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서태후의 사망을 전후한 시기의 후계다툼

중은우시 2018. 11. 16. 11:21

글: 사우춘(史遇春)


동한때 반고의 <한서> 권87상 <양웅전(揚雄傳)> 제57상에는 양웅의 <반이소(反離騷)>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반이소>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정경미여추국혜(精瓊靡與秋菊兮), 장이연부천년(將以延夫天年); 임멱라이자운혜(臨汨羅而自隕兮), 공일박어서산(恐日薄於西山)"  이 문구의 의미는 이러하다. 비록 정경과 추국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지만, 멱라강을 보고 굴원을 생각하니 스스로 슬픔이 밀려온다. 인생을 짧고, 자신의 생명과 업적은 서산에서 곧 지려고 하는 해와 같이 마지막을 향해서 가고 있다.

여기에서 "일박서산(日薄西山)"이라는 말이 나왔다.

나중에 서진의 이밀(李密)은 <진정표(陳情表)>에서 이렇게 말한다:

"단이유일박서산(但以劉日薄西山), 기식엄엄(氣息奄奄), 인명위천(人命危淺), 조불려석(朝不慮夕)"

진무제가 그를 태자세마(太子洗馬)로 임명한 것을 극력 사양하기 위하여 이밀은 조모의 나이가 많고 병을 많이 앓으며, 아무도 공양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를 내걸어 거절한다. 이밀은 '일박서산'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뿐아니라, 더욱 강하게 표현한다. "기식엄엄"

이상의 명저, 명인, 명편에 나오는 명사(名詞)는 널리 전파되고, 그리하여 성어 '일박서산'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다. 나중에 이 성어는 사람이 곧 죽게 된다거나 일이 곧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사람의 생명여정에서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정권은 역사의 긴 물줄기 속에서 결국은 멸망하고 만다. 이것은 역사의 진실이다.


청나라는 1644년(명사종 숭정17년, 청세조 순치원년)에 북경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는다.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되며,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하기까지 268년간 존속한다.

청덕종 광서34년(1908년) 십월, 계유, 광서제는 영대(瀛臺) 함원전(涵元殿)에서 붕어한다. 향년 38세이고, 서태후는 부의(溥儀)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한다.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인 갑술일, 태황태후 서태후는 중남해(中南海) 의란전(儀鸞殿)에서 병사한다. 향년 74세이다.

1644년부터 1908년까지 청나라는 이미 중원에 자리잡은지 264년이 되었고, 존속기간의 98.51%가 이미 지나갔다. 4년후에는 멸망한다.


하나의 성어로 이때의 청나라정권을 표현한다면 필자의 생각에 '일박서산'이 가장 적합한 말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정권의 정확한 멸망시기를 알 수 없으므로,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여전히 100% 일박서산의 권력을 손아귀에 꽉 쥐고 싶어했다. 여전히 일박서산인 권력을 쥐고 싶어했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기실, 정확하게 멸망시기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권력에 도취된 사람은 여전히 죽어라 싸울 것이고, 전력을 다해서 쟁취할 것이다. 일박서산의 권력을 자신이 잡아서 일각을 쓸 수 있으면 일각이라도 즐기겠다는 것이다.

광서제가 죽은 후 후사가 없었다. 서태후는 부의에게 대통을 잇도록 명했는데, 이 결과는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그 중간의 과정은 비교적 복잡했었다.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 서태후가 죽는다. 비록 신황제는 이미 확정되었지만, 황위계승의 파란은 아직 완전히 파란을 그친 것이 아니었다.

아래에서는 청나라정권이 일박서산에 이르렀을 때, 권력투쟁에 관한 일단의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기록은 청나라때의 호사경(胡思敬)이 작성한 <국문비승(國聞備乘)> 권3 <부위쟁위(溥偉爭位)>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청덕종 광서제가 자식을 두지 않고 죽자. 그가 죽은 후, 황위계승의 후보는 중대한 문제로 떠오른다.

일반적인 사고와 방식에 따르자면, 광서제에게 아들이 없으면, 대통의 계승자는 분명 그의 조카들 중에서 골라야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첫째 혈연관계가 가깝고, 둘째는 광서제의 제사를 순조롭게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광서제의 부친인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은 도광제의 일곱째 아들이다. 그는 함풍제의 배다른 동생이다. 이치대로라면, 광서제의 후계자는 순친왕 혁현의 손자들 중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때 혁현의 손자들 중에는 적합한 후보가 없었다.

광서제가 죽은 후, 황위계승자격을 갖춘 조카로는 순친왕 혁현의 배다른 형인 혁흔(奕訢, 도광제의 여섯째 아들)의 손자들 중에서 찾아야 했다.

이때, 광서제의 여러 조카들 중에서 혁흔의 손자인 부위는 나이가 가장 많았다. 당시 29살이었다. 그는 군왕함패륵(郡王銜貝勒) 재징(載澂, 혁흔의 첫째아들)의 양자이고, 패륵(貝勒) 재형(載滢, 혁흔의 둘째아들)의 장남이다.

광서제의 후계자를 고르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이다.

