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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표74

리커창(李克强)은 왜 반드시 죽어야만 했을까? 글: 호도도(弧度度) 어떤 사람은 중공당내에 좋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말한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왜 리펑(李鵬), 장쩌민(江澤民)이 죽었을 때는 그렇게 많은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길거리로 나와서 꽃을 바치면서 추모하지 않았을까? 인터넷이 날로 보급되고 발전하면서 중국에는 깨달은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민심의 향방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이 꽃을 바치고, 어떤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은 폭죽을 쏜다. 어떤 사람은 리커창이 아무런 업적도 내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시진핑이 헌법을 고치고 연임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그건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다만,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이 대거 개혁을 진행할 수.. 2023. 11. 7.
모택동(毛澤東)과 유소기(劉少奇)가 내부투쟁을 벌인 진정한 원인은...? 글: 무덕산(武德山)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공개한 글에서 모택동과 유소기간의 갈등에 관하여 대부분 "사청(四淸)"운동때의 "심각한 의견차이"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이데올로기 층면에서 고도로 일치했고, 모택동이 유소기를 비판한 관점과 방법은 기실 모두 모택동의 인가를 받아 대거 제창한 것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택동이 유소기와 "중대한 이론상의 의견차이"때문이 아니라, 유소기에 대한 불만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택동은 유소기에 대한불만때문에 "중대한 이론상의 의견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간의 갈등은 더욱 실질적인 원인이 있다.... 모택동 71세생일때의 식사자리 12월 26일, 모택동의 71세 생일이었다. 그날 저녁 모택동은 인민대회당 노북경청(老北京廳)에서 일부 사람들을 불러 .. 2023. 10. 17.
항전말기 중공의 10대원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글: 문사망(文史網) 연안정풍(延安整風)이 진행된 1942년부터 1945년기간은 대일항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거둔 시기이다. 그 때 신중국건립후의 10대원수중 8명의 "원수"는 전선의 자기 부대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3월, 임표(林彪)는 산서(山西) 습현(隰縣)에서 염석산(閻錫山)부대의 초병에게 오인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 연안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연말 처 유신민(劉新民, 張梅)을 데리고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치료받고 휴양했다. 1942년 2월 소련에서 연안으로 돌아와 중앙당교 부교장이 된다. 1945년 8월 25일, 임표, 유백승(劉伯承), 진의(陳毅), 등소평(鄧小.. 2023. 7. 7.
주은래(周恩來)와 유소기(劉少奇)의 암중각축(暗中角逐) 글: 고문겸(高文謙)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에서 이상하리만치 격렬한 어조로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소기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반동의 부르조아계급입장에 서서, 부르조아계급독재를 실행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거대한 문화대혁명운동을 탄압하고,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혼동하며, 혁명파를 토벌하고, 다른 의견을 억누르며 백색공포를 실행하며 스스로 득의하며 부르조아계급의 위풍을 키우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뜻을 꺽었다. 어찌 그렇게 독하단 말인가?" 모택동은 글에서 1962년 조정시기의 소위 '우경'문제를 연결시켜, 기세등등하게 유소기와 최종대결을 벌이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모택동의 이 글은 그후 전체회의에 인쇄되어 배부되어, 회의참석자들이 유소기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전체회의는 바로 .. 2023. 5. 18.
손유세(孫維世): 주은래(周恩來) 양녀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1968년 10월의 어느 날, 당시 중국국무원총리로 있던 주은래는 사무실에서 공안부가 보내온 "손유세사망보고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금된 범죄인 손유세는 10월 12일 저녁 11시 공안부병원으로 보내어졌고, 지주막하출혈로 진답받았는데, 치료를 하였지만 살려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14일 오후 3시 30분 사망했다. 이에 보고드린다. 왕명소수(王明蘇修, '소수'는 소련수정주의'를 가리킴)특무전안조." 얼마 후 비서가 돌아와 주은래에게 보고한다. 손유세의 시신은 이미 '현행반혁명'으로 화장되었고, 유골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주은래의 양녀 손유세는 중국의 저명한 희극예술가(戱劇藝術家)로 1921년에 태어났다. 부친 손병문(孫炳文)은 주은래의 가까운 친구였는데, 19.. 2023. 4. 18.
