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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북양총리 조병균(趙秉鈞)은 왜 원세개에게 암해(暗害)를 당했는가?

by 중은우시 2014. 1. 14.

글: 장부걸(張溥杰)

 

조병균은 자가 지안(智安)이고 하남 임여(臨汝) 사람이다. 1859년에 태어나서 1914년에 사망한다. 그의 신세내력은 상당히 전설적이다. 상당히 "이 형님은 하나의 전설이다"라는 대단한 기운이 느껴진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는 유랑아로 성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백가성중 첫번째인 조(趙)씨성을 쓴다. 그의 생일을 물으면, 정월 초하루라고 말한다." 이를 보면 그는 다른 사람의 뒤에 서려고 하지 않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19살때 조병균은 과거에 낙방한 후 좌종당(左宗棠)의 휘하로 들어가서 좌종당의 군대를 따라 신강으로 간다. 이번 행군과정에서 그는 실수로 말과 함께 깊은 구덩이로 떨어져, 큰 눈 속에서 3일 밤낮을 혼절해 있는다. 그리고 말과 함께 온기를 나누어 비로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만 비극은 이때부터 그는 진정한 남자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능력을 상실한다. 이 일로 인하여, 염세적인 추악한 종자가 그의 마음 속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그후에 조병균은 중국-러시아 변경의 판사원, 순검등의 직위를 맡는다. 이렇게 전전하다가, 조병균은 1889년 마침내 신강이라는 변방의 땅을 벗어나 내륙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후 몇년동안, 조병균은 돈을 써서 하급관직을 하나 맡는다. 비록 관직을 얻는 방법은 광명정대하지 못했지만, 그는 일은 잘 처리했다. 그리하여 현지의 직예총독인 이홍장(李鴻章)의 신임을 얻는다. 이홍장이 그에게 경사일대의 의화단을 토벌하라고 명령하자, 조병균은 독한 마음을 먹고 악랄한 수단을 동원하여 전심전력을 다하여 의화단을 토벌한다. 그리하여 이홍장이 만족해 하게 만든다.

 

원세개의 심복부하가 되다

 

1901년, 이홍장이 죽는다. 원세개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그리하여 조병균은 다시 원세개의 문하로 들어간다. 조병균은 관료사회의 고수였다. 어떻게 아부를 하는지 알았다. 그리하여 곧 원세개의 심복이 된다.

 

이 조병균은 정말 재주가 있었다. 그는 아주 의미있는 일을 하나 해낸다. 그것은 바로 중국현대경찰제도를 만든 것이다. 1901년 <신축조약>을 막 체결한 만청정부는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음을 발견한다. 조약의 규정에 따르면, 천진성내에 중국군대를 주둔할 수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북경의 중요한 문호로서 기능해온 천진이 이제 수도를 방어하는 능력을 잃게 될 수 있었다.

 

천진성에 중국의 병졸이 하나도 주둔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뜨거운 감자같은 임무는 당시 청나라정부에서 신군을 훈련시키던 원세개에게 떨어진다. 원세개는 3000명의 신군을 뽑아서, 부하 조병균에게 넘겨준다. 3개월의 단기경찰훈련을 거친 후, 조병균은 이들을 데리고 천진성으로 들어간다.

 

천진은 이때부터 이전에 중국백성들이 들어보지도 못했던 경찰을 갖게 되었다. 사회치안은 과거의 혼란국면을 일소한다. 당시의 신문에 따르면, "6개월동안 도둑을 보지 못하여, 서양인들도 탄복했다"고 한다. 반년만에, 천진은 외국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경찰제도를 가진 도시"로 거듭난다. 그리고 당시의 정부와 매체에서 띄워주는 바람에 조병균이 만든 현대경찰제도는 중국각 성으로 보급되고, 그 효과는 아주 좋았다.

 

