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이사쟁공(二士爭功)": 위나라가 촉과 오를 멸망시킨 후 왜 두 공신의 다툼이 일어났을까?

중은우시 2022. 7. 26. 16:55

글: 역사대학당(歷史大學堂)

 

삼국시대 말기에 사마소(司馬昭)가 주도한 조위(曹魏)가 촉한(蜀漢)을 멸망시키는 전쟁이 성공한 후, 종회(鍾會)와 등애(鄧艾) 두 공신간에 서로를 공격하는 '이사쟁공'의 비극이 일어난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삼국연의>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고, 오늘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뿐아니라, 사마소의 아들인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주도한 서진(西晋)이 동오(東吳)를 멸망시키는 전쟁에 성공한 후, 다시 한번 두 공신 왕혼(王渾), 왕준(王濬)간에 서로 반목하여 원수가 되어 다시 '이사쟁공'의 일막이 벌어진다. 유사한 상황이 유사한 과정을 거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왜 사마씨가 주도하는 촉과 오를 멸망시키는 전쟁이 성공한 후, 항상 공신간의 다툼이 벌어졌을까?

 

종회 vs 등애: 두 계급간의 투쟁

 

종회와 등애의 "이사쟁공"은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간의 이익다툼이지만, 실제로는 위진시기 두 개의 서로 다른 계급간의 권력투쟁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한말에서 진초까지는 세가대족정치(世家大族政治)가 탄생하고 성숙한 시기라는 것을. 특히 삼국시대에 세가대족은 각 세력에 모두 중요한 존재였다. 유표(劉表)에게 형주(荊州)의 대족인 채씨(蔡氏), 괴씨(蒯氏)의 지지가 없었다면, 원소(袁紹)에게 하북의 대족 전씨(田氏), 최씨(崔氏)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아마도 한 지방의 강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영천순씨(潁川荀氏), 초퍠하후씨(樵沛夏侯氏)가 조조에게, 강회고씨(江淮顧氏), 육씨(陸氏)가 손권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도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시대에, 개인직업생애를 보면, 일반적으로 정치인물이 되는 과정을 보면 대다수가 가족의 연원으로 관료가 되고, 가족의 앞날을 위하여 열심히 분투했다. 이는 마치 가족의 역량을 자본으로 지분참여하는 것이지 사람이 인재시장에서 초빙에 응하여 취업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씨집단도 예외는 아니다. 위말진초에 사마씨를 지지하고, 따르며, 보좌하던 중요인물은 모두 사마씨와 대대로 교분이 있던 조위정권내의 명문대족들이다. 종회도 바로 이런 대족출신이다. 영천종씨(潁川鍾氏). 그의 부친인 종요(鍾繇)는 사마의(司馬懿)와 함께 위나라 신하로 있었으며 관계가 밀접했다. 종회의 형인 종육(鍾毓)은 사마사(司馬師)와 교분이 깊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종육이 조상(曹爽)에 반대하여 고평릉사변의 중요한 지지자로 취급되어 사마사, 사마소형제로부터 중시되었다. 가족관계의 덕을 보아, 종회는 젊은 나이에 요직에 앉는다. 30세때 이미 사마사의 중요한 모사가 되고, 나중에 사마소의 심복이 된다. 그는 "시지자방(時之子房, 지금의 장량이다)"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위진의 대다수 중신들이 명문집안출신인 것과는 달리, 등애는 출신이 미천했다. 그는 원래 양양성(襄陽城) 전농(典農) 속하의 둔전(屯田)하는 부민(部民)이었다. 그의 재능을 사마의가 발견하여 하급관리로 삼은 것이다. 비록 촉한과 싸우고, 관중을 경영하는 군사분야에서 공을 많이 세웠지만, 출신때문에 사마사형제는 시종 그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고, 그를 고굉지신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등애는 말을 더듬었고, 자신을 칭할 때 항상 "애애애(艾艾艾).."라고 계속 말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사마소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조롱했다: 경은 애애라고 하는데 몇애인가. 이는 사마씨가 등애를 어떻게 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점을 이해하면, 왜 나중에 촉을 멸망시키는 전투에서 총사령관을 종회가 맡았는지 알 수 있다. 군사경험이 풍부하고 위나라군대내에서 명망이 높던 등애가 맡지 않고. 또한 사마소가 자신의 주부(主簿) 사찬(師纂)을 보내 등애의 사마(司馬)로 삼고, 위관(衛瓘)을 지절로 보내 등애의 부대를 감시하게 했는지도.

 

사료기재에 따르면, 원래 위나라군대가 촉을 정벌하는 계획을 세울 때, 종회가 주력을 이끌고 낙곡, 사곡을 나가 한중을 취하며, 등애는 일부병력을 이끌고 답중(沓中)에서 강유(姜維)를 견제하며, 제갈서(諸葛緖)가 다른 일부병력을 이끌고 무가(武街)을 점령하여 강유의 퇴로를 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강유의 행동이 재빨랐고, 제갈서의 저지를 막은 후, 군대를 이끌고 검각(劍閣)에 주둔한다. 지리적인 이점을 안고 종회와 대치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등애는 원래 군대를 이끌고 종회와 합류하여 함께 한중을 쳐야 했는데, 그는 보고하여 승인을 받지도 않고, 음평(陰平)의 샛길로 칠백리 산지를 넘어, 일거에 면죽(綿竹)을 점령하고, 제갈첨(諸葛瞻)을 죽인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유선(劉禪)의 항복을 받아내어, 촉을 멸망시키는 최고의 공을 세운다.

