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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융유(隆裕): 중국역사상 가장 공헌이 큰 황후

by 중은우시 2019. 1. 23.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이전에 나는 융유황후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분들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얼굴도 못생겼고, 말랐으며 등이 굽었다. 그리고 남편 광서제보다 3살이 많았다. 황후라는 명분은 있으나, 한번도 광서제의 은총을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후손이없고, 거의 생과부로 살았다.


마찬가지로 활발하고 예쁜 진비와는 달리, 융유는 정말 재미가 없는 여자였다. 진비를 노불야(서태후)에의해 우물에 빠져죽었는데, 그녀는 황후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매번 이렇게 비교할 때면 진비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융유에 대하여는 원한을 품게 된다.


다만, 그녀는 만세에 이름을 남길 천추의 위업을 이뤘다. 비록 현재 우리가 느끼지는 못하고, 모든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고 느끼지만, 그러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시세의 흐름은 천변만화해서 순식간에 바뀌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가 있다.


그런데, 융유황후는 이를 해냈다. 그녀는 당시에 그리고 후세에 가장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바로 대청국이 지배하던 판도를 완전하게 중화민국의 수중에 넘겨준 것이다. 이것은 불세의 공로이다. 그래서 그녀는 '중국역사상 공헌이 가장 큰 황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융유는 예허나라씨이고, 만주 상황기 사람이다. 이름은 정분(靜芬)이고, 아명의 희자(喜子)이다. 서태후의 동생인 부도통 계상(桂祥)의 딸이다. 광서14년, 서태후에 의해 황후로 점지되고, 다음해에 황후에 오른다. 광서제가 병사한 후에 서태후는 유명으로 선통제를 즉위시키며 선통제는 그녀를 "겸조모후(兼祧母后)"라고 부르고, 황태후로 모신다. 휘호는 '융유'였다. 선통제는 당시 겨우 2살의 나이였으므로, 황태후가 길렀다. 동시에 융유태후는 선통제의 부친인 섭정왕 재풍과 함께 비바람에 흔들리는 청왕조를 통치했다.


선통3년, 황태후의 명의로 <선통제퇴위조서>가 반포되며, 청왕조는 1636년이래 276년의 통치를 마감한다. 민국2년, 융유태후가 병사하니 향년 46세이다. 시호를 효정융유관혜신철협천보성경황후(孝定隆裕寬惠愼哲協天保聖景皇后)라 하며, 중화민국정부에서 국장의 규격으로 장례를 치르고, 광서제와 숭릉(崇陵)에 합장한다.


대청왕조를 살펴보면, 대체로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시를 1단계, 즉 창업기이다. 피바람이 불고, 파란만장했다. 강희, 건륭, 옹정을 제2단계로 볼 수 있다. 즉 수성이 시기이다.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태평성세를 이룬다. 가경제 이후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다행히 서태후가 지탱해 주었지만 나중에는 노불야도 지탱할 수 없게 된다. 그녀가 죽었을 때, 제국은 이미 만신창이였고, 건물은 기울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융유가 넘겨받았을 때의 모습인 것이다.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대청의 멸망은 사천의 보로운동부터이다. 즉, 청왕조가 호북의 병력을 보내어 진압하면서, 무창이 비었고, 의거가 일어난다. 이번 의거의 정의는 한족이 만주족에 항거한 의거이다. 우리는 손중산 선생이 신해혁명시에 내놓은 구호만 보더라도 이를 알 수가 있다; "구제달로(驅除韃虜), 회복중화(恢復中華)"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만주족을 쫓아내자는 것이다. 너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중원은 우리 한족이 되찾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의 목적이다.


중국군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무창의거깃발의 의미를 보면, 우리는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 깃발은 '철혈십팔성기(鐵血十八星旗)"라 부른다. 즉 수의지기(首義之旗)이다. 18개의 별은 한족이 소재하던 18개 행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혁명을 한족의 혁명이라고 이해했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싸워서 이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워서 이길 수 없으면 도망쳐야 한다. 예를 들어, 명나라초기의 몽골은 주원장의 대군을 당할 수 없자, 초원으로 돌아가면 될 것아니냐고 떠나버렸다. 만주족에 있어서도 기실 이렇게 할 수가 있었다. 어쨌든 너희 한족들이 우리를 쫓아내는 것이고, 우리는 너희와 싸워서 이길 수 없으니,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용흥지지(龍興之地)인 동북으로 가면 될 것 아니냐.


그런데, 이 18개 성 외에 예를 들어, 몽골, 티벳, 청해, 영하같은 소수민족의 성이 보기에, 이것은 한족이 거사한 것이니, 자신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리하여 원래 청나라조정에 충성을 다하던 이들은 황급히 '근왕(勤王)'하려 했다; 그리고 일부분의 투기세력은 이 기회를 틈타 '독립'하고자 했다.