당시 타임즈의 모리슨이라는 기자는 친히 목격한다. 북경의 대로에서 경찰이 똥차를 밀고 가는 늙은이를 도와주는 모습을. 그리고 쓰러진 수레를 세우도록 도와주는 모습을. 정말 뇌봉(雷峰)과 같은 인물인 것이다. 또 다른 사건에서 한 독일병사가 몰고가는 마차가 길을 막고 있으면서, 지휘에 따르지 않았다. 경찰은 경찰호루라기를 불면서 그를 잡아가서 경찰서로 압송한다. 모리슨은 보도에서 이렇게 적었다: "과거의 대청제국에서 네가 이런 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원세개의 영명한 영도하에, 조병균은 이런 일을 잘 처리하여 국내외인사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나중의 사학계에서도 광범위하게 호평을 받는다. 이를 보면 역사인물을 평가할 때 함부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해혁명이 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원세개는 신해혁명의 과실을 훔치기 위하여, 청황제 부의를 핍박하여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임시대총통의 직위를 차지한다. 이 기간동안, 조병균은 최대한의 능력을 다하여 원세개를 도와준다. 먼저 내각 전체가 사직하겠다고 국민대회의 왕공귀족을 위협하고 나중에는 융유태후를 겁준다. 남경혁명당인측에서 보내온 "환영전사(歡迎專使)" 채원배가 와서 원세개를 영접할 때, 조병균은 다시 여론을 퍼트려 쿠데타를 선동한다. 일시에 북경은 혼란에 빠지고, 원세개를 이를 이유로 남하를 늦춘다.

 

원세개가 취임한 후, 조병균은 내무부총장에 임명된다. 1912년 육징상(陸徵祥)이 내각총리직을 사임한 후, 조병균이 육징상의 자리를 이어 대리총리가 된다. 육징상이전의 총리는 당소의(唐紹儀)이다. 나중에 원세개와의 갈등이 날로 격화되어 원세개가 해임한다. 1912년 9월 5일, 조병균은 정식으로 중화민국 제3대 국무총리에 오른다.

 

송교인을 암살하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원세개라는 사람은 그저 공화의 깃발만 흔들었지, 전제의 길을 걸었다. 혁명당인과의 갈등이 날로 두드러지면서 혁명당인들도 점점 원세개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하게 된다.

 

1913년초, 국회선거가 끝나고, 국민당이 두각을 나타낸다. 중참양원에서 392석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국민당은 다수당의 지위로 책임내각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대리이사장 송교인(宋敎仁)은 내각총리를 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총통 원세개가 대권을 독점하는데 최대의 정적으로 떠오른다. 원세개는 즉시 엉덩이에 종기가 난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사람을 보내어 송교인에게 50만위안의 은행수표를 보낸다. 그리고 모자라면 더 주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누가 알았으랴 송교인은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남하하여 경선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돈으로 매수할 수 없다면, 원세개는 사악한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심복인 조병균에게 "훼송(毁宋)"을 지시한다. 조병균은 다시 내무부비서인 홍술조(洪述祖)에게 지시한다. 홍술조는 명의상으로는 내무부비서이지만, 실은 원세개의 특무두목이었다. 홍술조는 명을 받은 후, 상해의 응계형(應桂馨)을 찾는다. 응계형은 강호에서 구른 인물로 여원홍(黎元洪)에게 지명수배당한 바 있다. 그리하여 혁명당인들에 대하여 그다지 호감이 없었다.

 

조병균은 이 비밀을 가지고 응계형을 매수한다. 그를 강소 주상해 순찰장에 임명한다. 현재의 주인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데 어찌 그를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응게형은 명령을 받은 후 돈만 보지 염왕도 신경쓰지 않는 무사영(武士英)을 매수한다. 모든 일을 처리해놓은 후 음모가 상연된다. 

 

1913년 3월 20일 저녁, 송교인은 상해를 출발하여 북경으로 간다. 10시 40분에, 기차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던 송교인은 돌연 흉수의 저격을 받는다. 몸에 총알 3발을 맞는다. 그후 흉수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진다. 배웅을 나왔던 황흥(黃興)등은 즉시 송교인을 자동차에 태워 부근의 호녕철로의원으로 보낸다.

 

의사는 즉시 수술을 하여 총탄을 끄집어낸다. 총탄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송교인의 상세는 아주 위중했다. 위독할 때, 송교인은 황흥 등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살 수가 없다. 여러분은 종이와 붓을 가져와서 나를 대신하여 유전(遺電)을 써달라." 유전에서 그는 원세개가 "성심을 다해서, 공도를 행하고, 전력을 다하여 민권을 보장해줄 것"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 다음 날 새벽 4시, 송교인은 사망한다. 나이 겨우 31살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진 후, 거국적으로 비분에 빠진다. 흉수를 붙잡아 엄벌하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날 오후, 어떤 사람이 송교인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원세개에게 보고한다. 원세개는 놀라는 것을 가장하며, "그런 일이 있는가?"라고 말한다. 전보를 보고는 다시 말한다: "확실하구나.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는 다시 고양이가 쥐를 생각해주는 것처럼 현상금 1만위안의 돈을 내걸고, 기한내에 흉수를 붙잡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무원으로 하여금 최대한 우대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한다. 그외에 병력을 보내어 황흥 혁명당인을 "잘 보호하고 신중히 하라"고 한다. 그리고 유언비어를 퍼트려 국민당의 내분때문이라고 말한다.

