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호청천(鼎湖聽泉)
안록산의 말발굽이 남하하여 기세등등하게 당나라의 양경(兩京)인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으로 몰려들었다. 천하가 태평성세를 오래 누렸고, 곳곳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이런 시기에 전투라는 것은 아주 낯선 단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태평성세라 하더라도 국방인식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로 거안사위(居安思危)이다.
그때 중원은 이미 여러 해동안 전쟁이 없었다. 모두 시를 읊고 악기를 연주하며, 행복함에 젖어있었다. 군대는 대부분 당현종 이융기에 의하여 변방으로 보내처져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병법에 대한 지식이 없다. 반군이 기세등등하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창과 칼을 든 흉맹한 모습을 보자, 놀라서 그저 도망칠 뿐이었다. 목적지도 없이 미친 듯이 달렸다. 마치 늑대에 쫓기는 한무리의 양들처럼.
평상시에는 술이나 마시고, 말은 잘 하던 지방관리들은 반군이 곧 도착한다는 말을 듣자, 병력을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놀라서 혼비백산하여,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결국 싸우기도 전에 무너졌다. 병패여산도((兵敗如山倒). 역시 안록산의 '호랑지사(虎狼之師)'였다. 거의 그럴 듯한 저항은 전혀 받지 않았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으며 금방 황하이북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다.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안록산은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신속히 병력을 이끌고 진격하여 십이월 삼일에는 이미 하남도(河南道) 영창군(靈昌郡)(지금의 하남성 활현)의 황하북안에 이른다. 다음 날, 얼어붙은 황하를 건너 하남도 경내로 진입한다. 거의 무인지경이었다.
안록산이 범양(范陽)에서 거병하였다는 소식이 처음 장안에 전해졌을 때, 마침 '주지육림' 속에서 즐겁게 지내며 천하의 형세가 어떤지 모르고 있던 당현종은 이를 철두철미한 '가짜소식'이라고 여긴다. 고인의 '봉화희천자(烽火戱天子)'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유언비어로 처리한다. 심지어 유언비어를 막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아들보다 효성스러웠던 안록산이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 계속 생사를 같이한 친밀한 애인 양귀비와 여전히 홍등주록(紅燈酒綠), 취생몽사(醉生夢死)하고 있었다.
십일월 십오일에 이르러, 안록산이 확실히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대경실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먼저 머리없는 파리처럼 방안을 빙글빙글 돌기만 하다가 그 후에 신하들 중 생각있는 사람들이 건의하고 독촉하자, 비로소 급히 군대를 배치하여 반란을 평정하게 한다.
어쨌든 병이 급하면 아무 의사나 찾기 마련이다. 당현종은 먼저 필사침(畢思琛)을 동도 낙양으로 보내고, 금오장군(金吾將軍) 정천리(程千里)를 하동(河東)으로 보낸다. 각자 병력 수만명을 모집하여 반군에 대항하도록 명한다. 그 후에 다시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 봉상청(封常淸)을 동도 낙양으로 배내어 병마를 모집하여 낙양을 보위하도록 명한다. 긴급하게 장수를 배치한 후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 후에 당현종은 안록산이 경사에 남겨둔 가족들을 처리한다. 원한을 푸는 식으로 안록산의 장남 안경종(安慶宗)을 죽여버리고, 안록찬의 친척인 안사순(安思順)의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직을 박탈한다. 그리고 당현종은 여섯째아들 영왕(榮王) 이완(李琬), 금오장군 고선지(高仙芝)를 정,부원수로 하여 수만의 병마를 이끌고 동관(潼關)을 나가 토벌하게 한다. 그리고 각지에 절도사, 방어사를 신설하고, 황실군대를 재조직하여 반군을 방어하게 한다. 군사적으로 대규모로 인사교체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대당의 명장인 고선지와 봉상청은 모두 피살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역사현장에는 경심동백할 일막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이 두 명의 대당명장은 왜 당현종에 의하여 피살되었을까?
