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46

구자탈적(九子奪嫡)때, 혜비(惠妃)는 왜 친아들인 황장자(皇長子)가 아닌 황팔자(皇八子)를 지지했을까?

글: 취간역사(趣看歷史) 황장자 윤제(胤禔)는 그의 부친 강희제가 말한 것처럼 어리석은 인물(蠢材)이었다. 발전가능성이 없는 멍청한 자. 그래서 생모인 헤비도 구자탈적중 할 수 없이 자신이 기른 황팔자 윤사(胤禩)를 지지한 것이다. 황장자 윤제는 구자탈적중 유일하게 옹정제나 건륭제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황자이다. 윤제는 생모인 혜비도 좋아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황실내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윤제는 '구자탈적'중 사후에 유일하게 황제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황자이다. 강희제때 '구자탈적'에 참여한 9명의 황자는 각각 황장자 윤제, 황이자(皇二子)인 폐태자(廢太子) 윤잉(胤礽),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 즉 나중의 옹정제(雍正帝)이고, 황팔자 윤사, 황구자..

자금성(紫金城)의 신수(神獸)

작자: 미상 모든 동물이 자금성 안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궁건축의 서로 다른 위치에는 상서로운 신수들을 놓아두었는데, 진택화살(鎭宅化煞), 구사영샹(驅邪迎祥)을 표시한다. 그리고 수백년동안 같은 자세로 있으면서 집요하게 금구영구(金甌永固), 복수영년(福壽迎年)을 나타낸다. 태화전(太和殿) 앞의 동사(銅獅) 청동으로 만들었고, 아주 정교하다. 아름다운 하얀 대리석 위에 놓여 있다. 정전(正殿)을 지키는 의미를 가진다. 오른쪽의 숫사자는 수구(繡球)를 오른발아래 밟고 있는데, 이는 천하를 통일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왼쪽의 암사자는 왼발의 앞에 어린새끼를 데리고 놀고 있는데, 그 뜻은 자손이 창성하라는 것이다. 태화전 앞의 선학(仙鶴)과 동귀(銅龜) 단지(丹墀) 위에 운학(雲鶴)이 서 ..

자금성과 천안문은 누가 건설하였는가?

글: 동몽지(董夢知) 금년은 자금성 탄생 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금벽휘황한 궁전군은 당금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되며, 보존이 가장 완벽한 궁전이다. 자금성의 앞에는 화려하고 장엄한 천안문이 있다. 이는 황성의 정문이고, 국가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자금성, 천안문은 누가 지었지?" 북경토박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명나라때의 괴상(蒯祥)이다!' 맞다 바로 괴상이다. 만일 괴상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괴상이 자금성을 건축한 것에 관한 자료는 북경의 여러 사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지 내용이 많지 않고 간략히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자료들 중에서 적지 않은 것은 서로 모순되거나 잘못 기록된 것이 있어, 이해하는게..

청군(淸軍)은 팔국연합군에게 왜 힘없이 패배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1900년, 중국역사상의 대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8국연합군이 극히 단기간내에 청나라의 수도 북경으로 쳐들어온다. 청나라정부는 결국 팔국연합군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에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를 ..

서태후의 3명의 보디가드(保鏢) : 한명한명이 곽원갑보다 강했다.

글: 소철(小哲) 서태후는 죽기를 겁냈던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을 아주 중시한다. 출행때는 항상 많은 수행원들이 따라다녔고, 그 중에는 무공이 고강한 보디가드가 있었다. 오늘은 서태후이 삼대보표에 대하여 얘기해 보기로 한다. 1. 궁보전(宮寶田) 무협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광서제의 비극: 동년, 사업 그리고 애정

글: 풍현일(馮玄一) 광서제는 청나라의 제11대황제이다. 그의 이름은 애신각라 재첨(載㵇)인데, '첨'자는 물리 조용히 흐르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의 성격과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화상(畵像)을 보면, 그는 문약하고 청수(淸秀)한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준수한 얼굴 ..

서태후 휘하의 9명 대태감(大太監)의 사진

글: 재설역사(再說歷史) 내전총관태감(內殿總管太監) 연수(延壽). 대성현(大城縣) 사람. 당시 나이 48세. 청나라말기, 자금성내의 태감은 이미 대폭 감원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798년에는 2,675명이 있었는데, 1842년에는 2,216명, 1874년에는 1,596명, 1887년에는 1,693명이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새금화(賽金花)의 임종전 매체인터뷰

글: 반경적(潘京的) 1936년 12월 4일, 새금화가 병사한다. 그녀가 죽기 전에 만주족 언론인인 안의민(顔儀民)은 북평아동신문사(北平亞東新聞社) 사장의 신분으로 그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 인터뷰는 경자지변(庚子之變)과 관련한 항간의 그녀에 관한 모든 소문을 다루었다.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