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옥미수(玉米穗)
임표는 주덕이 부대를 이끌고 정강산에 올라 모택동과 합칠 때, 제28단 1영 3연의 연장(連長)이었다. 28단은 주덕의 주력단이고, 단장은 왕이탁(王爾琢)이다. 1영(營)의 영장은 주자곤(朱子昆, 그는 나중에 환남사변(皖南事變)때 항영(項英)과 함께 피살된다)이고, 2영의 영장은 원숭전(袁崇全)이었다.
2영 영장인 원숭전은 나중에 홍군을 떠나 국민당군에 투항하려 했다. 단장 왕이탁이 그를 뒤쫓아갔다가 원숭전의 총에 죽고 만다. 28단은 하루아침에 단장과 2영의 영장을 잃었다. 임표는 이런 상황하에서 연장에서 먼저 영장으로 승진하고, 다시 얼마 후 단장까지 오른다. 이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공초(龔楚)의 회고에 따르면 구체적인 경위는 개략 다음과 같다:
1928년 7월, 먼저 주덕이 28단, 29단을 이끌고 정강산을 떠나 상남(호남남부) 각지를 전전한다. 당시 국민당군은 정강산에 대하여 제2차 포위소탕작전을 전개하고 있어, 상황이 위급했다. 모택동은 31단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여 산을 내려와 주덕의 부대를 구원하러 간다. 계동에서 주덕의 부대와 다시 회합한다. 그리고 어떻게 군대를 돌려 정강산의 포위망을 풀지를 논의한다. 8월하순, 부대가 상유(上猶)에 이르렀을 때, 28단 제2영 영장 원숭전의 반변(叛變)사건이 발생한다.
원숭전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28단 단장 왕이탁과는 동기동창이며, 같은 고향사람이다. 그는 왕이탁과 함께 주덕, 진의를 따라 상남각지를 전전한 후 정강산에 올랐다. 평소에는 말이 없었으나, 전투에는 용감했고, 연장, 영장을 맡았으며 주덕, 왕이탁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주덕, 왕이탁등은 매번 간부들을 언급할 때마다 그를 수양이 있는 군사간부라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원숭전은 주덕이 부대를 이끌고 침주(郴州)를 공격한 것이 실패하고, 또한 국민당이 정강산을 포위소탕한다는 말을 듣자, 기관총연(連)과 1개의 보병연(連)을 임의로 이끌고 상유현성으로 출발한다. 국민당군에 투항하려는 생각이었다. 2영의 부관은 부대가 상급부대의 지시없이 출발한 것을 보고 일이 이상하다고 여겨 28단사령부에 보고한다. 왕이탁은 보고를 받은 후, 사정이 긴급하다고 여겼으며, 자신이 원숭전과는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혼자서 쫓아간다. 부대를 따라잡은 후 부대에 전진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린다. 두 명의 연장(連長)은 전진을 멈추었다. 원숭전은 4명의 전령을 데리고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왕이탁은 큰 소리로 멈추라고 하면서 계속 쫓아갔다. 원숭전은 마우저19 권총을 들고 길가에 섰다. 왕이탁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 그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후 원숭전은 4명의 전령을 데리고 급히 도망친다.
주덕은 보고를 받고, 진의와 함께 현장에 달려간다. 왕이탁의 숨이 이미 멎은 것을 보고 방성대곡한다. 진의는 두 명의 연장(원숭전이 데리고 가려했던 두 면장)에게 부대를 이끌고 원래의 주둔지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고, 자신은 주덕을 부축하여 사령부로 돌아와 왕이탁의 장례를 치른다. 그날 저녁, 공초등 수장을 소집하여 사후처리에 관하여 논의한다.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28단의 단장과 2영의 영장을 임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지휘관이 없어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주덕은 이렇게 말한다: 제2영의 4명의 연장은 모두 제1영 제3연장 임표만 못하다. 이건 모두 공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제1영에서 임표를 빼내어 제2영 영장으로삼으면 제2영의 여러 연장들이 불만을 가질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 마음이 복잡하니 여러분들이 의견을 내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공초, 진의는 모두 임표가 용감하고 전투를 잘한다고 여겼고, 당에 충성하니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여겼다. 최종적으로 진의가 건의한다. 제1영 영장 주자곤을 제2영 영장으로 옮겨서 2영을 지휘하게 하고, 임표를 제1영 영장으로 승진시켜서 주자곤의 원래 직위를 맡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제28단 단장의 직위가 비는데 경력으로 보면 마땅히 주자곤이 맡아야 하는데, 주덕은 주자곤이 몸이 약하고, 결기가 부족하다고 보아 잠시 자신이 겸직하기로 한다. 이렇게 하여 왕이탁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원숭전의 반변탈영으로 인한 28단 단장과 제2영의 영장의 공석문제는그날 저녁에 바로 해결된다. 다음 날, 인사이동명령이 공표되자, 전체 단의 사람들이 모두 만족한다. 왕이탁의 죽음과 원숭전의 탈영으로 인한 사기하락문제는 신속히 회복될 수 있었다.