이하에서는 <구당서.봉상청전>을 인용해본다: "십사년, 조정에 들어가다. 십일월, 현종을 화청궁에서 알현하다. 당시 안록산은 이미 반란을 일으켰고, 당현종은 흉악한 오랑캐가 배은망덕하다고 말하여 어떻게 토벌할 것인지를 묻는다. 봉상청은 이렇게 아뢴다: '안록산이 흉도 십만을 이끌고 중원을 침범했숩니다. 태평성세가 오래되다보니 사람들은 전쟁을 모릅니다. 그러나 사유역순(事有逆順)하고 세유기변(勢有奇變)합니다. 신이 청컨대, 동경으로 가서, 창고를 열어서 병사를 모집하고, 말을 골라 강을 건너면 역적의 수급을 베어 대궐아래에 걸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현종은 그의 말이 장하다고 말한다. 다음 날, 봉상청을 범양절도사로 삼고 병력을 모아 토벌하게 한다. 그날 봉상청은 동경으로 가서 병력을 모집한다. 십일만에 육만을 모집하는데, 대부분이 시정의 잡배들이었다. 그리고 하양교를 파괴하여 동경을 고수할 준비를 했다. 십이월, 안록산이 황하를 건너 진류를 함락시키고, 앵자곡으로 진입한다. 흉맹한 기세가 대단했다. 선봉이 규원에 이른다. 봉상청은 기병을 데리고 나가 오랑캐역적들과 사운다. 적 수십백명을 죽인다. 적의 대군이 도착하자 봉상청은 물러나서 상동문으로 들어간다. 다시 전투가 불리하여, 적이 북을 울리며 네 성문으로 진입하여, 사람들과 관리들을 살륙한다. 봉상청은 다시 도정역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한다. 선인문으로 물러났으나 다시 패배한다. 나무를 쓰러뜨려 쳐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곡수에 이르러 서쪽으로 도망쳐 섬군에 이른다. 거기서 고선지를 만난다. 그리고 적의 기세를 말해준다. 적과 맞부딛칠 수는 없겠다고 새각하여 고선지는 동관으로 물러나서 지킨다.
이상의 사료를 보면, 천보십사년(755년), 당시의 형세는 이러하다. 한편으로 흉악무비한 전란이 있고, 한편으로 조정에는 병사도 없고 장수도 없다. 병사들과 장수들은 거의 모두 변방으로 보내어져 변장에서 전공을 세우고 있었다. 막 조정에 들어가서 보고한 보상청은 예전에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맹장이었다. 천자는 즉시 모략이 뛰어난 봉상청을 안록산을 상대한 마지막 지푸라기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급히 봉상청에게 계책을 묻는다.
그리하여 전투를 갈망하던 봉상청은 흥분하여 이렇게 말한다. 비록 안록산의 기세가 대단하고, 우리 군은 오랫동안 전투를 하지 않아서 형세가 아주 불리하지만, 안록산은 반역을 일으켜 인심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사불승정(邪不勝正)이다. 만일 황제께서 나를 믿으신다면 동도로 가서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며 병마를 모집하겠다. 대군이 도착하면 즉시 역적의 수급을 베겠다. 운운.
봉상청의 이 말은 당연히 허풍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인심이 흉흉하던 조정에는 크게 안위하는 작용을 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다니 아무런 근거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봉상청은 지모가 뛰어난 유장(儒將)의 퐁모를 지니고 있다. 그는 당연히 조야을 안정시키고 특히 황제를 고무하여 항전할 의지를 갖게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고의로 과장된 말로 황제에게 듣기좋은 말을 한 것이다. 이는 증세에 맞추어 약을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당시 놀라서 어쩔 줄 모르던 당현종은 전투에 능한 '지다성(智多星)' 봉상청의 말을 듣고 즉시 진정제를 맞은 것처럼 마음을 진정하게 된다. 더 이상 당황해 하지 않는다. 기쁜 나머지 다음 날 바로 봉상청을 범양,평로절도사로 임명하여 안록산이 가졌던 직위를 그에게 준다. 이렇게 하여 초기에 정신없어하던 국면은 끝이 난다. 이후로 비교적 안정되게 병력과 장수를 배치한다. 당나라의 8년에 걸친 안록산의 난 진압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래서 허풍을 떠는 것도 지혜이고 용기이다. 특히 인심을 고무시키는 큰소리는 어떤 때는 허풍이 아니라 자신감이라고 해야 한다. 어떤 효과가 나는지가 중요하다. 이 방면에서 본다면, 봉상청은 카네기식의 격려대가이다.
