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초급칠품소지마관(超級七品小芝麻官)
촉한의 멸망을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 잘못을 유약하고 무능한 유선(劉禪)의 책임으로 돌린다. 왜냐하면 유선이 투항명령을 하달했기 때문이다. 그외에, 또 어떤 사람은 촉한멸망의 원인을 제갈량(諸葛亮)에게서 찾는다. 제갈량이 여러번에 걸쳐서 북벌하였기 때문에 촉한의 국력을 대거 소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촉한을 심연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제갈량도 아니고, 유선도 아니다. 진정한 책임자는 기실 다음의 네 사람이다. 그 네 사람이 누구인지 당신은 알겠는가?
모든 촉군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확실히 유선이다. 다만 당시의 유선은 기실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었던 것이다. 등애(鄧艾)가 면죽(綿竹)을 함락시킨 후, 전체 촉한의 조정은 이미 아무도 감히 싸우자는 사람이 없었다. 촉한의 조정신하들중에는 도망칠 사람은 도망쳤고, 아니면 투항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유선이 어떻게 계속 저항할 수 있었겠는가?
많은 사람들은 유선은 황제이므로, 그가 명령만 내렸더라면 조정신하들도 부득이 저항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본질을 아예 모르는 것이다. 권력은 겉으로 보기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같지만, 실제로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아랫사람이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촉한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전쟁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설사 유선이 전투명령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유선을 생포하여 적에게 바쳐서 상을 받으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당시의 유선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놓여진 선택은 두 가지였다. 도망가거나, 투항하거나. 유선은 그 중에서 투항을 선택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도망갔다면 최후가 더욱 비참했을 것이기 때문에.
다시 제갈량을 보자. 많은 사람들은 제갈량의 북벌은 실질적인 진전도 이루지 못하면서 촉한의 국력을 헛되이 낭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제갈량이 매번 북벌할 때마다 여러해를 쉬고서 일으킨다. 즉, 제갈량은 국력을 헛되이 낭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제갈량의 북벌은 기실 적지 않은 전과도 거두었다. 정면대결에서, 사마의(司馬懿)는 전혀 제갈량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명장이라는 장합(張郃)도 제갈량에게 죽임을 당한다. 만일 제갈량이 좀더 살았더라면 아마도 촉한은 조위를 격패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해서, 유선과 제갈량은 모두 촉한멸망의 최종책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책임자는 다음의 네 사람이다.
4위: 미방(糜芳)
한중전투이후 기실 유비집단의 실력은 이미 동오를 은연중에 넘어섰다. 정면전투에서 황충(黃忠)은 조위의 총사령관 하후연(夏侯淵)을 참살하였을 뿐아니라, 조조군대를 궤멸시켰다. 그리고 유비도 처음 정면으로 싸워 조조를 격퇴시키고 조조의 손에서 한중이라는 영토를 빼앗았다. 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성과이다.
한중전투는 이미 적지 않은 사가들에 의하여 촉한굴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후의 양번(襄樊)전투에서 관우는 수엄칠군(水淹七軍)하고 우금(于禁)을 포로로 잡고, 조인(曹仁)이 감히 성밖으로 나와 싸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더더욱 촉군의 육상전투력이 이미 조군보다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관우의 수중에는 강력한 수군도 있었다. 이는 더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유비집단이 곧 굴기할 것이고, 동오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들었다. 바로 이런 원인때문에, 손권은 맹약을 위배하고 관우를 기습하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사실상, 일찌기 관우가 조조의 군대를 칠 때, 그는 이미 동오의 기습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그가 보기에, 자신이 수년동안 경영해온 형주(荊州)를 동오가 신속히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동오의 기습소식을 듣고 신속히 군대를 돌려 지원해주면 형주에 큰 문제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유비의 처남인 미방이 중요한 순간에 적에게 투항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스스로 강릉의 견고한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관우의 후방이 철저히 무너져 버리게 된 것이다.
강릉은 관우의 형주에서의 본거지였다. 그의 모든 양초(糧草)와 물자, 병졸들의 가족이 강릉에 있었다. 이 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관우가 여하한 군수물자지원도 받을 수 없을 뿐아니라, 군심이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결국 관우는 패배하고, 맥성에게 포로로 잡힌 후 피살당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미방의 투항으로, 관우는 패전하고 죽게 되었다. 바로 미방의 투항은 철저히 촉한의 상승분위기를 꺽어버렸고, 촉한의 중원통일의 꿈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만일, 미방이 적에게 투항하지 않았더라면, 형주는 잃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고, 유비가 한중에서 북벌하고, 관우가 형주에서 북벌하면 조위는 반드시 패배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촉한을 멸망으로 이끈 첫번째 책임은 바로 미방에 있다.
