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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林彪)는 왜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했을까?

by 중은우시 2022. 10. 26.

글: 봉황역사(鳳凰歷史)

 

중공 고위층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할 때, 모택동(毛澤東)과 임표(林彪)는 견해가 달랐다. 당시,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국전쟁체 참가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임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참전하지 않았고, 나중에 팽덕회(彭德懷)가 총사령관을 맡아서 참전한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특히 "9.13"사건이후, 대다수의 견해는 이러했다: "임표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소극적이었고,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택동은 동북지방이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고, 또한 동북지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고려하여 당중앙에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모택동의 의견에 대하여, 중공지도자들은 모두 찬성했다. 금방, 중공중앙은 결정을 내린다: "제13병단으로 동북변방군을 조직한다. 변방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전략적 조치로서."

 

1950년 7월 7일 오후, 주은래(周恩來)가 중남해 거인당(居仁堂)에서 보위국방문제회의를 소집하여, 모택동의 동북변방군 성립에 관한 결정을 전달하고, 동북변방을 보위하는 문제에 대하여 토론한다. 회의에 참가한 사람은 중국해방군총사령관 주덕(朱德), 대리총참모장 섭영진(聶榮臻), 제4야전군사령관 임표와 부정치위원 담정(譚政), 총정치부주임 나영환(羅榮桓)과 부주임 소화(蕭華), 총정보부 부장 이극농(李克農), 총후근부 부장 양립삼(楊立三), 작전부 부장 이도(李濤), 모터장갑병사령관 허광달(許光達), 해군사령관 소경광(蕭勁光), 공군사령관 유아루(劉亞樓), 군사위원회 철도부 부장 등대원(滕代遠), 포병 부사령관 소진(蘇進)등이었다.

 

이번 회의에 참가한 명단을 살펴보면, 참석자들은 주로 중앙군사위원회 3총부(三總部), 육해공 삼군(三軍) 및 관련 병종의 책임자들이다. 야전군지휘관으로서 참가한 사람은 오직 임표와 담정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의에서는 동북변방군의 관할부대, 인원수, 지휘기구설립과 지휘관인선배치, 정치동원과 후근(군수)보장, 차량운영계획과 병력보충등 문제를 논의했다. 임표는 적극적으로 동북변방군의 창설을 지지했다. 회의에서, 그는 중국동북지구의 전략적 지위, 중국의 극동지역에서의 전략적 목표, 한중관계등의 방면에서 동북변방군을 설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동시에 그는 동북변방군의 설립과 관련된 원칙을 얘기했다. 이들 원칙은 바로 제13병단을 골간으로 해서, 동북변방군을 조직한다는 것이다. 이후, 동북변방군은 중공의 중요한 군사역량으로 동북지구에 배치되며, 대내적으로 중국의 동북지방을 보위하고, 대외적으로 전략위협역량으로서 국제정치무대에서 역할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7월 10일, 주은래는 제2차 보위국방문제회의를 소집한다. 임표는 다시 한번 동북변방군의 창건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의 발언요지는 이러했다: 제4야전군은 이 문제에 기꺼이 최대한 협력하겠다. 사람을 얼마 내놓으라면 얼마 내놓을 것이고, 장비를 얼마 내놓으라면 얼마 내놓을 것이다. 회의에서 토론을 거쳐, 각각 하남, 광동, 광서, 호남, 흑룡강등지에서 제13병단의 제38군, 39군, 40군 및 42군, 포병제1사단, 제2사단, 제8사단, 및 1개의 고사포단, 1개의 공병단에 모두 255,000여명을 차출하여 동북변방군을 창건한다. 이들 부대의 대다수는 임표가 이끌던 제4야전군에서 왔다. 임표는 예전부터 속유(粟裕)를 높이 평가했다. 속유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서 그는 직접 속유를 한국전쟁참여시 선발부대의 사령관으로 지명하여, 동북지구로 가서 군대를 이끌게 했다. 그러나 당장 속유를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직위로 임명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회의에서는 먼저 속유를 동북변방군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소경광을 부사령관, 소화를 부정치위원, 이취규(李聚奎)를 후근(군수)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제15병단사령부로 병단부를 구성하여, 제38군, 제39군, 제40군, 포병, 장갑병, 공병 및 고사포부대를 관할한다. 회의에서는 집중지휘를 위하여, 제4야전군특별사령부를 성립하기로 결정한다. 위의 부대는 통일적으로 제4야전군특별사령부의 지휘를 받는다. 공군 방면에서는 동북공군사령부를 성립하며, 통일적으로 제4야전군특별사령부가 지휘한다. 이 일련의 결정에 대하여 회의후 주은래가 일부 수정한 후, 13일 모택동의 비준을 받는다.

