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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50

촉한(蜀漢)의 멸망에 책임있는 4명의 인물은...? 글: 초급칠품소지마관(超級七品小芝麻官) 촉한의 멸망을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 잘못을 유약하고 무능한 유선(劉禪)의 책임으로 돌린다. 왜냐하면 유선이 투항명령을 하달했기 때문이다. 그외에, 또 어떤 사람은 촉한멸망의 원인을 제갈량(諸葛亮)에게서 찾는다. 제갈량이 여러번에 걸쳐서 북벌하였기 때문에 촉한의 국력을 대거 소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촉한을 심연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제갈량도 아니고, 유선도 아니다. 진정한 책임자는 기실 다음의 네 사람이다. 그 네 사람이 누구인지 당신은 알겠는가? 모든 촉군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확실히 유선이다. 다만 당시의 유선은 기실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었던 것이다. 등애(鄧艾)가 면죽(綿竹)을 함락시킨 후, 전체 촉한의 조정은 이미 아무도 감히 싸우자.. 2023. 5. 15.
조자룡의 장판파(長板坡)전투 전설들..... 글: 기사석금(記史惜今) 수백년동안, 삼국이야기는 역사에서 소설, 다시 민간이야기를 거치면서 변화해왔다. 당양(當陽)은 일찌기 삼국시대의 고전장(古戰場)으로서, 자연히 여러 민간이야기로 전해내려오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정사(正史), 연의(演義, 소설)의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현지 민중들의 상상력까지 보태지면서, 현지의 산 하나 물 하나, 풀 하나 나무 하나, 민속풍정까지 모두 신화같은 전설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 파란만장한 역사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처럼 고토(故土)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여러 이야기는 모두 해당 지방의 특색을 띄게 되었고, 많은 에피소드와 인물이미지는 적지 않게 바뀌게 되었다. 정사기록인 의 이와 관련된 부분은 짧은 몇 마디에 불과하다: "그리고 선.. 2023. 4. 5.
하후패(夏侯覇)의 인생궤적 글: 흑미애여행(黑米愛旅行) 삼국시대 여러 명장들 중에서, 하후패는 비교적 특별한 존재이다. 먼저, 그는 하후연(夏侯淵)의 차남이고, 조씨(曹氏)와 하후씨(夏侯氏)의 관계 및 하후연이 전장에서 사망하여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공로로 인하여, 하후패는 조조(曹操), 조비(曹丕), 조예(曹叡)시기에는 비록 크게 뜨지도 않았지만, 조상(曹爽)이 집권한 기간동안에는 점차 중용되게 된다. 다음으로, 장비(張飛)의 처는 하후패의 당매(堂妹)이다. 그래서 그는 촉한의 후주인 유선(劉禪)의 외숙이 된다. 고평릉사변후 사마의(司馬懿)가 군대내의 조씨세력을 몰아낼 때, 하후씨는 가장 먼저 제거대상이 된다. 우장군(右將軍) 하후패는 그리하여 전선에서 촉한으로 도망친다. 하후패의 이런 인생경력은 삼국시대에 유일무이한 경우.. 2022. 11. 29.
제갈량은 제1차북벌에서 얼마나 참담하게 패배했을까?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삼국때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로서 유비가 전투, 치국, 평천하에서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다. 제갈량을 얻은 후, 유비는 보물을 얻은 듯 기뻐했고, 속이 좁은 관우의 불만을 초래하게 된다. 유비는 임종때 탁고(托孤)할 때, 제갈량은 여전히 그를 위해 촉국을 지켜줄 유일한 후보자였다. 비록 그는 제갈량에 대하여 마음을 높지 못하는 점이 있기는 했지만, 조정과 아들을 제갈량에게 맡겨야 했고, 여기에 이엄과 조운으로 하여금 제갈량을 감시하여 유선과 촉한강산을 보호하게 했다. 다행히 제갈량은 확실히 그가 유비에게 약속한대로 일을 했다. 충성을 다하면서, 유비가 실현하지 못한 이상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유선을 위해 천하를 얻으려 했다. 자신이 죽은 후 능력이 부족한 유선.. 2022. 8. 18.
"이사쟁공(二士爭功)": 위나라가 촉과 오를 멸망시킨 후 왜 두 공신의 다툼이 일어났을까? 글: 역사대학당(歷史大學堂) 삼국시대 말기에 사마소(司馬昭)가 주도한 조위(曹魏)가 촉한(蜀漢)을 멸망시키는 전쟁이 성공한 후, 종회(鍾會)와 등애(鄧艾) 두 공신간에 서로를 공격하는 '이사쟁공'의 비극이 일어난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고, 오늘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뿐아니라, 사마소의 아들인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주도한 서진(西晋)이 동오(東吳)를 멸망시키는 전쟁에 성공한 후, 다시 한번 두 공신 왕혼(王渾), 왕준(王濬)간에 서로 반목하여 원수가 되어 다시 '이사쟁공'의 일막이 벌어진다. 유사한 상황이 유사한 과정을 거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 사마씨가 주도하는 촉과 오를 멸망시키는 전쟁이 성공한 후, 항상 공신.. 2022. 7. 26.