공초는 주자곤과 사적으로 교분이 있었다. 인사이동명령이 발표된 후, 공초는 주자곤의 영사령부를 방문한다. 새로운 인사이동에 대하여 얘기를 꺼내자, 주자곤은 이번 인사는 아주 합당하다고 얘기한다. 임표는 젊지만 능력이 있고, 책임질 수 있을 것이며, 결심도 있고, 전도가 무량하다고 말한다.
군사령부는 인사처리상황을 모택동에게 통지한다. 모택동은 왕이탁의 죽음을 애통해 했고, 원숭전의 반변을 통한했다. 그리고 28단당의 조직영도가 너무 약하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이후 강화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보았다. 임표가 영장으로 승진하자 모택동의 주목을 끌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모택동은 홍군에서 당의 영도를 강화하고, 홍군의 기율을 건립해야하겠다는 결심을 갖게 된다. 홍군의 "3대기율, 8항주의"는 바로 얼마후에 모택동이 제기한 것이다.
1928년 12월, 국민당군이 동서 양쪽에서 영신, 영현(酃縣)으로 진격한다. 정강산에 대한 제3차포위소탕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모택동과 주덕은 당정군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한다. 회의에서 주덕과 모택동이 홍4군주력을 이끌고 감남(강서남부)로 포위만을 돌파하여 민감변구에서 유격전을 펼치기로 결정한다. 막 정강산에 오른 팽덕회는 홍5군(7,8백명)과 원문재, 왕좌의 부대가 정강산을 지키기로 한다.
회의후 그날 저녁, 모택동은 주덕에 이렇게 건의한다: 첫째, 29단은 상남에서 8월의 실패후 주력 영(營)을 잃었고, 그후 여러번의 전투에서 손실이 아주 컸다. 지금 병력이 부족하니, 1개 영으로 축소재편하는 것이 작전지휘에 유리하지 않겠는가. 둘째, 31단의 당대표 하정영(何挺潁)을 28단 당대표로 부임시키고, 29단의 정치간부를 28단으로 보내어 일하게 하여 당(기실 모택동 본인)의 28단에 대한 정치영도를 강화하자고 한다. 주덕은 동의했고, 즉시 재편과 조정이 이루어진다.
모택동과 주덕은 홍4군을 이끌고 1829년 1월초,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대분(大汾)방향으로 진격한다. 부대인원은 3,500여명이었다. 나중에 대유(大庾)현성밖에서 국민당군과 격전이 벌어지고, 300여명이 전사한다. 신임 28단 당대표 하정영도 중상을 입고 3일후 사망한다. 하정영은 추수폭동에 참가한 후 모택동을 따라 정강산에 오른 인물이다.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능력이 있어, 모택동의 신임을 깊이 받았었다. 그의 죽음에 모택동은 극히 애통해 했다.
