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대작회
유비에게는 감부인(甘夫人), 미부인(糜夫人), 손부인(孙夫人)과 오황후(吴皇后) 네명의 부인이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료의 기재를 보면, 유비의 부인은 이 네명만이 아니다. 칭제이후에 몇명의 비빈을 들였는지에 대하여는 정사에서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아 통계를 내기 어렵지만, 여기에서는 유비가 칭제이전에 몇명의 부인을 거느렸는지를 알아보자. 네 명은 훨씬 넘고,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열명은 넘을 것같다. 아래에서 차례로 살펴보겠다.
<삼국지>: "선주(先主, 유비를 가리킴)의 감황후. 패(沛)의 사람이다. 선주가 예주(豫州)에 있을 때, 소패(小沛)에 살았는데, 그때 첩으로 거두었다. 선주는 적실(嫡室)이 여러번 죽어서, 그녀가 항상 집안일을 관장했다(常摄内事)"
<삼국지>: "여포가 선주의 처를 붙잡아가서, 선주는 해서로 군대를 돌렸다."
<삼국지>: "선주가 광릉 해서로 군대를 돌렸고, 미축(糜竺)은 여동생을 선주의 부인으로 바쳤다."
이들 기재를 통해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유비가 감부인을 첩으로 들인 것은 194년이라는 것이다. 도겸의 추천으로 유비가 예주자사가 되어 소패에 주둔했으며, 이때는 아직 유비가 서주로 들어가지 않은 때이다. 둘째, 유비가 여포에게 기습을 당해 서주를 잃은 후 비로소 미부인을 들였다. 그러므로 미부인이 감부인보다 뒤에 부인이 된다. 셋째, 유비가 감부인을 들이기 전에 이미 결혼을 했고, 그것도 여러번 했다. 다만 이전의 정실부인(최소한 3명)은 모두 죽었다.
그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포가 붙잡아갔다가 돌려준 부인은 분명 유비의 정실부인이 아니고, 감부인 이전의 첩실일 것이다. 만일 그녀가 정실부인이라면, 감부인이라는 첩이 "항상 집안 일을 관장"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삼국지>: "유리(刘理)의 자는 봉효(奉孝)이다. 역시 후주(后主, 유선을 가리킴)의 서제(庶弟)이다. 유영(刘永)과는 모친이 다르다"
양자로 들인 장남 유봉(刘封)을 제외하고, 유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각각 유선(刘禅), 유영과 유리이다. 유선은 감부인이 낳았고, 유영과 유리는 서자이다. 그리고 둘은 동부이모형제이다. 즉 유비의 세 친아들은 생모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다만 사료에 미부인, 손부인과 오황후가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유비에게는 또 다른 두 명의 지위가 높지 않은 소첩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년 유비가 형주목 유표에게 의탁하고, 얼마후에 양자 유봉을 들인다. 207년 유선이 태어나고, 감부인은 "나중에 죽어서, 남군에 묻혔다." 이를 보면, 감부인은 유선을 낳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최소한 211년 유비가 사천으로 들어오기 전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형주의 남군에 묻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영과 유리는 유선의 동생들이다. 그래서 개략 감부인이 죽고 나서 유비와 손부인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으므로, 유비가 형주에서 최소 2명의 소첩을 들였고, 각각 유영과 유리를 낳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계산하면 유비에게는 10명의 부인이 있는 것이다. 각각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 오황후, 감부인이전의 3명의 정실부인과 1명의 소첩, 그리고 유영과 유리의 생모들.
사실상 아마도 이들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비는 161년에 태어났고, 194년 감부인을 첩으로 들였을 때 이미 서른몇살의 장년이었다. 이전의 정실부인도 최소 3명이다. 소첩으로 여포가 붙잡아간 그 한명뿐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지>: "형주로 나가서 유비를 장판까지 추격했고, 그의 두 딸과 물자를 얻었으며, 그의 병사들을 거두었다."
장판파전투에서 호표기통령 조순은 유비의 두 딸을 포로로 잡는다. 이 두 딸은 감부인이나 미부인 소생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소첩이 낳은 것이다. 그외에 유비는 형주에서 오랫동안 편안하게 지낸다. 거둔 소첩이 유영과 유리의 두 생모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정사의 약간의 기재를 가지고 결론을 내려보자면, 유비는 칭제하기 전에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 오황후의 네 부인 외에 가장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최소한 10명의 부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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