높은 담장, 제도적으로 법률로 엄격히 통제했다. 이런 기이한 도시의 구성방식은 중국역사상 아주 유명한 "방시제도(坊市制度)"이다. 그렇다. 비록 지금이 대다수 영화드라마작품에서는 성당시기의 장안이 얼마나 번화했는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역사적으로 진실한 성당의 장안성은 아마도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정제(整齊), 숙목(肅穆), 냉청(冷淸)했었다고 할 것이다. 전체 도시의 25개 관도(官道)는 동서로 14도(道), 남북으로 15도(道)이다. 전체 장안성은 이들 도로로 모두 108.. 2023. 7. 18.
삼국시대 조위(曹魏)는 왜 5개의 도성(都城)을 두었을까? 글: 역사D학당 역사상 많은 왕조는 정치, 군사, 경제적인 여러가지 고려하에 수도 이외에 일부 중요도시에 도성을 설치했고, 그 지역중심 및 전략요충지로서의 작용을 발휘하게 했다. 예를 들어, 진나라때는 구도(舊都) 옹성(雍城)과 신도(新都) 함양(咸陽)을 두었고, 동한(東漢)왕조는 서경(西京) 장안(長安)과 동경(東京) 낙양(洛陽)을 두었으며, 명나라는 북도(北都) 북경(北京), 중도(中都) 봉양(鳳陽), 남도(南都) 남경(南京)의 세개의 도성을 두었다. 그런데, 삼국시대 조위는 그중 특별한 경우이다. 나라의 강역은 북방의 절반인데, 다섯개의 도성을 설치한다. 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위나라는 장안(長安), 초(譙), 허창(許昌), 업(鄴), 낙양(洛陽)을 오도(五都)로 하였다" 도성의 수량은 심지어 강.. 2021. 12. 12.
장안(長安)은 왜 서안(西安)으로 개명했는가? 글: 장금(張嶔) 중국고대도시발달사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안개명(長安改名)'이다. 명나라 홍무2년(1369년), 명나라의 북벌군이 관중평원을 점령한다. 그해 삼월 명태조 주원장은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천년이상의 수도역사를 지닌 고도 장안에 지금까지 사용되는 새 이름을 부여한다: 서안. 비록 이번 '개명'에 대하여 후세에는 여러 논쟁이 있고, 심지어 어떤 아마추어역사가는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고도장안'의 격을 떨어뜨리게 된 것이 이번 개명으로 인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상, 반대로 이 고도가 다시 한번 화려한 변신을 이룬 것이 바로 이 개명으로 인해서이다: 파괴된 '구도(舊都)'에서 서북의 '중진(重鎭)'으로 변신한 것이다. 후세인들이 그리워하는 당나라의 장엄한 장안성은 당나라말기부터.. 2020. 7. 2.
당현종은 왜 고선지(高仙芝)를 참형에 처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안록산의 말발굽이 남하하여 기세등등하게 당나라의 양경(兩京)인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으로 몰려들었다. 천하가 태평성세를 오래 누렸고, 곳곳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이런 시기에 전투라는 것은 아주 낯선 단어가 되어 있었다. .. 2019.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