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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표74

중국은 왜 항상 "국내외적대세력"을 들고나올까? 글: 왕우군(王友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수십번에 걸쳐 피비린내나는 정치운동을 발동시켰다. 매번 정치운동때마다 중공에 숙청당한 대상은 모두 중공에 의해 "국내외적대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칭해졌다. 즉,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 혹은 "국내외적대세력의 당내대리인"이라고 규정되었다. 고요(高饒)는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으로 규정되다. 1954-1955년 중공은 당정후 첫번째 반당집단을 규정했다. "고강(高崗),요수석(饒漱石)반당연맹"이다. 고강은 당시 중공정치국위원, 중앙정부부주석, 중앙군위부주석, 국가계위주석이었고, 요수석은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었다. 고요는 중공에 의해 모택동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중앙영도핵심을 '전복하기를 기도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영도권을 찬탈하고자' 했다고.. 2022. 12. 11.
임표(林彪)와 등소평(鄧小平)의 은원(恩怨) 글: 조대부(趙大夫) 임표, 등소평은 모택동의 득의문생(得意門生)으로 일찌기 모두 모택동의 후계자 반열에 올랐다. 한명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이름을 넣었던 모택동의 후계자이고, 다른 한명은 모택동의 사후 사실상의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그렇다면, 등소평과 임표는 도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미묘했다. 제1대영도집단의 핵심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심리도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상하급관계였기도 했고, 일찌기 밀접한 협력관계이기도 했고, 또한 심각한 대립관계이기도 했다. 등소평과 임표는 일생동안 교류가 거의 없었다.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등소평의 딸 모모(毛毛)가 등소평을 회고하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등소평과 임표는 개인적인.. 2022. 11. 24.
임표(林彪)는 왜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했을까? 글: 봉황역사(鳳凰歷史) 중공 고위층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할 때, 모택동(毛澤東)과 임표(林彪)는 견해가 달랐다. 당시,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국전쟁체 참가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임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참전하지 않았고, 나중에 팽덕회(彭德懷)가 총사령관을 맡아서 참전한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특히 "9.13"사건이후, 대다수의 견해는 이러했다: "임표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소극적이었고,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택동은 동북지방이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고, 또한 동북지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고려하여 당중앙에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모택동의 .. 2022. 10. 26.
"주덕(朱德)의 편담(扁擔, 멜대)"과 "임표(林彪)의 편담" 글: 임휘(林輝) 1950년대초, 토비(土匪)출신의 중공 전 군사지도자 주덕의 간고(艱苦)하고, 소박한 정신을 칭송하는 글인 이 소학교 교재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글은 조작혐의가 있어 작년에 교과서에서 삭제된다.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 조작혐의가 있는 글이 1967년 2월 정치적 원인으로 주인공을 "임표"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년 후 임표사건이 발생하고나서, 주인공은 다시 원래대로 주덕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주석의 편담"도 날조된 것이 아닌가? 먼저 이 정치적 풍운변화에 흔들린 글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대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1928년 주덕과 모택동은 폭동에 실패하여 도망쳐서 정강산에서 만난 후, 먹을 것이 부족하여, 사람을 5.. 2022. 9. 5.
임표가 정강산에서 발탁, 중용된 경위는? 글: 옥미수(玉米穗) 임표는 주덕이 부대를 이끌고 정강산에 올라 모택동과 합칠 때, 제28단 1영 3연의 연장(連長)이었다. 28단은 주덕의 주력단이고, 단장은 왕이탁(王爾琢)이다. 1영(營)의 영장은 주자곤(朱子昆, 그는 나중에 환남사변(皖南事變)때 항영(項英)과 함께 피살된다)이고, 2영의 영장은 원숭전(袁崇全)이었다. 2영 영장인 원숭전은 나중에 홍군을 떠나 국민당군에 투항하려 했다. 단장 왕이탁이 그를 뒤쫓아갔다가 원숭전의 총에 죽고 만다. 28단은 하루아침에 단장과 2영의 영장을 잃었다. 임표는 이런 상황하에서 연장에서 먼저 영장으로 승진하고, 다시 얼마 후 단장까지 오른다. 이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공초(龔楚)의 회고에 따르면 구체적인 경위는 개략 다음과 같다: 1928년 7월, 먼저.. 2022. 7. 28.
정강산시기 주모(朱毛) 충돌: 임표(모택동지지) vs 진의(주덕지지) 글: 옥미수(玉米穗) 1928년 연말, 국민당군은 정강산에 대한 제3차 포위소탕작전을 벌인다. 정강산에서는 당정군긴급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한다. 회의에 출석한 사람은 모택동(毛澤東), 주덕(朱德), 진의(陳毅), 홍오군(紅五軍)의 팽덕회(彭德懷), 등대원(滕代遠), 상감변구특위서기(湘贛邊區特委書記) 담진림(譚震林)등이었다. 주덕이 의견을 내놓는다: 정강산은 우리가 1년간 건설한 혁명근거지이다. 쉽게 버릴 수 없다. 다만 만일 모든 홍군이 이 산을 지킨다면 양식이 부족하여 오래 버틸 수 없고, 고사당하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홍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홍4군 31단과 홍5군은 모택동, 팽덕회 두 동지가 지휘하여 정강산을 고수하고, 나(주덕)는 홍4군 28단, 29단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동으로 가.. 2022.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