 

이상의 결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임표는 동북을 보위하는 문제를 아주 중시했다. 동북변방군의 설립을 적극 지지했고, 한국전쟁에 출병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중공 고위층은 처음에 확실히 필요할 때 속유로 하여금 중공군대를 이끌고 먼저 한반도로 진입하는 것에 동의했다.

 

다만 아쉽게도 속유는 몸이 좋지 않아서, 한반도로 들어가 전투를 지휘할 수가 없었다. 최근에 출판된 <속유연보>를 보면, 중공이 동북변방군의 창설을 결정할 때, 속유는 청도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따. 중앙의 임명소식을 들은 후, 그는 서둘러 나서경(羅瑞卿)을 통해 모택동에서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신체상황을 설명한다. 모택동은 그의 서신을 받은 후 8월 8일 답신을 보낸다. 답신에서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나서경 동지가 가져온 편지를 받아보았다. 병세가 중하다니 심히 걱정된다. 현재 새로운 임무는 그다지 절박하지 않으니, 너는 안심하고 다 나을 때까지 휴양해라. 휴양장소는 청도가 적절하면 청도로 하고, 청도가 부적절하면 북경으로 와도 된다. 알아서 정하도록 해라." 이전에 주은래와 섭영진은 속유가 현재 병치료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소경광, 소화도 일시에 동북으로 가서 동북변방군에 부임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연명으로 모택동에게 보고하여 건의한다: 동북변방군을 먼저 동북군구 고강(高崗) 사령관 겸 정치위원의 지휘를 받도록 하자. 속유, 소경광, 소화가 부임한 후 다시 동북변방군사령부를 성립시키자. 모택동은 그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모택동은 한국전쟁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동북변방군의 부대건설, 무기보충, 물자조달등 업무도 계속 서둘러 진행했다. 차출해야할 부대는 전후로 동북으로 향했다. 다만 총사령관을 누가 맡을지 정해지지 않아서, 동북변방군의 지휘체계는 계속하여 갖추어지지 못했다. 8월하순, 조선인민군의 공세가 약화되고, 전쟁은 대치상태로 접어든다. 전쟁국면이 역전될 가능성이 증대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모택동은 예견했다. 중국이 출병해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그와 주은래는 새로운 동북변방군 총사령관을 물색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생각해낸 사람은 임표였다.

 

