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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20

[황자쟁위술] 이퇴위진술(以退爲進術) – 후발제인패(後發制人牌) 이런 말이 있다: “고개내민 새가 총을 맞고(槍打出頭鳥), 솟아나온 나무가 바람에 쓰러지고, (風摧秀林木), 튀어나온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露頭椽子先腐朽).”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면 위험이나 곤란에 처하는 경우에 혼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휘주를 .. 2015. 7. 27.
[황자쟁위술] 여론제조술(輿論製造術) – 신화이기패(神話利己牌) 주(周)왕조때부터 군왕이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天子)”로 칭한 후, 황제가 되려는 자들은 스스로 ‘천명(天命)’을 받았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리하여, 진승오광의 난, 백련교의 난, 태평천국의 난과 같은 실패한 혁명에서부터 유방, 징기스칸, 조광윤, 주원장, 누르하치등 각 왕조의 .. 2015. 7. 27.
[황자쟁위술] 투량환주술(偸梁換柱術) – 교조모위패(矯詔謀位牌) <사기.진시황본기>에 보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신하들에게 제도를 정하게 명하고, 승상 위관, 어사대부 풍겁, 정위 이사는 백관들과 협의한 후, “….황제의 명은 제(制)로, 황제의 영은 조(詔)로 한다.”는 원칙을 정한다. 그 후 황제의 영은 “조서(詔書)”라 부르고, 특히 그 .. 2015. 7. 27.
[황자쟁위술] 애옥급조술(愛屋及鳥術) - 교타황손패(巧打皇孫牌) "적자사(嫡子死), 입적손(立嫡孫)". 적장자승계원칙이 유지되던 중국고대에 적자가 죽으면 적손을 세우는 것이 봉건예제의 원칙중 하나였다. 상(商)왕조때 태갑(太甲)이 태정(太丁)의 아들이며 탕왕(湯王)의 적손으로 왕위를 승계한 것이 그 효시이다. 다만, 중국 고대역사상 황태손(皇太.. 2015. 7. 27.
강희제의 죽음: 함한졸사(含恨猝死) 글: 유아독존(惟我獨尊) 강희제의 죽음에 대하여 역사상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일설에는 병사했다고 하고, 일설에는 독살당했다고 한다. 필자는 강희제의 팔대손 김항원(金恒源) 선생은 강희제의 사인을 새로 논증하였다. 그는 강희제가 '함한졸사'했다고 하였다. 급사한 직접적인 원인.. 2015. 3. 26.
홍루몽 작가의 수수께끼 글: 위석아(危石兒) <홍루몽>은 중국고대4대명저 중 하나이고, 중국고전소설중 성취의 최고봉이며, 현실주의창작의 가장 우뚝선 기념비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조설근(曹雪芹)이 <홍루몽>의 주요작가여야 한다. 그는 전체 소설의 전80회를 썼으며, 고악(高鶚)이 후40.. 2014. 10. 24.
옹정제는 왜 동복(同腹) 동생과 사이가 나빴을까? 글: 우좌(于左) 옹정제의 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의 신분이 가장 특수하다. 그는 바로 십사아거(十四阿哥) 윤제(胤禵)이다. 옹정제는 모두 2명의 동모(同母) 동생을 두었다. 육아거(六阿哥) 윤조(胤祚)는 요절해서 윤제만이 유일하게 배같은 동생으로 남았다. 이치대로라면, 형제 두 사람.. 2014. 4. 4.
강희제의 마지막 하루 글: 진령신(陳令申) 강희61년(1722년) 십일월 십삼일저녁, 일대명군 강희황제가 마침내 기나긴 인생을 끝마치고, 북경 창춘원(暢春園)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서의 기록을 살펴서, 강희제의 마지막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청성조실록>>에 따르면 강희61년.. 2010. 12. 25.
롱커도(隆科多): 강희제 유조의 유일한 목격자 글: 서항걸(徐杭杰) 강희제 말년에 후계자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여러 황자(皇子)들은 형제의 정은 일찌감치 잊어버렸고, 독랄한 수단을 속속 사용했다. 강희제가 유조(遺詔)를 남겼는가 아닌가? 그는 정말 황사자(皇四子)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는가? 유조는 고쳐진 적은 없는가? 강희제처럼 영명한.. 2009. 11. 20.
옹정제(雍正帝)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1) 강희제의 유조(遺詔) 강희제의 사후, 옹정제의 즉위에 관련된 이야기는 중국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가장 재미있는 황권다툼이라고 할 수 있다. 강희제는 종전에 차기 황제를 정하지 아니함으로써 야기된 문제를 고려하여, 황태자를 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만주족들은.. 2005.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