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기사석금(記史惜今)
수백년동안, 삼국이야기는 역사에서 소설, 다시 민간이야기를 거치면서 변화해왔다. 당양(當陽)은 일찌기 삼국시대의 고전장(古戰場)으로서, 자연히 여러 민간이야기로 전해내려오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정사(正史), 연의(演義, 소설)의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현지 민중들의 상상력까지 보태지면서, 현지의 산 하나 물 하나, 풀 하나 나무 하나, 민속풍정까지 모두 신화같은 전설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 파란만장한 역사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처럼 고토(故土)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여러 이야기는 모두 해당 지방의 특색을 띄게 되었고, 많은 에피소드와 인물이미지는 적지 않게 바뀌게 되었다.
정사기록인 <삼국지(三國誌)>의 이와 관련된 부분은 짧은 몇 마디에 불과하다:
"그리고 선주(유비)는 조공(조비)에게 당양 장판까지 추격당하자(及先主爲曹公所追於當陽長阪), 처자식을 버리고 남으로 도주한다(棄妻子南走), 조운은 어린 아들을 안고, 즉 후주(유선)이다(雲身抱弱子, 卽後主也), 감부인을 보호하며, 즉 후주의 모친이다(保護甘夫人, 卽後主母也), 모두 난을 면할 수 있었다(皆得免難)."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제41회에는 이 이야기를 길게 서술하고 있으며, 생동적으로 구체적인 부분들을 묘사하고 있다:
"장판파대전에서 조운은 감부인, 미부인과 유주(幼主) 아두(阿斗)를 보호하는 책임을 졌다. 전쟁으로 혼란스러워, 조운은 이들과 흩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3,40명의 병마를 이끌고 되돌아가 찾게 된다. 찾는 과정에서 그는 순우도(淳于導)를 죽이고 미축(糜竺)과 감부인(甘夫人)을 구한다. 조운은 두 사람을 장판교로 보낼 때, 하마터면 장비(張飛)에게 그가 주공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으로 오해받을 뻔했다. 다행히 간옹(簡雍)이 그를 위해 해명해주어서 오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해가 풀린 후, 조운은 감부인을 장비에게 맡기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아두를 찾으러 나선다. 다만 이때 그는 혼자밖에 남지 않는다. 혼란한 와중에 그는 하후은(夏侯恩)을 만나서, 한차례 교전을 치른 후 그는 하후은을 찔러죽이고 그가 차고 있던 청강검(靑罡劍)을 빼앗는다. 그후 낮은 담장가에서 미부인과 그녀의 품 속에 안긴 아두를 발견한다. 다만 이때 미부인은 이미 몸에 중상을 입어 몸을 움직이기 불편했다. 장군과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부인은 조운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고정(枯井)으로 몸을 던져 자결한다. 조운은 비통함을 견디지 못했지만, 부인의 시신과 수급을 조조의 군인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낮은 담장을 밀어서 고정을 덮어서 감추었다. 그후 아두를 등에 지고, 있는 힘을 다해 아두를 보호하며 포위망을 돌파한다. 다행히 조조는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서, 부하들에게 화살을 쏘지 말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조운은 수십만대군의 속에서 아두를 등에 지고 단기(單騎)로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고금중외에 유명한 삼국고전장 장판파는 바로 당양시(當陽市) 서성구(西城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옛 명칭은 "십리역림장판파(十里櫟林長板坡)"였다. 십리역림, 십리장판, 십리고풍(十里古風). 지금 십리장판은 이미 이십리 장가(長街)로 바뀌었다. 동십리 장판대도는 형주(荊州)로 연결되고, 서십리 장판대도는 의창(宜昌)과 연결된다. 동,서 장판대도가 만나는 곳에는 당양시의 랜드마크인 "조자룡단기구주(趙子龍單騎救主)"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 조각상 옆의 고지에는 방고(仿古) 건축물이 있고, 문루(門樓)에는 '장판파(長板坡)' 금색의 세 글자가 쓰여져 있다. 문루에는 이런 대련이 있다: "맹덕추현덕덕추덕익덕퇴맹덕유덕무덕덕외유덕(孟德追玄德德追德翼德退孟德有德無德德外有德), 자룡구유룡용구룡진룡경자룡사룡비룡용중유룡(子龍救幼龍龍救龍眞龍敬子龍似龍非龍龍中有龍)" 이 대련에서 나타내는 것은 장판파전투의 내용과 외연이다. 기실, 이 언덕은 겨우 10리 장판파의 한 중요한 거점일 뿐이다. 장판파가 포함하는 범위는 이 완만한 언덕길만이 아니다. 지금의 당양성은 옥양(玉陽), 옥천(玉泉), 파릉(壩陵)의 3개 판사처를 포함하는데, 모두 장판파의 범위내이다. 모두 옛날 조자룡이 단기구주, 왕래충돌했던 곳이다. 장판파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이하고, 아주 비탈지며, 아주 험준한 곳이 아니다. 그것은 중화민족의 역사상 하나의 풍성한 비석이고, 불후의 덕의(德義), 충절(忠節), 모험, 용감과 희생의 고상한 정신을 남겼다.
