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하후패(夏侯覇)의 인생궤적

by 중은우시 2022. 11. 29.

글: 흑미애여행(黑米愛旅行)

 

삼국시대 여러 명장들 중에서, 하후패는 비교적 특별한 존재이다. 먼저, 그는 하후연(夏侯淵)의 차남이고, 조씨(曹氏)와 하후씨(夏侯氏)의 관계 및 하후연이 전장에서 사망하여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공로로 인하여, 하후패는 조조(曹操), 조비(曹丕), 조예(曹叡)시기에는 비록 크게 뜨지도 않았지만, 조상(曹爽)이 집권한 기간동안에는 점차 중용되게 된다.

 

다음으로, 장비(張飛)의 처는 하후패의 당매(堂妹)이다. 그래서 그는 촉한의 후주인 유선(劉禪)의 외숙이 된다. 고평릉사변후 사마의(司馬懿)가 군대내의 조씨세력을 몰아낼 때, 하후씨는 가장 먼저 제거대상이 된다. 우장군(右將軍) 하후패는 그리하여 전선에서 촉한으로 도망친다. 하후패의 이런 인생경력은 삼국시대에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오늘날 하후패의 인생경력을 개괄해보면, 청년시기는 묵묵무문(默默無聞), 중년시기는 성명불현(聲名不顯), 노년시기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할 수 있다.

 

하후연은 비록 219년의 정군산(定軍山)전투에서 황충(黃忠)에게 참살당한다. 그러나 그의 몇몇 아들은 모두 뛰어났다. 호부불견자(虎父不犬子)라고 할 수 있다. 조위(曹魏)의 팔호기(八虎騎)에서 하후연의 자손들이 가장 뛰어났다. 사서에도 그의 몇몇 아들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다. 장지의 처인 하후씨는 하후패의 당매(일반적인 당매가 아니라, 이 딸은 하후연이 거두어 길렀다. 하후연에게는 원래 8명의 아들이 있는데, 이 질녀를 거두어 기르기 위해 자신의 가장 어린 아들을 포기하기까지 했다)이다. 그리고 하후씨는 200년 장비에게 포로로 잡힌 후 처가 된다. 그때 나이가 13,4살이었다. 그래서 하후패는 최소한 187년이전에 태어났다. 

 

마찬가지로 조씨와 하후씨의 제2대인 조진(曹眞), 조휴(曹休)와 하후상(夏侯尙)은 조조 생전에 모두 점차 두각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하변(下辯)전투에서 조휴는 일거에 명성을 떨치고, 하후상은 조창(曹彰)을 따라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를 정벌하였으며, 조진은 호표기(虎豹騎)의 군중에서 복무했을 뿐아니라, 한중(漢中)전투때는 이미 편장군(偏將軍)이 되어 있었다. 하후패는 나이가 적지 않았다(219년 하후연이 전사했을 때, 하후패는 이미 30여세였다). 그러나 조조시기에 그는 조용했다. 조비가 등극한 이후인 황초연간에 비로소 편장군이 된다. 그런데 조휴, 조진과 하후상 세 사람은 이미 조위의 주요병권을 장악한 인물들이 되어 있었다. 위연(魏延)에게 "겁은 많고 계책은 없다(怯而無謀)"하다고 평가받은 하후돈(夏侯惇)의 장남 하후무(夏侯楙)도 안서장군(安西將軍)이 되어 조위의 서부전선 병권을 쥐고 있을 정도였다.

 

하후패가 단독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한 것은 230년이다. 이 해에 대사마 조진이 4로로 나누어 촉을 정벌했다(이 전투에서 위연은 양계(陽溪)전투의 대승을 거둔다). 하후패는 조진의 주력대군의 선봉으로 나섰으며, 실적은 그럭그럭 괜찮은 편이었다. 촉한의 진격을 막아내며 원군이 올 때까지 적극적으로 방어했다.

 

종합적으로 보아, 하후패는 조조, 조비, 조예의 세 시기에는 보통수준이었고, 그다지 중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조예가 죽은 후 하후패는 대기만성하며 점차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239년 위명제 조예가 사망한 후, 대장군 조상은 사마의를 배척하며, 군내에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50여세의 하후패는 전면에 나서서 중용이 된다. 토촉호군(討蜀護軍), 우장군(右將軍)을 맡아 조카인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현(夏侯玄)을 도와 서부전선의 병권을 장악하고 촉한과의 전투를 책임진다. 즉 그는 강유(姜維)의 북벌때 주요적수중 하나인 것이다.

 

249년 고평릉사변후, 사마의는 군대내에 병권을 장악한 조씨와 하후씨장군을 솎아내기 시작한다. 정서장군 하후현이 병권을 박탈당하고 경성으로 소환되자, 하후패는 놀라고 불안한 나머지 촉한으로 도망져서 유선에게 중용되어, 거기장군(車騎將軍)을 맡아 여러번 강유의 북벌에 참여한다. 255년 도서(洮西)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하후패에 관한 소식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때 그는 이미 70세 가량이다. 장익(張翼)과 요화(廖化)는 각각 259년 좌,우거기장군이 되었는데, 이를 보면, 하후패는 259년이전에 병사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