나중에 혼군 당현종의 일련의 상식에 어긋난 저급한 군사지휘잘못이 없었더라면, 설사 당장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팔년항전' 처럼 그렇게 참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십일월 십칠인, 봉상청은 즉시 위기의 순간에 명을 받는다. 즉시 동도 낙양으로 가서 신군을 모집하여 반군을 방어할 준비를 한다. 봉상청은 급히 낙양으로 달려갔고, 10일만에 신병 6만을 모았다. 그것은 괜찮은 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미중부족(美中不足)인 것은 봉상청이 모은 신병은 모두 군사적인 소양이 있는 병사가 아니라, 시정잡배들이라는 것이다. 아무런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없어, 전투력이랄 것이 없었다. 군인의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합지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어떻게 지휘하여 정예병사인 안록산의 군대를 맞을 것인가는 정말 골치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봉상청은 낙양북쪽 황하의 하양교(지금의 하남성 맹주 서남쪽)를 자르게 한다. 당시 평원태수인 대서예가 안진경(顔眞卿)은 일찌감치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기 전에,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을 알았고, 미리 전투준비를 한다. 대당에는 대단한 인물들이 아주 많았다.
음모나 궤계능력이 기형적으로 발달한 안록산은 당연히 서생분위기가 넘치는 안진경이 이처럼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진정한 인재일 줄 몰랐다. 당연히 그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안록산이 거병한 후, 즉시 공문을 내려 안진경으로 하여금 평원, 박평 2군의 7천명 군사를 이끌고 황하의 나루터를 지키도록 명한다. 안록산은 안진경을 자기 사람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안록산은 사람을 잘못 보았다. 안록산이 거병했다는 말을 듣고, 정충보국의 안진경은 즉시 평원사병 이평을 지름길로 당나라조정에 보내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한다. 당시 금방 부임한 봉상청은 그 편지를 받은 후, 안진경에게 황하나루터를 굳게 지키도록 명한다. 안진경은 서신을 받은 후 각 군에 통지하고, 정식으로 병력을 모아 안록산에 대항한다.
십이월 초육일, 안록산은 반군을 지휘하여 진류(지금의 하남성 개봉성 동남쪽)를 공격한다. 하남절도사 장개연(張介然)은 부임한지 며칠 되지 않은 초짜였다. 그의 수하장병은 모두 전쟁이나 훈련을 경험하지 않고 전투경험이 없는 초짜였다. 반군이 살기등등하게 북을 치고 호각을 불며 몰려오자, 놀라서 어쩔 불 모르며 아빠엄마를 부르며 오줌을 줄줄 싼다. 얼마나 낭패한 모습인가. 전혀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전쟁터를 누빈 안록산의 호랑지사에게 한회합도 싸우기 전에 즉시 와해되고 흩어져 버리게 된다. '초짜' 장개연은 포로로 잡힌 후 살해당한다. 그러나 병사들 근 만명은 투항한다.
자료에 따르면, 안록산이 미친 듯이 하남의 최고지방관리를 상해한 것은 하남도의 길거리에 안록산의 수급에 현삼금을 건 방문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수급에 얼마의 현상금을 거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안록산이 가장 미친 듯이 흥분하게 만든 것은 바로 당현종이 자신의 장남 안경종을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혁명의 댓가는 원래 가족의 생명이다. 그리하여 비통함을 억지로 참으며 안록산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인간성을 잃은 피의 보복을 벌인다. 그래서 초짜 장개연은 목숨을 잃게 된다. 아마도 안록산의 화풀이 대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 후 안록산은 승기를 틈타 형양(滎陽, 지금의 하남성 형양)으로 진격한다. 형양태수 최무파(崔无波)는 성에 올라서 항전한다. 그러나 수비병사들은 안록산부대의 북과 호각소리를 듣자 다시 한번 진류에서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한다. '속속 비처럼 성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적의 포로가 된다' 바람이 불면 버들솜이 날리는 것처럼 신기한 모습이었다.