이 조자룡의 단기구주의 이야기는 당양의 인민들 마음 속에 아주 큰 영향력을 지녔다. 역사를 모르는 평범한 백성들도 이 이야기를 실감나고 재미있게 얘기하면서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이다.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면서, 이 역사는 전설적인 색채를 지닌 10개의 작은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현지정부는 10개의 조상을 만들어 이 역사장랑(長廊)을 만들었다.
첫째 이야기는 "현양명고(懸羊鳴鼓)"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자룡은 주공의 처자식을 구하기 위하여 조조의 병사들과 깊은 밤까지 싸웠다. 수하장병들이 점점 죽어가면서 마지막에는 겨우 10여기만이 그를 따랐다. 자룡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구원병이 오는 것처럼 꾸며서 조조를 겁주게 하려고 생각한다. 그가 생각한 것은 북을 울러 기세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지에 있는 것을 이용하기로 하고, 장판파의 3개의 돌출된 산언덕을 뢰고대(擂鼓臺)로 삼고, 산양(山羊)을 몇 마리 잡는다. 산양을 나무에 거꾸로 걸어두고, 산양의 앞다리 두 개를 가지고 북을 쳤다. 동시에 장병들은 횃불을 들고 언덕의 앞뒤의 수림을 이리저리 오갔다. 조조는 건너편의 금병산(錦屛山)에서 전투를 보고 있다가 횃불이 빈번하게 오가며, 끝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북소리가 밤새도록 울리는 것을 보고 정말 구원병이 왔다고 여겨 한동안 감히 앞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하지 못했다.
이 세 개의 돌출된 언덕은 지금 장판파의 서쪽 개략 1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언덕위에는 송백(松柏)이 사시사철 푸르다. 그곳이 옛날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싸울 때 뇌고대로 쓰였다고 하기 때문에, 현지 백성들은 이 세 개의 언덕을 삼국포(三國包)라고 부른다. 그리고 '현양명고'의 이야기도 이렇게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삼고태자(三顧太子)"이다.
조자룡이 사방으로 후주 유선을 찾으러 다닐 때, 장판파 아래의 석판가(石板街)에 이르렀다. 길의 끝자락에 작은 언덕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다섯계단을 오른 후에 한번 쳐다보니 소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열번째 계단까지 오른 후에 살펴보아도 여전히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15번째 계단까지 올라갔지만, 조조의 군기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자량은 마음 속으로 실망하면서 어떻든 소주인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말을 달려 장판파로 달려갔다.
그 이후 사람들은 이 15개의 계단이 있는 작은 언덕을 "망아파(望兒坡)"라고 부르게 되었다.
세번째 이야기는 "해구감모(解救甘母)"이다.