남창폭동(南昌暴動): 참가한 지도자들의 서열은? 글: 고벌림(高伐林) 중국의 정치와 문화전통은 역대이래로 존비유서(尊卑有序), 즉 위계질서를 중시하며 강상(綱常)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 봉건등급에 반대하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중국공산당도 권력을 잡은 후에는 역시 존비유서를 따졌다. 여기에서 필자는 유방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천하를 차지한 후 논공행상을 벌이는데, 문신과 무신들이 서로 취한 상태에서 공을 다퉜다. 서로 소리치고, 검을 뽑아 탁자를 베고, 기둥을 쳤다. 유방은 그런 것이 꼴보기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등급제도, 예악규장을 제정하여 신하들을 교욱하고 백성들을 따르게 한다. 다시 조회를 개최하자 신하들은 황공해 하면서 법도를 따랐다. 유방은 그제서야 .. 2023. 2. 9.
중국은 왜 항상 "국내외적대세력"을 들고나올까? 글: 왕우군(王友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수십번에 걸쳐 피비린내나는 정치운동을 발동시켰다. 매번 정치운동때마다 중공에 숙청당한 대상은 모두 중공에 의해 "국내외적대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칭해졌다. 즉,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 혹은 "국내외적대세력의 당내대리인"이라고 규정되었다. 고요(高饒)는 "자산계급의 당내대리인"으로 규정되다. 1954-1955년 중공은 당정후 첫번째 반당집단을 규정했다. "고강(高崗),요수석(饒漱石)반당연맹"이다. 고강은 당시 중공정치국위원, 중앙정부부주석, 중앙군위부주석, 국가계위주석이었고, 요수석은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었다. 고요는 중공에 의해 모택동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중앙영도핵심을 '전복하기를 기도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영도권을 찬탈하고자' 했다고.. 2022. 12. 11.
임표(林彪)와 등소평(鄧小平)의 은원(恩怨) 글: 조대부(趙大夫) 임표, 등소평은 모택동의 득의문생(得意門生)으로 일찌기 모두 모택동의 후계자 반열에 올랐다. 한명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이름을 넣었던 모택동의 후계자이고, 다른 한명은 모택동의 사후 사실상의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그렇다면, 등소평과 임표는 도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미묘했다. 제1대영도집단의 핵심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심리도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상하급관계였기도 했고, 일찌기 밀접한 협력관계이기도 했고, 또한 심각한 대립관계이기도 했다. 등소평과 임표는 일생동안 교류가 거의 없었다.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등소평의 딸 모모(毛毛)가 등소평을 회고하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등소평과 임표는 개인적인.. 2022. 11. 24.
임표(林彪)는 왜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했을까? 글: 봉황역사(鳳凰歷史) 중공 고위층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할 때, 모택동(毛澤東)과 임표(林彪)는 견해가 달랐다. 당시, 모택동은 확실히 임표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한국전쟁체 참가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임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참전하지 않았고, 나중에 팽덕회(彭德懷)가 총사령관을 맡아서 참전한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특히 "9.13"사건이후, 대다수의 견해는 이러했다: "임표는 한국전쟁문제에서 소극적이었고,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진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택동은 동북지방이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고, 또한 동북지구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고려하여 당중앙에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을 설립할 것을 건의했다. 모택동의 .. 2022. 10. 26.
"주덕(朱德)의 편담(扁擔, 멜대)"과 "임표(林彪)의 편담" 글: 임휘(林輝) 1950년대초, 토비(土匪)출신의 중공 전 군사지도자 주덕의 간고(艱苦)하고, 소박한 정신을 칭송하는 글인 이 소학교 교재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글은 조작혐의가 있어 작년에 교과서에서 삭제된다.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 조작혐의가 있는 글이 1967년 2월 정치적 원인으로 주인공을 "임표"로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년 후 임표사건이 발생하고나서, 주인공은 다시 원래대로 주덕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주석의 편담"도 날조된 것이 아닌가? 먼저 이 정치적 풍운변화에 흔들린 글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대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1928년 주덕과 모택동은 폭동에 실패하여 도망쳐서 정강산에서 만난 후, 먹을 것이 부족하여, 사람을 5.. 2022.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