광서24년(1898년)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서태후는 훈정을 다시 시작한다. 광서25년(1899년) 설날 며칠 전에, 서태후는 왕공대신회의를 소집하여, 부준(溥儁)을 "대아거(大阿哥, 즉 황위후계자)"로 세우고자 한다. 그리고 경자년(광서26년, 즉 1900년)의 원단(元旦, 즉 첫날, 중국고대는 납월, 십월등의 첫날을 원단으로 하였다. 한무제때부터 원단을 음력 1월 1일로 정한다.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된 때로부터 원단은 양력1월1일로 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은 양력1월 1일을 원단으로 한다)에 광서제의 양위(讓位) 의식을 거행하고자 계획한다. 그리고 연호까지도 미리 확정한다. "보경(保慶)". 다만 서태후의 이런 계획은 국내외 각종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친다. 결국 이번 폐립(廢立)활동은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광서제의 생전에 서태후가 세우려고 했던 후계자는 부준이다. 그는 단군왕(端郡王) 재의(載漪)의 차남이다. 재의는 도광제의 다섯째 아들인 돈친왕(惇親王) 혁종(奕誴)의 차남이다. 혁종은 도광제의 배다른 동생인 돈각친왕(惇恪親王) 면개(綿愷)의 양자가 된다. 혁종은 또한 광서제의 부친 순친왕 혁현의 배다른 형이기도 하다.

광서제의 생전에 부준은 일찌기 서태후의 주재하에, 거의 대통을 이을 뻔했다. 다만 부준은 결국 폐출된다.

비록, 서태후가 기획한 광서제의 페립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광서제의 황위는 이미 위태로워졌다. 황위를 노리는 사람들은 모두 그 빈틈을 뚫고 들어가려고 한다.

이렇게 황위계승의 꿈을 품은 사람들 중에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인정되는 사람이 바로 부위였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니, 부위는 더더욱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당연히 희망뿐아니라 부위는 준비행동에도 들어간다.

부위의 고모는 고륜공주(固倫公主)에 책봉된다. 이 고륜공주가 바로 영수고륜공주(榮壽固倫公主, 1854-1924)이다. 공친왕(恭親王) 혁흔의 장녀이고, 청문종 함풍11년(1861년)에 특지를 내려 고륜공주에 봉해진다, 공친왕이 고사하여, 영수공주로 고쳐 봉해진다; 광서연간에, 영수고륜공주로 승진한다. 황교(黃轎)를 내리고, 보통 공주 2배의 녹봉을 내린다.

영수고륜공주가 12살때, 서태후의 주재하에 부찰씨(富察氏)에게 시집간다. 출가한지 5년여만에 액부(額附) 지단(志端)이 병사한다. 이때 그녀는 겨우 17살의 나이인데, 과부가 된다.

과부가 된 후, 서태후는 영수고륜공주를 궁으로 불러들여서 살게 한다.

부위가 광서제의 황위를 잇겠다고 생각할 때, 먼저 떠올린 것은 궁안에서 도와줄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의 이 고모이다. 왜냐하면 이 고모는 당시 실제권력자 서태후에게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부의 도움 외에, 부의는 외부의 도움도 받았다. 그의 외부조력자는 재진(載振)이다. 재진은 경친왕(慶親王) 혁광(奕劻)의 장남이다.

그들을 얘기하자면 이 시기 혁광과 재진에 대한 간단한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광서33년(1907년), 청나라조정은 혁광을 육군부(陸軍部)의 일을 관장하게 한다.

그 해에 어사(御史) 조계림(趙啓霖)은 이런 상소를 올린다:

"단지귀(段芝貴)는 아부에 능한 자입니다. 지난 해 패자 대진이 동삼성으로 갈 때 천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단지귀는 만2천금을 주고 산 가기(歌妓)를 바쳤습니다. 또한 십만금을 혁광의 생일때 주어서 관직을 얻은 것입니다."

상소가 올라간 후, 단지귀는 파면되고, 청나라조정은 순친왕 재풍(載灃), 대학사 손가내(孫家鼐)로 하여금 이 일을 조사하게 한다.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고, 어사 조계림은 삭탈관직된다.

그리하여, 재진은 다시 상소를 올려 어전대신, 농공상부상서의 직을 사직하기를 청했고, 허가가 내려온다.

광서34년(1908년) 십일월, 혁광으로 하여금 친왕을 세습하게 한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위가 재진을 끌어들여서 외부조력자로 삼은 것은 그 나름대로의 뜻과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부위는 재진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 이렇게 구두약속을 한다:

"일이 성사되면 부귀영화를 같이 누리자!"

이 말은 아주 귀에 익다. 영화 속에서 암흑가의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사기> 권48 <진섭세가> 권18에서 유사한 말이 나온다. "진섭(진승)이 어렸을 때 일찌기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농사를 지은 바 있는데, 언덕에서 밭갈기를 그만두고 오랫동안 탄식하고나서 이렇게 말한다: '부귀해지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

계획을 세우는 건 계획을 세우는 것이고, 실제상황은 실제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서태후가 결정을 내리는데, 청선종 도광제의 손자이자, 순친왕 혁현의 다섯째 아들이자 광서재의 배다른 동생인 재풍의 아들 부의가 광서제의 황위를 잇게 되었다.