두 부인이 조조에게 추격당하며, 미부인은 아두를 안고 흩어지게 되고, 감부인은 돌에 걸려 넘어져서 신발이 벗겨지고, 머리카락도 산발되어 아주 낭패한 모습이 된다. 조자룡은 망아파에서 말을 몰아 달려와 감부인을 찾아낸다. 이때, 그는 미부인의 오빠인 미축이 조인의 부장 순우도(淳于導)에게 붙잡혀 말에 묶여 있어 목숨이 위험한 것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대갈일성하며 창을 들고 말을 몰아 순우도를 향해 돌진했고, 순우도는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진다. 그렇게 미축을 구하고, 순우도의 전마를 빼앗아, 즉시 감부인을 부축하여 말에 태우고, 내달려 감부인을 장판파를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네번째 이야기는 "공하피난(拱下避難)"이다.
조자룡은 감부인을 장판파에서 벗어나게 만든 후, 몸을 돌려 미부인과 아두를 찾는다. 미부인은 아두를 안고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도중에 부인은 왼다리에 화살을 맞아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아주 초조해졌다. 눈앞에 벽돌로 만든 공교(拱橋)가 보였고, 마침 초겨울이어서 물이 메마른 계절이라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이었다. 그리하여 아두를 안고 다리 아래로 몸을 숨긴다. 다리아래는 물기가 있어서 음습하고 차가웠다. 부인은 아이가 얼까봐 걱정하여 옷자락을 펼쳐서 품에 알았다. 다리 위에는 전마가 오가고 칼과 검이 부딛치고 있어 살기가 등등했다. 미부인은 다리 아래에 숨어서 한 마디도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어린 아두도 대단하게 울지도 않고 발버둥도 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미부인은 그를 임신했을 때 꿈에 고개를 들어 북두(北斗, 북극성)을 삼켰다고 한다. 그래서 아두는 북극성과 특별히 가까웠다. 매번 울거나 보챌 때, 그를 안고 북극성만 쳐다보면 그는 조용해지곤 했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에도 마침 북극성이 하늘에 있었고, 어린 아두는 그 별빛을 보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 돌연 북풍이 불면서, 차가운 바람이 다리 아래로 불어왔다. 미부인은 그저 아두를 안고서 바람을 피할 장소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한 공교는 미부인이 태자 아두를 안고 난을 피한 곳이기 때문에 나중에 사람들은 그 다리를 "태자교(太子橋)"라고 부르게 된다.
다섯째 이야기는 "고정유풍(古井遺風)"이다.
미부인은 아두를 안고 공교를 빠져나와 바람을 피할 곳을 찾는다. 조금 길을 걸은 후, 불에 타서 무너진 끊어진 담장을 발견한다. 이 담장 아래는 마침 바람을 피하기 좋은 곳이었다. 미부인은 아두를 안고 다리 아래 말라버린 우물(枯井) 옆에 앉았다. 조자룡은 미부인을 밤새 찾아다녔는데, 다음 날 새벽에야 비로소 담장 옆에 있는 미부인과 소주인을 발견하게 된다. 조자룡은 급히 말에서 내려 절을 하며 부인에게 빨리 말에 오를 것을 권했다. 자신은 걸어서 가겠다는 것이다. 미부인은 이런 상황하에서 말을 탄다고 하더라도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만일 장군에게 말이 없으면, 조그만치의 승산이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양하며 말한다. "장군에게 말이 없으면 안됩니다. 장군이 아이를 구해주십시오. 그럼 저는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자룡이 그녀의 말에 따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부인에게 말에 오를 것을 고집했다. 추격병이 갈수록 가까워오자 부인은 어쩔 수 없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장군 보십시오. 주공이 오는 게 아닙니까?"라고 말하자, 조자룡이 급히 몸을 돌려 살펴보았다. 그런데, 부인은 그 순간에 아두를 땅 위에 놓고, 자신은 몸을 돌려 우물 속으로 몸을 던져 자결한다. 조자룡이 몸을 돌려보니 부인은 이미 우물에 빠졌다. 장탄식을 한 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추격병이 이미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조의 병사들이 시신을 꺼내갈까봐 걱정하여 흙벽을 무너뜨려 말라빠진 우물을 덮어서 가렸고, 그리고 허리띠를 풀고, 호심경을 내려놓고 아두를 가슴에 묶고 창을 쥐고 말에 오른다. 그리고 싸움을 하면서 아침을 맞이한다....
