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융유태후11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 허수아비황제의 비참했던 동년시절 글: 지역사(知歷史) 나라의 경제가 계속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덩달아 높아졌다. 여유시간도 풍부하고 다양해진다. 이런 좋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우리 세대의 행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젊은이들은 인터넷드라마의 영향을 받아 고대인의 생활을 선망하기도 한다. 고대로 타임슬립해서, 지금 배운 학식을 가지고 고대에서 큰 뜻을 펼쳤으면 하는 것이다. 기실 우리도 고대영화드라마에 조금 속았다. 고대인의 생활은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좋지 않았다. 특히 등급이 삼엄한 봉건통치사회하에서 사람의 생활은 비교적 힘들었다. 잘 살았던 것은 단지 일부 왕공귀족의 통치계급이었고, 평민백성의 생활은 힘들었다.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떤 사람은 자신이 고대로 타임슬립하여 왕자, 공주가 되었으면 한다. 심지.. 2020. 7. 3.
서태후의 조카딸 서태후의 남동생 계상(桂祥)이 낳은 세 딸 중 큰 딸. 즉 서태후의 큰조카딸. 예허나라 정영(靜榮). 세 조카딸 중 가장 예뻤다. 애신각라 재택(載澤, 강희제의 15째아들 윤우의 오대손)과 결혼한다. 큰조카딸 정영이 외국대사부인과 찍은 사진, 가운데 서 있는 아이는 정영의 아들 부영(溥偀).. 2019. 6. 15.
융유(隆裕): 중국역사상 가장 공헌이 큰 황후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이전에 나는 융유황후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분들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얼굴도 못생겼고, 말랐으며 등이 굽었다. 그리고 남편 광서제보다 3살이 많았다. 황후라는 명분은 있으나, 한번도 광서제의 은총을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 2019. 1. 23.
서태후의 사망을 전후한 시기의 후계다툼 글: 사우춘(史遇春) 동한때 반고의 <한서> 권87상 <양웅전(揚雄傳)> 제57상에는 양웅의 <반이소(反離騷)>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반이소>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정경미여추국혜(精瓊靡與秋菊兮), 장이연부천년(將以延夫天年); 임멱라이자운혜(臨汨羅而自隕兮), 공일.. 2018. 11. 16.
금전: 청나라조정을 무너뜨린 윤활제 글: 풍학영(馮學榮) 청나라조정의 붕괴는 무창의거때문이다. 혁명당인은 만청왕조의 멸망에 확실히 주요한 추진역량이었다. 다만, 사람들이 경시하는 점이 있다: 청나라조정이 무너진 과정에서 기실 '금전'이라는 것이 '윤활제'의 작용을 잘 했다는 것이다. 금전은 확실히 이 역사발전을 .. 2014. 3. 2.
북양총리 조병균(趙秉鈞)은 왜 원세개에게 암해(暗害)를 당했는가? 글: 장부걸(張溥杰) 조병균은 자가 지안(智安)이고 하남 임여(臨汝) 사람이다. 1859년에 태어나서 1914년에 사망한다. 그의 신세내력은 상당히 전설적이다. 상당히 "이 형님은 하나의 전설이다"라는 대단한 기운이 느껴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는 유랑아로 성이 무엇인지도 .. 2014. 1. 14.
원세개는 왜 융유태후를 첩으로 삼으려 했는가?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1911년 10월 10일, 국민혁명군이 무창(武昌)의거를 일으킨다. 20일후, 원세개는 청나라정부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다음 해인 1월 25일, 원세개 및 각 북양장령은 전보를 보내어 공화(共和)를 선택한다. 남방혁명정부로부터 대총통의 자리를 보장받은 후, 원세개는 청황.. 2013. 11. 10.
광서제 검시보고서에 대한 검토 글: 풍학영(馮學榮) 1908년 11월 14일, 나이 겨우 38세된 광서제가 돌연 붕어한다. 다음 날 11월 15일, 서태후도 곧이어 병사한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서태후가 광서제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지금까지 백여년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주장은 중국인들이 무조건적으로 믿어왔다... 2013. 9. 14.
서태후의 마지막 하루 글: 이옥광(李玉廣) 1908년 11월 15일 새벽 서태후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잠에서 깨었다. 즉 소위 "청가(請駕)"이다. 전날, 즉 14일에 광서제가 붕어했다. 서태후는 종일 광서제의 후사를 처리하느라 바빴고,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저녁 늦어서야 쉴 수 있었다. 무엇때문인지 몰라도, 서.. 2013. 6. 11.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여는 첫날 글: 왕학빈(王學斌) 1912년 1월 1일, 남경, 총통부, 밤 11시. 하얀 달이 하늘에 떠 있고, 별들은 점점이 보인다. 손중산(孫中山)는 임시대총통 취임선서문을 들고, 광동어로 장엄하게 읽어내려갔다: "만주독재정부를 전복시키고, 중화민국을 공고히 하며, 민생과 행복을 도모하는 것은 국민의 .. 2012.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