다만, 융유황후의 퇴위조서는 이번의 왕조교체를 아주 순조롭게 만들어 준다. 남경과 같은 일부 지역에서 전투가 발생한 외에, 나머지는 거의 조용한 상태로 과도가 완성된다. 그리고 퇴위조서에는 핵심문구가 있다. 이는 딴 마음을 품고 있던 분열세력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 퇴위조서에서 융유황후는 명확히 언급했다; "여전히 만, 한, 몽, 회, 장의 오족을 합한 완전한 영토를 하나의 대중화민국으로 한다." 이것은 바로, 나는 내가 통치하는 모든 영토와 백성을 완전히 새로운 중화민국에 넘기겠다는 말이다. 바로 이 한 마디 말때문에, 중국은 분열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중국의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혁명의 진통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공덕이 무량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융유황후는 이로 인하여 전세계의 존경을 받는다. 청왕조는 이렇게 존엄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막을 내렸다. 실로 "근위해내염란망치지심(近慰海內厭亂望治之心), 원협고성천하위공지의(遠協古聖天下爲公之義)"(가까이는 국내에서 혼란을 피하고 안정된 통치를 바라는 마음을 위로하고, 멀리는 고대성인의 천하위공의 뜻에 맞추었다)


이 조서는 장원출신 실업가 장건(張謇)의 작품이다. 불항불비(不亢不卑)하며, 재정재리(在情在理)했고, 대의를 밝혔다. 옛날에 군림천하하는 사람들은 백성의 목숨을 지키는 것을 중시했고, 차마 사람을 길러서 사람을 해치게 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왕조가 멸망할 때 기언야애(其言也哀), 기언야선(其言也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선통제의 명의로 반포되었지만, 이는 융유가 서명하며 발효된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당시 시국을 좌우하던 사람은 원세개이다. 그러나, 남방의 혁명당과 국민들은 모두 왕조를 교체해야한다고는 생각하면서 열정을 가지고 혁명에 참가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진리처럼, "반동파는 역사무대에서 퇴출당하기 전에, 죽기살기로 버틴다."면 반드시 전국에서 혼란이 발생할 것이고, 백성은 도탄에 빠질 것이다. 이는 국가와 인민에 큰 재난이 될 것이다.


실제 최고통치자인 융유태후는 능력의 면에서 보자면, 고모인 서태후와 비교할 수 없다. 만일 서태후가 살아있었더라면, 어떤 상황이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녀의 광서제에 대한 교육을 보면, 강조한 것은 조상에게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려하는 것은 죽고나서 조상을 만났을 때였다. 이렇게 보자면, 그녀는 절대로 대청의 삼백년기업을 자신의 손으로 망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조상의 면목을 본단 말인가. 반드시 죽기살기로 버텨야 했다.


그러나, 융유는 서태후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내의 남북화담의 전체 과정에서, 융유태후는 비록 약간의 환상을 가졌지만, 그녀는 피비린내나는 수단으로 혁명당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견지했다. 어떤 정치적 수단도 쓰지 않았고, 청왕조의 퇴위를 막기 위한 어떤 음모도 꾸미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황실의 향후 생존 그리고 선통제의 생명안위만을 걱정했다.


이것을 가지고 그녀의 성격이 유약하고, 사단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일을 만들지 않으려 하고, 닥친 일은 그냥 받아들이는 성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그녀의 천성이 선량하고, 일처리때 평화롭고 조용하게 처리하며, 차라리 자신이 밤새 눈물을 흘릴지언정 천하를 혼란에 빠트리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력을 하더라도 헛수고가 될 수 있다.


세계로 범위를 넓혀서 보더라도, 정권교체에 피비린내가 없는 경우는 영국의 명예혁명이든 프랑스의 대혁명이든, 모두 많은 사람들이 머리잘리고 집을 잃었다. 중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진교병변의 황포가신이 하나의 예외일 뿐이다. 청나라조정처럼 스스로 조용히 물러난 것은 중국역사에서 하나의 진보이다.


융유태후가 서명한 조서에서는 오족공화를 선언했다. 이는 혁명당인들의 격렬한 입장으로 국가가 분열될 수 있는 위기를 막았을 뿐아니라, 새로 출생한 중화민국에 정삭정통지위를 부여했다. 나머지 폭력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구실을 주지 않았고, 대국을 안정시켰다. 이 두 가지 점만으로도 중국의 강역이 완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고, 중화민족의 대국은 여전히 세계의 동방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융유태후는 여기에 큰 공을 세웠다. 그녀는 이로 인하여 손중산, 황흥 등에게 '여중요순(女中堯舜)'이라는 존경을 받는다.


선량하고 대국을 고려한다, 성격이 온화하고 스스로 책임지며, 생명을 존중한다. 이것이 아마 융유태후의 본질일 것이다. 아마도 바로 이런 본질 때문에, 그녀는 제2의 서태후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비록 그녀는 "우울하게 구중궁궐에 이십여년간 살았지만, 칭찬받을 일도 없었고, 욕먹을 일도 없었다. 오로지 청나라조정의 퇴위때 공이 크다. 공화사에서 그 가치를 잃지 않을 인물이다."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융유는 거대한 압력을 막아내고 이 퇴위대업을 완성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내심도 아주 고통스럽고 스스로를 자책했을 것이다. 비록 여전히 원래의 자금성 궁전내에 살고 있지만, 원래 대청의 기업이던 것을 자신의 손으로 끝장내 버렸다. 내심으로 조상에 죄송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보낸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대청의 종실, 유로유소(遺老遺少)들에게 원망을 들었다. 여러가지 욕도 얻어 먹는다. 그녀의 생일축하연때 황실종친이 거의 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보고, 그녀는 내심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 후에 병석에 눕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얼마 후 장춘궁에서 세상을 떠난다.


소문에 따르면, 융유태후가 퇴위조서에 서명한 후, 원세개는 그녀에게서 진정한 전통부녀의 우수한 품성을 보아 그녀를 첩으로 들이고자 생각한다. 그러나 융유가 결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은 고증한 바 없지만, 직관적으로 볼 때 허무맹랑한 말이다. 원세개가 융유태후를 쫓아낸 것에 대하여 미안한 감정이 있을 수는 있다. 그것은 믿는다. 원세개가 무슨 십악불사의 인간도 아니고, 그는 처첩을 대하는데 있어서 비교적 잘해준 편이다. 원세개가 아무리 원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녀는 대청의 황후이고, 절대로 이전의 노재(奴才)에게 시집갈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