그후 이 말라버린 우물은 현지 사람들에게 "낭낭정(娘娘井)"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우물의 옆에는 "미후사(糜后祠)"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흘렀고, 이미 비바람에 침식되어, '미후사'는 점점 훼손되었다. 그러나 낭낭정은 깨끗해져서 지금은 물이 거울처럼 맑다.
여섯째 이야기는 "삼환전포(三換戰袍)"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자룡은 칠진칠출(七進七出)하면서 무인지경으로 종횡하며 돌진했다. 그의 신용(神勇)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이야기에서는 조조가 경산에서 관전하는 장면을 넣어 더욱 돋보이게 했다.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좌충우돌할 때, 조조와 서서(徐庶)는 경산(景山)위의 한 노칠수(老漆樹, 오래된 옻나무) 아래에서 관전하고 있었다. 조조는 먼지가 이는 와중에 돌진하는 용장이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아 서서에게 묻는다: "서서, 저 자가 누구인가?" 곁에 있던 "칠수(漆樹, 옻나무)"는 '서서'를 '칠수'로 들어 자신에게 묻는다고 여겨서 큰 소리로 대답한다: "상산 조자룡!" 조조는 칠수가 입을 열어 말을 하자, 놀라서, 급히 그 나무에 절을 했다. 서서는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정말 '경산초목식영웅(景山草木識英雄)'이라 할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조자룡은 청룡의 화신이어서 은신법을 쓴다고 하는데, 보십시오. 그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용등자무(龍騰紫霧), 무조용신(霧罩龍身)'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전투중에 서로가 분명히 보이지 않아서, 50만의 군인이 있어도 그를 포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서는 고의로 조자룡을 신기하게 말했고, 조조는 정말 대단하다고 여기게 된다. 조자룡은 전투중에 희생된 전사들을 애도하기 위해 일찌감치 백포를 입고 전투에 나섰다. 그러나 정오가 될 때쯤 피가 묻어 전포가 홍색이 된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전포는 말라서 다시 자색이 된다. 그리하여 조조는 감탄하여 소리친다: "멋진 상산 조자룡이로다. 싸움이 이렇게 긴장되는데 그는 하루에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는구나. 정말 신장이로다" 조조가 보기에 오십만대군이 조자룡 한명을 상대해서 이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칠수에 절을 하고 가르침을 구한다. 노칠수는 천천히 말한다: "삼군이득(三軍易得), 일장난구(一將難求)"(삼군 즉 많은 군인을 얻기는 쉬우나, 한명의 제대로 된 장수를 얻기는 어렵다). 서서도 옆에서 말을 덧붙였고, 조조는 그 말을 들은 후 과연 명령을 내린다: "조자룡은 반드시 살아서 생포해라. 절대 조자룡을 죽이지 말라." 이를 보면 장판파 일전에서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조자룡 본인이 용맹한 것 외에도 서서가 암중으로 도와주고, 조조가 인재를 아낀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에 나오는 '경산'은 산색이 수려하고, 비취같은 병풍이 파란 하늘과 푸른 강물의 곁에 서 있다고 하여 나중에 '금병산'으로 이름을 고치게 된다. 이야기에 나오는 '칠수'를 기념하기 위해 청나라 동치10년(1871년) 당양의 인민들은 특별히 금병산에 100그루의 백년동청(冬靑)을 장판파에 옮겨심어, 조자롱의 졍신이 만고장청(萬古長靑)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일곱번째 이야기는 "단기구주(單騎救主)"이다.
조자룡의 장판파전투에서의 영웅스러운 담략과 개세의 공은 바로 '단기구주'에 있다. 당초 조자룡은 일인일마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100여기가 유현덕의 처자식을 보호하면서, 이리저리 충돌하면서 조조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마지막에는 조자룡 한 사람만 남아 싸운다. 당양의 랜드마크인 '단기구주' 조각상은 이런 이야기를 말해준다: 조자룡이 아두를 품에 안고 말을 몰아 포위망을 돌파한다. 손에는 청강검을 휘두르며, 좌우를 베어, 무인지경같았다. 결국 포위망을 뚫고, 당양교 방향으로 달려간다....