서태후가 결정을 내린 후, 재풍은 머리를 땅에 박으며 극력 사양한다. 자신의 아들은 황위를 계승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의 실제상황이 어떤 지는 잘 모르겠다. 재풍이 머리를 박으며 극력 사양한 것이 내심의 겸양일까? 예의상의 상투적인 말일까? 아니면 아직 나이어린 아들을 아끼기 때문일까? 아니면 권력에 대한 두려움때문일까? 진상은 모두 알 수가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재풍이 머리를 박으며 극력 사양하자, 서태후가 엄히 질책했다는 것이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네가 아직까지 겸양을 얘기하느냐. 너는 정말 노재(奴才)로구나!"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재풍에 대한 질책을 마친 후, 서태후는 어투를 누그려뜨려 천천히 얘기한다:

"만일 네가 너 혼자의 힘으로 황제를 보좌할 대임을 맡기 어렵다고 여기면, 관계로 보면 부위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너는 부위를 끌어들여서 너를 돕게 해라!"

부위는 비록 황위계승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서태후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듣고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약간이라도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리하여, 부위는 속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도 괜찮다. 그의 내심은 아직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데 희망을 갖고 있었다.

다만, 서태후가 죽은 후, 유조가 내려왔는데, 그 내용에는 그저 국가대정을 모조리 감국 섭정왕 재풍이 주재한다는 말만 있었고, 자신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위는 크게 실망하게 된다.

전해지는 바로는 부위가 조정으로 달려가서 장지동(張之洞)을 크게 욕했다고 한다:

"대행(大行, 돌아가셨다는 의미임) 황태후께서 붕어하시기 전에, 나로 하여금 섭정왕을 도우라고 했다. 이것은 고명지탁(顧命之托)이다. 지금 황태후의 유조가 내려왔는데, 거기에 내 이름이 없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마땅히 유조를 새로 써야 한다!"

광서제, 서태후가 차례로 죽고, 순친왕 재풍이 감국섭정을 한다. 이때 장지동은 고명중신으로 진태자태보였다. 그래서 부위는 장지동을 찾아간 것이다.

장지동은 이렇게 대답한다:

"무릇 조정에서 일하는 신하로서 마땅히 섭정왕을 도와야 합니다. 당신이 말한 그런 이유를 가지고 태후의 유조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태후께서 임종할 때 저도 근처에 있었습니다. 나는 태후께서 당신이 말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부위는 그의 대답을 듣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발을 구르며 통곡한다. 그리고 조정의 군기대신들을 하나하나 욕한다.

장지동은 부위를 조심하며 대했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그와 다투려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부위는 돌연 내무부로 달려간다. 그리고 명을 내려, 내무보에 이런저런 지시를 한다. 서태후의 유명이 있으니, 자기가 장례를 주관하겠다는 것이다. 장례에 관한 내외의 일은 모두 그의 지시를 받으라는 것이다.

내무부대신 규준(奎俊, 자는 낙봉(樂峰), 만주 정백기 사람. 과르자씨, 경성4대재주(財主)의 한 명. 영록(榮祿)의 숙부, 서예가)는 부위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면전에서 부닥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규준은 사람을 비밀리에 감국섭정왕 재풍에게 보낸다.

재풍은 부위가 의지(懿旨, 황태후의 명)를 구두로 전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급히 혁광과 같이 궁안으로 들어가서, 융유태후(隆裕太后)를 만난다. 그리고 융유에게 부위의 패역적인 일을 보고한다.

그리하여 융유태후가 즉시 명을 내린다: "황제이하 모두 섭정왕의 명령을 받드시 따르라!"

지시가 내려오자 부위는 더 이상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 재풍이 섭정한지 1년도 지나지 않아, 태푸진(太福晋), 정복진(正福晋, 영록의 딸), 동생 재순(載洵), 재도(載濤), 그리고 부륜(溥倫), 선기(善耆)등이 섭정왕의 권세에 의지하여 조정을 마음대로 주물어, 의론이 분분해진다.

이때 일부 사람들은 또 말한다. 당시에 부위가 황위를 계승하지 않은 것이 큰 잘못이었다고.

다만 부위의 행실을 살펴보면, 부위도 강산을 지킬 인물은 아니고 나라를 망하게 할 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황위를 얻기 위하여 친히 재진에게 무릎을 꿇은 바 있다. 그리고 몰래 바깥의 여자와 간통하여 푸진과 사이가 좋지 않아, 화가난 푸진은 칼을 빼들어 자결하려 한 적도 있다.

청나라의 강산대통은 두 황제가 후사를 두지 않으면서 파란이 인다. 청나라황실은 사직을 이을만한 뛰어난 인재가 나오지 않은 것같다. 아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알았다. 청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비록 그러했지만, 일박서산의 권력도 여전히 권력이다. 그래서 싸우는 것이고, 반드시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