3위: 마속(馬謖)
미방의 투항은 직접적으로 촉한의 상승을 꺽어버렸다. 그러나 제갈량에 있어서, 앞길이 아무리 험하더라도 가야만 했다. 한실(漢室)을 부흥시키려는 목표는 바뀔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해동안 힘을 축적해서 북벌을 감행한다. 이번 북벌에 조위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당시의 조위의 사람들은 촉한이 대외확장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동오를 상대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갈량이 돌연 북벌을 감행한 것이다. 이는 조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방비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성공적으로 농우(隴右, 감숙동부)까지 쳐들어갔고, 농우의 대부분 군현은 이미 촉한에 투항했다. 이어서 농우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고나면, 제갈량은 양주(凉州)의 전마를 차지하고 실력을 한단계 더 확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때 조위의 명장 장합이 빠르게 달려와 농우를 지원할 준비를 한ㄷ나. 그리하여 제갈량은 마속을 보내어 가정(街亭)에서 장합을 막아, 위군의 진격을 늦추게 했다. 누가 알았으랴. 마속은 제갈량의 지휘를 듣지 않고, 길을 막는 곳에 군영을 설치하지 않고, 산 위로 올라가서 군영을 세웠다. 결국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이렇게 가정을 잃으면서, 위군은 언제든지 촉군의 후로(後路)를 위협할 수 있게 된다. 제갈량은 어쩔 수 없이 이미 얻어놓은 성과를 포기하고 낭패한 모습으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승기를 잡았던 제1차북벌이 이렇게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후 여러차레 북벌을 감행하지만, 제갈량은 더 이상 이때처럼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한다. 결국 오장원(五丈原)에서 쓰러지고 유감을 안고 세상을 떠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마속이 지휘를 듣지 않음으로 인하여, 가정을 잃게 되었고, 이렇게 하여 제1차북벌이 실패로 끝난다. 이로 인해 촉한의 가장 성공적이었던 북벌작전이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후 촉한은 다시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되고, 조위를 격패시키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2위: 제갈첨(諸葛瞻)
제갈첨은 제갈량의 아들이다. 그래서 촉한의 대부분 사람들은 제갈첨에게도 제갈량의 재능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갈첨은 전혀 제갈량처럼 대단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실전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등애가 촉으로 쳐들어 올 때, 기실 촉한의 조정은 아직 싸울 생각이었다. 다만 제갈첨은 부하의 건의를 전혀 듣지 않고,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지 않고 시간만 끌었다. 그리하여, 등애의 부대가 손쉽게 성도평원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등애와 교전할 때, 제갈첨은 성을 지키는 것이 유리함에도 스스로 성밖으로 나가서 전투를 벌인다. 그리하여 결국 촉군이 대패하고, 성도평원에서 전투가능한 마지막 부대를 그렇게 잃게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갈첨이 유리한 지형을 미리 확보하고, 스스로 성밖으로 나가서 싸우지 않고 시간을 끌었더라면, 촉한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왜냐하면 등애의 부대는 먼 곳을 달려왔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제갈첨은 실전경험이 너무 부족하여 결국 패배하고 만다. 그가 이렇게 패배함에 따라, 조정의 주전파(主戰派)들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모두의 생각이 도망치는 것이나 투항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 유선이 투항하게 되는 것이다.
1위: 초주(譙周)
초주는 촉한 최대의 투기분자이다. 유비가 성도를 공격할 때, 초주는 유장(劉璋)에게 투항을 권한다. 등애가 성도를 공격할 때, 다시 초주는 유선에게 투항을 권한다. 실로 인간축에도 끼지 못하는 자이다.
사실상, 초주는 전형적인 투항파이다. 일찌기 제갈량이 사망하고나자 초주는 이미 투항할 생각을 한다. 자신의 투항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받도록 하기 위하여, 초주는 <구국론(仇國論)>이라는 글을 쓴다. 사람들에게 이 글을 통하여 촉한은 조위의 적수가 되지 않으니, 일찌감치 투항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퍼트린다.
초주의 이런 고혹하에,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사람들은 대체로 촉한은 조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모두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조정의 많은 신하들마저도 이런 생각을 갖게 된다. 등애가 촉으로 쳐들어온 후, 손쉽게 도성 아래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당시 유비는 얼마나 강했던가. 그런데도 그가 성도를 함락시키는데 3년이 걸렸다. 이를 보면, 이때 촉한의 인심이 이미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투는 인심이 향방을 정한다. 누구든 끝까지 버텨내면 그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초주는 촉한의 인심을 와해시켰다. 그가 촉한멸망의 최대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누가 져야할 것인가.
결론
결론적으로, 촉한을 멸망으로 이끈 책임은 제갈량도 아니고, 유선도 아니다. 진정한 책임자는 기실 이들 네명이다: 미방, 마속, 제갈첨, 초주. 그중 초주의 책임이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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