그후, 기세가 오른 안록산은 부장 무령체(武令砌)를 형양을 지키게 하고 다시 전승사(田承嗣), 안충지(安忠志), 장효충(張孝忠)등의 맹장들이 선봉에 서게 하여 전격전으로 낙양을 공격한다.
당시 반군은 신속히 앵자곡(罌子谷)으로 진격한다. 병력들의 기세는 아주 대단했다. 역사서에는 "흉위전치(凶威轉熾)"라고 했다. 선봉이 규원에 도달한다. 봉상청은 기병을 이끌고 반군과 조우전을 벌이며 수백명을 죽인다. 이는 반군의 예기를 꺽은 것이다. 첫 전투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마치 마카오의 카지노에서 처음 돈을 땄던 사람이 나중에는 팬티까지 벗어서 날리는 것처럼 반군의 주력이 도착하자 오합지졸로 야전군과 대항한 봉상청은 연전연패할 수 빆에 없었다.
봉상청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노장이었고, 당시 사방에 명성을 떨친 장수이며, 지모가 뛰어나고 전투작전경험이 풍부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모두 전투경험이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심지어 훈련된 민병보다도 못했다. 아마도 조준하는 법조차 몰랐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며느리라도 쌀이 없는데 밥을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안록산의 반군은 훈련이 잘 된 정예부대이다.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사람들이다. 역사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안록산의 정예병은 천하에 따를 것이 없었다." 특히 전승사, 안충지가 이끄는 반군 선봉부대는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는 기병이었다. 적진을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간다. 당군이 진열을 갖추기도 전에 일찌감치 반군의 기병에 의해 지리멸렬하게 된다. 무슨 저항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새와 짐승이 흩어지듯이 흩어진다. 엉망진창으로 패전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봉상청은 잔여부대를 수습하여 낙양성을 지키고자 한다. 그러나 반군의 미친 듯안 공격을 버텨내지 못한다. 다시 패배한다. 그 후에 봉상청은 낙양의 상동문에서 반군과 격전을 벌이나 쌍방의 역량이 너무 차이나서 계속 패전한다.
십이월 십이일, '상패장군' 봉상청은 결국 기적을 창조하지 못하고, 만겁불복의 심연에 빠지고 만다. 악몽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반군은 최종적으로 낙양성을 함락시켰다. 반군은 사방의 문으로 쳐들어오고, 북소리와 호각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이는 반군의 대승리이다. 흥분한 안록산은 최고의 상으로 부하들에게 성안에서 살인약탈을 저지를 수 있게 한다. 금은보화와 미녀들은 모조리 반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십년간 고심하여 준비했던 것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장안만 남았다.
봉상청의 최후는 결국 패전과 패전으로 얼룩진다. 영웅의 말로는 이렇게 비참하다. '체조왕자' 리닝이 서울올림픽에서 안마에서 떨어지는 낭패한 모습과 같다고나 할까. '화무십일홍'이다. 계속 패배를 거듭한 봉상청의 잔여부대는 반군과 도정역에서 싸우지만, 다시 패배한다. 선양문으로 가지만 다시 패배한다. 할 수 없이 금원의 서뽁 벽을 허물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전략적 후퇴이다.