 

원세개는 자신의 이 오스카남우주연상을 받을만한 연기로 만천과해(瞞天過海)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겨우 이틀 후, 즉 3월 23일, 골동서화상 왕아법(王阿法)이 영국조계의 순포방으로 와서 이렇게 보고한다: "1주일 이전에 서화를 팔기 위하여 순사장 응계형의 집으로 갔는데, 응계형은 사진 한 장을 내놓으며 그가 사진의 사람을 처리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보수로 1000위안을 내놓겠다고 했다. 왕아법은 당시에 감히 응락하지 못했다. 송교인이 암살당한 후에 각 신문에 게재된 송교인의 사진을 보니 그가 본 사진과 같았다. 그래서 신고하는 것이다."

 

이 단서에 따라, 그날로 응계형을 체포한다. 다음 날 다시 무사영을 체포하고, 5발짜리 권총도 압수한다. 또한 홍술조, 조병균과 주고받은 전보도 찾아낸다. 이때의 원세개, 조병균은 바늘방석에 앉은 것같았고, 온갖 수법을 써서 부인했다.

 

4월 16일, 응계형, 무사영이 상해지방감찰청에 구속되어 있었는데, 얼마후 무사영이 응계형의 독수를 맞아 감옥에서 사망한다. 응계형은 여유롭게 감옥에서 귀빈생활을 보낸다.

 

조병균은 계속하여 부인했고, 의사진단서를 내놓고 병을 핑계로 휴가를 내고 법정에 출석하지 않는다. 그후에도 계속하여 휴가를 보낸다. 이렇게 하니 원세개도 골치아파졌다. 7월 16일 조병균의 사임을 허락하고, 단기서(段祺瑞)를 대리총리로 임명한다.

 

자신의 주군 손에 죽다.

 

1914년초, 원세개는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한다. 응계형은 하늘높은 줄 모르고 원세개에게 '훼송'에 대한 약속을 지켜달라고 요구한다. 드러내놓고 관직과 돈을 요구한 것이다. 이렇게 하자 원세개는 분노하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비밀리에 죽여버린다.

 

조병균이 이 일의 막후지시자가 원세개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서, 비분을 감추지 못한다. 분노로 가득 차서 원세개에게 전화를 건다: "응계형이 이렇게 죽는다면, 이후에 누가 대총통을 위하여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원세개는 그저 몇 마디 적당히 응대하고서 전화를 끊는다. 이 건의 여론은 속속 창끝을 조병균에게 향했다. 그가 응계형을 죽인 주모자라는 것이다.

 

조병균은 스스로 장래 원세개의 독수를 당할 것이라고 느껴져서 탄식하며 말한다; "천하에 살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사람을 얼마나 죽일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피살당할 때가 멀지는 않았구나!" 과연, 2월 26일 저녁, 조병균은 천진의 독서(督署)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원세개가 매수한 요리사가 독을 넣은 음식을 먹고, 화장실에 쓰러져 칠공에 피를 흘리며 죽었다.

 

이전에, 원세개는 조병균에게 직예민정부장을 겸직하게 한 적이 있다. 그가 죽은 후에 원세개는 안타깝다는 입장을 거짓으로 나타내며, "창회양좌(愴懷良佐)"라는 글을 내린다. 만련은 "필시성업추고의(弼時盛業追皋宜), 광하수훈무관소(匡夏殊勳懋管蕭)"라고 쓴다. 28일 육군상장의 예로서 우대해준다. 주가보(朱家寶)와 차남 원극문(袁克文)을 천진으로 보내어 조문하게 한다. 3월 22일, 원세개는 다시 조병균의 제문9祭文)에서 이렇게 적는다: "탈아양좌(奪我良佐), 문악경소(聞噩驚召), 상세염공(傷勢念功), 지금욱도(至今郁陶)" 이렇게 천하인의 이목을 가리려 했다. 1915년 12월 12일 원세개는 황제에 오른다. 이 때도 연속극을 이어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22일 정사당에 "황제책령"을 모시고, 조병균을 "일등충양공(一等忠襄公)"에 추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병균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어렵사리 하층민의 역습을 실현했다. 그는 확실히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주를 나쁜 곳에 썼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이다. 전전긍긍하며 주인을 위하여 각종 죄행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주인의 암산을 당한다. 이전에 쌓은 현대경찰제도건립의 명성도 이로 인하여 모조리 까먹게 되고,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게 된다. 오늘날 사람들도 이를 거울로 삼아, 그 전철을 되밟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