왜 그들은 임표를 생각했을까? 주로 다음의 몇 가지 요소 때문이다. 첫째, 임표는 당시 제4야전군사령관, 중남국 제1서기, 중남군구사령관 겸 정치위원, 중남군정위원회 주석으로 동북변방군을 창건하는데 제4야전군의 부대가 대부분 차출되었다. 그 본인도 동북변방군의 창설업무에 참여했다. 그가 지휘하는 것이 순리였다. 둘째, 임표는 군사적으로 확실히 재능이 뛰어났다. 당시 군대에서 임표만이 "삼대전역중 2개전역"(임표는 요심, 평진 양대 전역에 참가하여 지휘했다), "도강전역의 절반"(임표가 도강전투에서 서부전선군대의 도강을 지휘했다)을 맡았었다. 셋째, 임표는 당시 모택동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었고, 모택동은 임표에 대하여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임표는 전투에서 사나우면서 교활하다" 넷째, 한반도에 출병하려면 반드시 북한지도자, 소련군사고문들과 공동으로 행동해야 했다. 동북에 있는 동안, 임표는 북한노동당지도자들과 공동작전을 한 바 있어, 많은 북한인민군의 고위장군들이 임표의 부하였었다. 소련에서 병치료하는 동안 소련군대의 고위급 장군등과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다섯째, 한국전쟁은 반드시 겨울에 작전을 벌여야 했다. 임표는 대부대의 동계작전 지휘경험이 있다. 결론적으로, 모택동과 주은래는 임표가 참전부대의 총사령관으로 가장 적합한 후보라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임표를 한국전쟁에 총사령관으로 보내는 건에 관하여 중앙서기처의 몇몇 서기들과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몇몇 서기들도 모두 찬성했다. 당중앙의 일정범위에서 의견이 성숙되었다. 모택동은 중앙군사위의 일상업무를 주재하는 주은래와 상의한 후, 의식적으로 임표로 하여금 동북변방군의 출국작전의 준비상황과 북한에서 보내온 전장정보를 살펴보게 했다. 다른 중앙지도자들 예를 들어 중앙군사위 부주석  팽덕회, 대리총참모장 섭영진, 국가부주석 고강, 정무원 재경위원회 부주임 박일파등도 모두 이 일을 알고 있었다. 다만 중앙에서 정식으로 이 일을 토론한 적은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슨 정식 결정을 통과시킨 적도 없다. 자연스럽게 임표와는 이 일을 정식으로 논의하지 않았다.

 

9월 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북한인민군은 피동적인 입장이 된다. 미군은 그 기회를 틈타 북방으로 전진했고, 미국의 정찰기는 이미 중국동북지구의 상공에서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한국전쟁참전의 절박성을 느꼈고, 그는 동북변방군으로 하여금 한반도에 출병할 준비를 서두르도록 명령한다. 동시에, 모택동은 총사령관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를 빠른 시일내에 결정해야만 했다.

 

다만,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의 신체상황을 고려했다. 그는 직접적으로 임표에게 부대를 이끌고 한반도에 참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먼저 중국이 한반도에 출병하는 문제에 대한 임표의 의견을 물어본다.

 

1950년 9월하순, 모택동은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건에 대하여 임표와 장시간 대화를 나눈다. 대화에서 임표는 중국의 국내상황과 군사역량의 두 가지 방면에서 솔직하게 자신은 한국전쟁에 참여하는데 반대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중국은 국내내전이 금방 끝나서, 각 방면의 업무를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 미국은 최대의 공업국으로, 군대장비가 고도로 현대화되어 있다. 1개군에 각종 화포 1,500문이 있는데, 중국군은 1개군에 겨우 36문밖에 없다. 미국은 강대한 공군과 해군전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해군, 공군은 이제 겨우 만들기 시작했다. 적군과 아군의 장비차이가 현격한 상황하에서, 만일 마구잡이로 출병하면 화가 본토에까지 미칠 것이다. 그 결과는 생각하기도 어렵다. 그의 의견은 중국이 많은 병력을 동북지방에 파견하여 주둔시키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는 한편으로 중국변경을 보위하고, 다른 한편으로 북한인민군에 전략적지지를 하는 역량이 될 수 있으며, 북한인민군은 유격전방식으로 미군과 계속 전투를 벌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임표는 모택동에게 자신의 의견을 직설적으로 얘기했고, 자신의 생각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하여 모택동은 임표를 전혀 질책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건의를 모택동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때는 모택동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겠다는 결정을 이미 내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택동은 임표가 출병에 반대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에게 만일 그에게 부대를 지휘하게 하면, 여러 장애와 문제가 있을 것이며 작전의 결과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임표를 총사령관으로 보내는 문제를 임표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후에도 모택동은 임표와 긴 시간동안 대화를 여러번 나눈다. 그러나 얘기한 주요내용은 그에게 부대를 지휘하라는 것이 아니라, 임표에게 우리가 왜 출병해야 하며, 출병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출병하면 어떤 유리한 여건이 있는지, 미 제국주의에 어떤 대책을 취해야 하는지등이었다. 목적은 임표가 정치국회의에서 참전을 지지하는 의견을 내주기 바랐기 때문이다. 다만, 임표는 모택동의 면전에서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고, 참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한국전쟁참전이후의 전략전술문제에 대하여만 임표의 의견을 구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임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적군과 아군의 상황을 분석한 후,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했고, 몇가지 방안을 모택동에게 제시한다. 그가 제안한 것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먼저 몇 건의 대형섬멸전을 벌여야 전쟁국면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는 화력을 집중하여, 대형포를 가느한 섬멸전을 벌이는 몇개 사단이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표의 이런 의견에 대하여 모택동도 찬동했다.

