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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이후 장안을 왕조의 수도로 삼지 않은 이유는?

by 중은우시 2024. 4. 11.

글: 청수(清水)

진, 한, 당의 휘황찬란한 역사는 모두 수도를 관중지구에 두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관중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통일왕조는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더 이상 어느 왕조도 관중을 수도로 삼거나, 관중을 기반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북송도 낙양으로 천도할 생각은 하였지만, 장안으로 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주원장도 관중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시의 관중지구는 이미 너무 파괴되어 할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관중지구의 쇠퇴원인은 여러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인 점도 있고, 정치적인 점도 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제중심의 이전이다. 특히 대운하가 개통되어 남북경제가 연결된 후, 관중의 경제적지위는 점차 저하된다. 그리고 관중지구는 천년이상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역대왕조가 과도한 개발을 했다. 그리하여 물이 부족하고, 건조하게 되어, 관중지구는 수도지역으로서의 경제적기반을 상실해버린다. 결국 양식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면 수도로 삼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외에 군사적인 각도에서 보더라도, 당나라이전까지 국가의 주요군사위협은 서북방향이었다. 흉노, 돌궐, 토번등등. 이때는 관중을 수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농경문명에 있어서, 도성은 정치중심이며 경제중심이다. 국가의 정수가 있는 곳이다. 봉건시대는 중앙집권제로, 군대, 관료와 부가 모두 이곳에 집중된다. 수도지구는 반드시 방어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외적을 방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송나라이후, 중원왕조의 주요위협은 북방이다. 중원왕조의 정치와 경제가 북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왕조는 비수도지역에 대량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비용을 대량 소모하게 되고, 심각한 지방할거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송때는 군대를 수도에 집중시킨다. 그리고 대운하가 완공된 후, 관중지구의 역할도 대폭 하락한다. 장강중하류평원의 경작지가 개발되면서 남방의 경제가 개발된다. 관중의 경제적역할은 더욱 약화되고 갈수록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당나라이후, 남방의 인구, 경제규모는 북방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양송이후 남북방경제와 인구가 철저히 역전된다. 장강, 운하는 운송의 황금수로가 된다. 명나라에 이르러, 경제중심은 강남으로 이전되고, 정치중심은 북방으로 이전된다(북경). 군사적으로, 양송의 최대위협은 북방의 거란이었다. 북송이 개봉을 수도로 삼은 것은 실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연운십육주를 잃었기 때문에, 북송이 더 이상 북쪽에 수도를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북경을 수도로 삼은 것은 정확한 선택이었다. 천자가 국문을 지키고, 군왕이 사직을 지킨다. 그리고 소위 '왕기'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장안은 왕기가 암담해졌다. 당나라말기의 전란이후 장안은 이미 완전히 파괴된다. 주온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후 장안과 관중지구를 불질러버린다. 이미 수도로서의 조건과 자격을 잃은 장안은 오랫동안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한나라때는 관중의 인구가 많지 않아서 그래도 견딜만했다. 그러나, 수당이후에는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였다. 당고종이후, 황실과 관료들은 모두 낙양으로 가서 먹고살 것을 챙겨야 했다. 당나라가 장안을 수도로 삼은 때로부터 안사의 난까지 100여년동안, 당나라의 황제는 50여년을 낙양에서 지낸다. 즉, 당시에 이미 관중지구는 피폐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측천은 아예 낙양을 도읍으로 삼는다. 관중평원의 환경이 계속 악화되면서, 황하의 홍수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북송말기, 황하가 회수로 물길을 돌려 바다로 들어가게 된다. 관중지구의 운하는 철저히 버려진다. 이렇게 수도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상실하면서, 당나라이후 더 이상 장안을 수도로 삼는 왕조는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