'단기구주' 조각상은 장판파 삼각가 심화원(心花園)의 안에 세워져 있다. 1985년에 낙성되었을 때, 원래 조각의 모양은 머리를 내려뜨리고 발굽을 내닫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모습에 대하여 당양의 주민들은 반대한다. 많은 사람들은 영웅이 고개를 내려뜨린 이미지는 도시에 불리한 징조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최근 들어 다시 돈을 들여, 머리를 들고 싸우는 말의 모습으로 바꾸게 된다.
여덟째 이야기는 "약마충진(躍馬冲陣)"이다.
조자룡이 가슴에 아두를 품고 여러번 포위망을 뚫으려고 할 때, 조조의 장수 장합(張頜)을 만난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소주인을 생각하여 조자룡이 계속 약세에 처하고 마음놓고 싸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빨리 도망치려고 하나, 장합은 계속 밀어부쳤고, 조운은 사람과 말이 함께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 많은 칼과 창이 구덩이 속을 향하고 있었고, 조운조차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겠다고 생각했을 때, 돌연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소주인의 몸에서 붉은 빛이 나왔고, 조조의 군대는 놀라서 혼란에 빠진다. 조운은 기회가 생겼다고 여기고, 조조군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조조병사의 칼자루를 잡고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 전마도 힘을 내어 뛰어 조자룡과 소주인을 데리고 흙구덩이에서 빠져나오고 포위망을 벗어나게 된다.
아홉째 이야기는 "장판단교(長板斷橋)"이다.
조자룡이 겹겹이 포위망을 뚫은 후, 급히 동쪽으로 도망친다. 조조군은 포기하지 않고 당양교까지 추격해 왔다. 이때 조자룡은 이미 피곤이 극에 달했고, 말도 지쳐있었다. 다시 싸운다면, 아마 적을 상대할 수 없을 터였다. 다행히 장비가 적시에 나타나서 그의 뒤를 막아준다. 크게 세번 소리치자, 교량이 끊어지고, 조조군은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당양교는 당양시 옥양진 동북쪽에 있다. 자오즈철로(焦枝鐵路) 남쪽, 형당공로(荊當公路) 선상이다. 다리가 당양경내에 있기때문에 역사상 이를 '당양교'라고 불렀다.
열번째 이야기는 "유비척자(劉飛擲子)"이다.
장비의 엄호하에, 조자룡이 성공적으로 아두를 구해낸다. 그는 아두를 데리고 십여리를 가서, 유비와 감부인이 한 숲에서 잠시 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조운은 말에서 내려 허리띠를 풒고, 아두를 두 손으로 유비에게 바친다. 유비는 아두를 받아든 후, 고의로 땅에 던지면서 말한다: "아두야 아두. 너를 위하여 하마터면 나의 대장을 잃을 뻔하지 않았느냐!"
자룡전장판(子龍戰長板)
위풍진군산(威風震群山)
돌진현영웅(突陣顯英雄)
피곤용항전(被困勇巷戰)
귀곡여신호(鬼哭與神號)
천경병지참(天驚幷地慘)
상산조자룡(常山趙子龍)
일신도시담(一身都是膽)
이번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석판소가를 '자룡가(子龍街)'라고 부르게 된다. 지금, 당양성의 몇개의 주도로는 이미 직선화되고 넓어졌으며, 푸른 가로수가 그늘을 이루는 현대화된 도로가 되었지만, 유독 이 오래된 석판소가만은 남겨두어서 옛날을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전투한 이야기를 보면 역시 역사와 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이 기초 위에서, 현지 인민들이 문인작품, 전인관점을 받아들여, 추갈가로 창작하고, 현지의 풍토와 지형에 맞추어서 그 속의 세부적인 스토리를 적절히 고쳐서 전쟁의 경과에 대하여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고 생동감있게 완성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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