제갈량 vs 이엄 (3): 촉국 인재고갈의 원인이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230년, 이엄은 제갈량에 의해 한중으로 옮겨가고,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를 관리한다. 231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기산을 나선다(제4차북벌). 이엄은 양초의 운송을 책임진다. 이번 북벌은 제갈량과 사마의가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였다. 구체적인 전황은 여기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여름,가을이 교체하는 시기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양식운송이 되지 않았다. 이엄은 참군 마충, 독군 성번을 보내 제갈량에게 철군하도록 말을 전한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철군한다. [의사리] 이엄이 제갈량에게 철군을 통지하였다는 내용의 원문은 이러하다: "평견참군호충(平遣參軍狐忠) 독군성번유지(督軍成藩喩指), 호량내환(呼亮來還)" 여기의 유지(喩指)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이엄이 후주 유선의 뜻이라고 .. 2022. 3. 9.
제갈량 vs 이엄 (2): 양자간의 싸움 글: 의사리(衣賜履) 이엄은 원래 유장(劉璋)의 사람이었는데, 유비가 익주를 쳐들어왔을 때, 이엄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그리하여 유장에게 큰 타격을 준다. 유비는 이엄을 크게 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그후, 유비는 이엄을 보내 유봉(劉封), 맹달(孟達)을 따라 상용군(上庸郡, 호북성 죽산현 서남의 전가패)을 공격하게 했다. 그후 이엄은 건위군(사천성 팽산현) 태수에 부임하고, 이어서 두 건의 반란을 평정한다. 이는 그가 상당한 군사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 따르면, 이엄과 제갈량, 법정, 유파, 이적(伊籍)의 다섯 명은 공동으로 촉한정권의 법령을 정비했다. 이는 이엄이 법률전문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법정은 220년에 사망한다. 그렇다면 이엄은 개략 건위군태수의 직위에서, 겸직으로.. 2022. 3. 8.
제갈량 vs 이엄 (1): 이엄축출사건의 수수께끼 글: 의사리(衣賜履) [의사리]: 제갈량의 제4차북벌은 의 기재에 따르면, 위나라병사 3천여명을 참살하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장합(張郃)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군량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철군하게 된다. 비록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한중(漢中)으로 돌아온 후, 제갈량이 한 첫번째 조치는 논공행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논공행상을 전혀 하지 않았고, 당초 그와 함께 유비에게 백제성에서 탁고(託孤)를 받았던 2인자 이엄(李嚴)을 관직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아주 이상하다. 이엄이 축출된 이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역사가들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를 몰랐다. 예를 들어,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엄의 거동은 어쨌든 지나치게 괴류(乖謬)하여 상정(常情)에 부합하.. 2022. 3. 7.
위,촉,오 삼국의 승상제도는 어떻게 달랐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삼국이 정립된 후, 가장 먼저 건국하여 황제를 칭한 위(魏)는 승상을 두지 않는다. 그후에 건립된 촉(蜀)과 오(吳)는 처음부터 승상을 둔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오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승상을 두었지만, 촉한은 제갈량이후에 더 이상 승상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위나라. 건안13년 조조가 승상에 오른다. 건안18년에 이르러 조조는 위공(魏公)이 되고, 기주(冀州)내의 10군은 그의 봉지가 된다. 두달 후, 조조는 위나라의 종묘사직을 건립하고, 십일월에 이르러, 상서(尙書), 시중(侍中)과 육경(六卿)을 설치한다. 원래 건안연간에, 조정백관은 모두 조조의 말을 들었고, 승상이 되었으며, 승상부를 두며, 모든 정령은 승상부에서 나왔다. 조조.. 2021. 10. 19.
유선이 장비의 두 딸을 취하면서, 관우의 딸은 취하지 않은 이유는...? 글: 지역사(知歷史) 아마도 유선(劉禪)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이릉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유비(劉備)는 일생동안 4명의 아들을 두었다. 각각 유선, 유봉(劉封), 유리(劉理), 유영(劉永)이다. 그런데, 유비는 굳이 성격이 유약한 유선에게 황위를 넘겨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비의 이런 결정을 기이하게 여긴다. 유비는 왜 그렇게 하였을까? 기실 사서 에는 이미 명확하게 답을 제시해 놓았다. 유비의 유조(遺詔)에는 일찌기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제갈량이 예전에 사원의 앞에서 유선이 지혜도 있고 도량도 있다고 칭찬한 바 있는데, 사원은 그 말을 유비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유비는 비로소 유선을 후계자로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비는 일생동안 제갈량을 신임했고, 그는.. 2020.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