 

그런데, 이후 그는 다시 독단적으로 행동한다. 등우(鄧禹)의 고사를 본받아 후주 유선을 표기장군(驃騎將軍)에 봉하고, 타재를 봉거도위(奉車都尉)에 임명하며, 여러 왕은 부마도위(駙馬都尉)에 임명한다. 등애의 행위는 비록 촉을 멸망시킨 공이 크기는 해도, 종회의 불만과 사마소의 의심을 불러오게 된다. 사마소는 특별히 위관을 시켜 등애에게 경고한다: "그런 일은 마땅히 먼저 보고해야 한다. 바로 시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등애는 신경쓰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사마소의 그에 대한 의심은 커지게 된다.

 

이 계기를 이용하여, 종회, 위관, 사찬은 공동으로 상소를 올린다. 등애가 '패역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등애는 사마소의 명에 의해 체포되어 낙양으로 압송된다. 다만,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등애가 비록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지만, 이는 전쟁기간동안의 임기응변적인 일처리이다. 그외에 특별히 과분해 보이는 점은 없다. 어떻게 보더라도 '패역'으로 감옥에 갇힐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사마씨집단의 핵심구성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가대족의 명사인 종회, 위관(위관은 하동위씨출신이다)등이 이구동성으로 등애를 비난하자, 사마소는 전혀 망설임없이 그를 붙잡아 넣은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종회, 위환은 촉을 멸망시킬 때 등애와 같이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들은 등애가 한 행위를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등애의 곁에서 등애의 행위를 잘 알고 있을 사찬도 헛소리를 하며, 종회, 위관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등애는 사마소시대에 이미 세가대족들에게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고 아주 가련한 처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사마소도 등애가 억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등애가 피살된 후, 그는 바로 심복 당빈(唐彬)을 농우(隴右)로 보내 등애의 부하들이 반발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렇기는 해도, 그는 등애의 명예를 회복시켜줄 생각은 없었고, 더더구나 나중에 반란을 일으킨 종회에 대한 처분보다도 훨씬 혹독했다. 종회는 단지 그의 아들 종의(鍾毅) 한명만 처형했고, 종씨집안의 나머지 구성원들은 모두 화를 면했고, 관직에 있던 자들은 면직되지도 않았지만, 가련한 등애는 위관에게 억울하게 피살된 후, 아들들이 모조리 주살되었을 뿐아니라, 그의 처와 손자들도 서역으로 유배된다.

 

이번 충돌에서, 원했던 원치 않았건 사마소는 자신과 관계가 더욱 밀접한 세가대족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며, 위나라를 대체하여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데 큰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사마씨집단의 안정을 위하여, 설사 큰 공을 세운 등애라 하더라도, 그는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해가 지난 후, 오나라를 멸망시킴으로 인하여 왕혼과 왕준간의 싸움이 벌어진다. 이는 거의 종회, 등애의 '이사쟁공'의 판박이이다. 익주(益州)에서 출병한 왕준은 진(晋)군의 전체적인 계획에 따라 왕혼 절도사의 지휘를 받지 않고, 자신이 장강의 강물을 타고 동으로 내려갈 수 있다는 이점을 이용하여 바로 건업(建業)으로 쳐들어가, 손호(孫皓)의 항복을 받아내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최고의 공을 세운다.

 

왕혼은 위진시대의 명문집안인 태원왕씨(太原王氏)이다. 부친 왕창(王昶)은 사마씨와 관계가 밀접했다. 그리고 왕준일가는 비록 포의한사(布衣寒士)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마시등 조위의 명문거족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왕혼은 왕준이 패역행위를 했다고 무고한다. 조정은 거의 모두 그의 말에 동조한다. 왕준을 경성으로 압송하여 심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진무제 사마염은 멍청한 황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서를 내려 왕준에게 지휘를 잘 듣고, 짐의 뜻을 어기지 말라는 등의 말만 했다.

 

사마염은 일부러 이 일을 덮어두고자 했지만, 조정신하들은 계속 왕준을 탄핵했다. 왕준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아서, 항상 조심했고,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반드시 경비를 세워 '제2의 등애'가 되지 않으려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동진초기에 개국명장들을 대거 봉하여 인심을 회유하였는데, 그때도 왕준의 후손은 기록이 없다. 이는 아마도 사마소가 등애를 엄벌한 것과 비슷한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기록에서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사마씨가 주도한 촉과 오를 멸망시킨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는 항상 "이사쟁공"의 비극이 발생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신들간의 이익다툼이지만, 실제로는 사마씨집단의 핵심지위를 차지한 세가대족의 자제들과 미천한 출신의 공신들간의 갈등과 충돌이다. 명문집안의 자제들은 하나로 몽쳐서 자신들과 출신이 다른 계층에 대하여 "당동벌이(黨同伐異)"를 시전했다. 이를 통해 가족세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인재의 상승을 내부에서 막는 방식은 서진이 정치적으로 활력을 잃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나중에 일련의 '동실조과(同室操戈)의 비극을 낳게 만든다. 더더구나 나중에 진무제가 죽은 후의 여러가지 재난적인 충돌의 화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