어쨌든 일방적으로 패배를 거듭한 당군은 결국 패전하면서 도주하는 수밖에 없었고, 반격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반군의 신속한 추격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없이 도중에 소극적으로 나무를 잘라서 길을 막는 정도의 조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반군의 진로를 막는 것이다. 그 후에 골짜기와 물을 건너 서쪽으로 섬군(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 서쪽)까지 간다. 거기서 이전의 상사인 고선지를 만난다. 고선지는 평반부원수의 직위로 섬군에 와 있었다. "고향사람이 고향사람을 만나니 두 눈에는 눈물이 흘러넘쳤다(老鄕見老鄕, 兩眼漏汪汪)" 두 사람은 아주 실질적인 장수들이다.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데, 봉상청은 적군의 실제 상황을 얘기하며 적군이 강하고 아군은 약한 형세를 감안하여 안록산과 직접 부딛치는 것은 어렵겠다고 얘기한다. 그리하여 일대의 명장 고선지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동관으로 물러나서 지키기로 한다. 안록산과 지구전을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이 전투를 거치면서, 이전에 조정에 충성심이 대단해서 말을 바친다는 명목으로 다가가서 돌연 안록산의 부대를 기습하기도 했던 하남윤(河南尹) 달해순(達奚珣)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안록산에 투항한다. 그러나 안록산은 예전에 자신에게 음모를 꾸몄던 그에게 보복하지 않고, 그를 좌상(左相)으로 기용한다. '인재를 아끼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결국 달해순은 당나라조정에 의하여 참수되고 만다.
당연히 순국한 대명의 명사들도 많다. 유수 이등(李橙), 어사중승 노혁(盧奕), 채방사 판관 장청(蔣淸)은 모두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아서 피살당한다.
기실 봉상청이 낙양으로 가서 신병을 모집한 후, 당현종은 즉시 삭방, 하서, 농우등 절도사의 대부분 병력을 불러모은다. 장안조차 위기일발인데 어디 아랍제국과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다툴 여유가 있겠는가. 황제의 용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인 것이다.
나라가 어려우면 뛰어난 장수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탈라스전투에서 패배한 후 당시 우금오대장군을 맡고 있던 고선지가 당현종에 의해 평반부원수에 임명된다. 장안에서 병력을 모집하는 외에, 장안의 병력과 비기, 확기등 부대를 모아서 약 5만명을 고선지에게 주어 반군을 막도록 한다(기실 당시 고선지 수하의 병사들 수준도 봉상청의 수하들보다 그다지 나을 것도 없었다. 역시 전투경험이 없는 시정자제들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황제는 자신이 총애하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본 '도미노효과' 때문인지, 고선지에 대하여도 그다지 안심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환관 변령성(邊令誠)을 감군(監軍, 이는 당나라때 환관감군의 시초이다. 이후 환관이 군대지휘권을 장악하는데 양호한 기반이 된다)으로 하여 섬군에 주둔하게 한다.
봉상청이 반군에게 형편없이 패배하여 섬군으로 도망쳐 왔을 때, 목숨을 아까워한 섬군태수 두정지(竇廷芝)는 일찌감치 성을 버리고 하동으로 도망갔다. 성안의 백성들도 모두 사방으로 도망쳐서 거의 빈 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봉상청은 섬군을 지키고 있던 고선지에게 말한다. "저는 매일 혈전을 벌였는데 적의 기세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관에 병력이 없는데 만일 적병이 우회로 기습하여 동관으로 들어가면, 장안이 위급합니다. 섬군은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병력을 이끌고 동관으로 물러나서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들 둘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봉상청이 적군의 상황을 과장할 리는 없다. 그리하여 고선지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동관으로 물러나 지킨다.
고선지는 동관으로 물러난 후, 안록산의 아끼는 부장 최건우(崔乾佑)가 반군을 이끌고 즉시 도착한다. 위험했다. 하마터면 동관을 빼앗길 뻔했다. 다행히 당군은 이미 방어전을 준비완료해놓았다. 반군은 일시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전혀 우세를 점하지 못한다. 할 수 없이 섬군으로 물러난다. 봉상청은 과연 지모가 많았다. 그후 감여, 홍농, 제음, 복양, 운중 등의 군이 모두 안록산에 함락된다.