 

모택동은 임표가 한국전쟁참전을 반대하는데 대하여 질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임표를 설득하지는 못한다. 모택동과 임표는 한반도에 출병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었다. 확실히 임표는 모택동과 당중앙서기처의 다른 지도자들이 그로 하여금 한국전쟁참전부대를 지휘하게 하려는 의도를 알고 있었고, 사실대로 자신의 신체상황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표는 말한다. 자신은 매일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몸이 허약하며 병도 많다. 바람도 맞으면 안되고, 햇볕을 쬐어도 안되며, 소리가 나는 것도 겁난다. 임표의 뜻은 그 자신의 신체상황은 자신이 총사령관을 맡을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만일 중공이 한국전쟁참전을 결정한다면 가장 좋은 것은 다른 사람을 물색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모택동은 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건을 논의한다. 임표가 명백하게 참전에 반대하였고, 다시 사실대로 자신의 신체상황을 모택동에게 설명했으므로, 모택동은 당연히 그에게 억지로 총사령관을 맡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모택동은 이미 임표에게 총사령관을 맡기는 것을 포기했고, 이미 팽덕회를 몰색해 놓았다. 10월 2일 소집된 중앙서기처회의에서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출병은 이미 아주 시급한 일이 되었다. 임표는 병이 있어 가지 못한다고 하니, 내 의견은 팽덕회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10월 4일, 중앙정치국확대회의는 한국전쟁참전문제를 논의한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모택동, 주덕, 유소기(劉少奇), 주은래, 임필시(任弼時), 진운(陳雲), 고강, 팽진(彭眞), 동필무(董必武), 임백거(林伯渠), 장문천(張聞天). 팽덕회는 회의중간에 도착한다. 이부춘(李富春), 나영환, 임표, 등소평(鄧小平), 요수석(饒漱石), 박일파(薄一波), 섭영진, 등자회(鄧子恢), 양상곤(楊尙昆), 호교목(胡喬木)이 회의에 열석(列席)했다. 

 

정치국확대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모택동은 참석자들에게 먼저 출병작전의 난점에 대하여 얘기해보자고 한다. 임표는 발언에서 여전히 그가 모택동과 면담할 때 출병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를 견지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나라를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다. 국력도 아직 약하다. 다시 전쟁을 벌일 능력이 없다. 특히 우리는 미군과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 나는 여전히 같은 의견이다. 신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20여년간 전쟁을 해왔다. 원기가 아직 회복되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역시 동북변방을 강화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에게까지 화가 미치지 않도록. 그후 며칠간 회의에서, 임표는 여러번 발언하고,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중국이 한국전쟁에 파병하는 경우의 난점에 대하여도 열거한다. 그의 발언은 오랫동안 생각을 했던 것이고, 근거와 자료가 있었으므로 정치국의 적지 않은 위원들의 찬동을 받아낸다. 이 기간동안 소집된 중앙군사위 상임위원회 회의에서는 임표가 더욱 상세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문제에 대한 분석이 아주 구체적이었다.

 

임표의 정치국확대회의에서의 태도에 대하여, 일찌기 주은래의 군사비서를 맡았던 뇌영부(雷英夫)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그는 군사위 상임위원회의 거인당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백만명의 북한을 구하기 위하여, 5억인구의 중국을 망치는 것은 가치가 없다. 우리군은 장개석 국민당의 군대와 싸우는데는 자신이 있다. 그러나 미군과 싸울 수 있을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들은 방대한 육해공군을 가지고 있고, 원자탄도 있으며 웅후한 공업적인 기초도 있다. 그들을 몰아부치면 원자탄 두개 혹은 전투기의 대규모 폭격만으로도 우리는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출병에 찬성하지 않는다. 출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