정강산에서 포위망을 뚫고 동으로 진격한 후, 모택동의 홍4군을 장악하려는 마음이 더욱 절박해진다. 28단은 주덕이 데리고 정강산에 오른 적계(嫡係)이고, 홍4군중에서 전투력이 가장 강한 주력이다. 단장인 왕이탁이 죽은 후, 단장 직위는 당시에 여전히 주덕이 겸임하고 있었고, 아래의 영장들 중에서 오직 임표만이 모택동과 관계가 비교적 좋았다. 나머지 몇몇 영장들은 모두 주덕의 옹호자였고, 주덕의 말만 들었다. 정강산에서 포위망돌파를 준비할 때, 모택동은 31단의 하정영을 28단 당대표로 부임시킬 것을 건의했는데, 그 목적은 바로 이 주력 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다만 하정영 한 사람만 가지고는 고장난명(孤掌難鳴)고, 통제력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임표를 28단 단장으로 승진시키고 싶어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28단내에서의 장악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홍군이 대유현성을 점령할 때(그후 며칠 지나지 않아 하정영은 부상으로 사망한다), 모택동은 주덕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현재 군사행동이 긴박한 시기이니 주덕은 정력을 집중하여 전체 홍4군을 지휘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28단의 단장까지 맡아서 정력을 분산시키면 안된다. 28단 단장의 직위는 현임 영장중에서 한 젊고 능력있는 사람을 발탁하여 맡겨, 일부 업무를 분담하게 하자. 주덕은 이렇게 대답한다: 현재 병력이 많지 않으니 최대한 그가 겸임하고, 지금은 작전중이나 인사를 바꾸어서 군심이 흐트러지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현재 3명의 영장중에서 경력으로 보면 주자곤이 가장 적합한데, 아쉽게도 그는 건강이 좋지 않다. 임표는 용감하지만 아직 경험이 조금 부족하고, 경력도 얕다. 그래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수 있다. 그래서 잠시 현상유지를 하는 것이 좋겠다. 모택동도 억지로 밀어부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잠시 포기한다. 다만 그는 그후 임표를 만나 자신의 생각을얘기하고, 그와 주덕의 대화를 임표에게 얘기한다. 임표는 당시 겨우 스물이 넘었었다. 혈기방장하고, 스스로 비범하다고 여겼다. 모택동의 말을 듣고는 모택동이 자신을 인정해준다는데 감격한다. 그리고 주덕에 대하여 불만이 생기게 되어 마음 속으로 꽁하니 품고 있었다. 그후 임표는 주덕과 모택동 사이에서 확실한 '옹모반주'파에 속하게 된다.
홍4군이 대유현성을 점령한 후, 국민당군의 반격에 홍4군은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했다. 하정영이 부상으로 죽는 바람에, 당시 엄호퇴각은 임표가 지휘한다. 그후 월감(광동,강서)변구로 도망치는 와중에 국민당군에 의해 계속 추격당하여 처지가 아주 곤란해진다. 임표는 여러 전투를 지휘했고, 마침내 국민당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부대가 숨쉴 기회를 갖게 된다. 그때 주덕, 모택동과 진의등은 다시 회의를 개최하여 부대정리문제를 논의한다.
모택동은 2개의 방안을 내놓는다. 제1방안: 28단(1개영이 부족했음)을 제1종대(縱隊)로 개편하고 임표를 종대장으로 삼는다. 29단을 개편하여 만든 28단 제2영과 단사령부 직속의 독립영, 특무영을 합쳐서 제2종대로 하고, 주덕 혹은 호소해(胡少海)가 종대장이 된다. 31단은 제3종대로 개편하여 이 단의 단장(원래의 단장은 장자청(張子淸)이었는데, 장자청이 나중에 부상을 입어 다른 사람이 맡았는데, 구체적인 이름을 확인하지 못했다)이 종대장을 맡는다. 제2방안: 임표를 28단 단장으로 삼아 확실하게 부대를 장악하게 한다. 모택동은 나아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혁명대오이고, 간부를 임용하는 원칙은 능력과 당에 대한 충성여부만 보아야 하고, 군벌군대같이 경력이나 인사배경을 따져서는 안된다. 여러분들(주덕, 진의등)은인사배치에 대하여 반드시 구관념을 버리고, 혁명의 신관념, 신작풍을 수립해야 비로소 당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주덕은 3개종대로 개편하는 방안은 원래 괜찮기는 한데, 서둘러 개편을 하게 되면 군심이 동요될 수 있으니, 제2방안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한다. 임표가 28단 단장으로 승진한 것은 개략 1929년 2월이다. 이렇게 하여 임표는 1928년 5월 정강산에 오를 때 연장이었는데, 같은 해 8월에 왕이탁이 죽고 원숭전이 반변하면서 1영 영장으로 승진하고, 다시 1929년 2월에 28단 단장으로 승진한다. 1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수직상승하여, 홍4군내에서 가장 두드러진 청년지휘관이 된다. 당히 나이 겨우 21살가량이었다. 그후 1년(1930년), 임표는 홍4군 군장으로 승진하고, 다시 2년후(1932년), 홍1군단 군단장이 된다. 당시 나이 겨우 25세였다. 임표의 홍1군단과 팽덕회의 홍3군단은 당시 주모의 홍1방면군(즉 중앙홍군)중 가장 강한 전투력을 지닌 주력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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