이때 당현종이 불러모은 삭방, 하서, 농우등의 변방정규군은 아직 오는 중이었다. 장안에 도착하지 못했다. 관중은 일대혼란에 빠진다. 다행히 '소부즉안(小富卽安)'의 안록산은 혁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벌써 천자의 꿈을 꾸고 있었다. 동도 낙양을 함락시킨 후 즉시 황제에 오른다. 그리하여 당군을 공격하는 속도를 늦추게 된다. 역시 큰 뜻이 없는 오랑캐이다. 여기에 군사천재 고선지, 봉상청이 적시에 동관으로 물러나 장안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바람에 결국 반군의 날카로운 예봉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숨을 쉬며 정비할 시간여유를 얻게 된다. 전쟁초기 연전연패의 국면을 타파할 수 있었고, 관중군민의 혼란도 어느 정도 수습될 수 있었다.
만일 고선지와 봉상청등 군사달인의 뛰어난 지휘술로 차근차근 반란평정작업을 벌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당군의 약세는 전환되었을 것이다. 설사 전략적인 반격을 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전쟁의 교착상태는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안록산이 편안하게 장안까지 진입하도록 놔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 원군이 도착하면, 전략적인 대반격을 진행할 수 있었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당초 충동적으로 병력을 이끌고 안록산을 친정하겠다고 하던 당현종이 결국은 어찌 된 것인지 흐리멍텅하게 환관 변영령의 보고를 받고. 충동적으로 고선지와 봉상청 두 장수를 죽여버린 것이다. 이는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린 것이니' 오호애재라.
그때, 당현종은 봉상청이 패배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한 나머지 즉시 그의 모든 직위를 박탈한다. 그로 하여금 백의의 몸으로 고선지의 군에서 일하게 한다. 대죄입공(戴罪立功)하라는 것이다. 고선지는 당연히 봉상청이 재주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사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다. 그리하여 봉상청을 순감좌우상제군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오른팔로 삼고 계속 중용한다. 효과적으로 동관을 지키는 것이 장안의 형세를 안정시키는 일이다.
아쉽게도 버마제비가 매미를 잡는데, 참새가 뒤에 있다. 역시 황제의 곁에 있는 인물이 일을 망치는 법이다.
고선지가 군대를 이끌고 동정할 때, 환관감군 변영성은 일찌기 고선지에게 몇 가지 일을 건의했는데, 심지어 공개적으로 뇌물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모가 뛰어난 고선지는 당연히 마음 속으로 생각이 있었고, 변령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쟁의 형세는 순식간에 만변하므로 조금만 잘못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하물며 당군은 그 때 상황이 낙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변영성을 투명인간으로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너 같은 환관이 뭘 알겠는가 그냥 구석에 물러나 있어라! 그러다보니 변영성은 분노하고 원한을 품는다. 계속 꺼리를 잡아서 고선지를 고발해서 분을 풀 생각만 했다.
고선지가 봉상청의 건의를 받아들여 섬군에서 동관으로 물러난 후, 변영성은 이것이 전쟁의 필요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즉시 고선지를 사지로 몰아넣을 구실을 찾아낸다. 조정에 글을 올릴 때, 당연종에게 고선지, 봉상청이 스스로 섬군을 버리고 물러난 일에 대하여 "봉상청이 적군의 상황을 과장되게 부풀리고, 고선지는 섬지 수백리를 버리고 군량을 도둑질했다"고 한다. 당시는 이미 안록산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당현종이 깊이 조사하지도 않고 변영성의 말만 듣고 고선지가 땅 수백리를 포기한 것은 별 일이 아니지만, 병사들에게 내려야할 군량미를 착복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즉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선지와 봉상청을 참입결(斬立決)하도록 명한다. 재판도 없이.
그후의 일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고선지와 봉상청이 죽은 후, 대당의 또 다른 명장 가서한(哥舒翰)이 당현종에 의해 전면에 나선다. 그때는 당현종에게 쓸만한 용장이 거의 없었다. 안록산을 막아낼 수 있었던 고선지와 봉상청을 누가 그렇게 충동적으로 죽이라고 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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