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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14

일본의 유구(琉球)왕국 병합 경위는...? 글: 양택휘(楊澤暉) 중국과 유구왕국의 교류는 역사가 길다. 유구군도(琉球群島)는 일본 규슈섬의 서남쪽에서 중국대만의 동북쪽의 사이에 크고 작은 섬 55개를 포함하고 있고, 3개의 비교적 큰 군도로 나눌 수 있다. 북부는 엄미군도(奄美群島, 일본명 아마미제도), 중부는 충승제도(冲繩諸島, 일본명 오키나와제도), 남부는 선도제도(先島諸島, 일본명 사키시마제도)이다. 유구국의 역사서 에 따르면, 수양제(隋煬帝)가 우기위(羽騎尉) 주관(朱寬)에게 명하여 다른 나라들의 풍속을 알아보라고 보냈을 때, 이곳에 도착한 적이 있다고 한다. 멀리서 보니 섬들이 마치 규룡(虬龍)이 큰 바다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같아서, "유구(流虬)"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을 보면 이에 대해 상세한 문자기록이 있다. 그후 중국에서는 ".. 2023. 5. 23.
달마(達摩)는 소림무술의 조사(祖師)가 아니다. 글: 유박(劉博), 양류(楊柳) 1980년대에 김용, 양우생등을 대표로 하는 신파무협소설이 밀물처럼 중국대륙으로 들어왔다. 무협소설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소림사를 언급한다. 그리고 무당파와 함께 각각 승, 도의 무학정종으로 떠받들어 진다. 이는 민간에 '천하무술은 모두 소림에서 나왔.. 2019. 6. 7.
대만(臺灣)과 유구(琉球)의 역사연원 글: 자번(子樊) 유구는 대만인가, 일본인가. 원래 대유구(大琉球)는 일본 유구군도의 최남단 및 최서단의 오키나와현(沖繩縣)을 가리키고, 소유구(小琉球)는 대만 서남쪽 외해에 있는 유구서(琉球嶼)를 가리킨다. 대,소 유구는 명칭이 비슷할 뿐아니라, 더욱 그 역사연원도 있다. 중국동방.. 2019. 1. 7.
청나라말기에 무너진 "천조상방(天朝上邦)"의 꿈 글: 독력견문(讀歷見聞) "천조상방"은 중국고대 일반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심리적 우월감이었다. 소위 "천처호상(天處乎上), 지처호하(地處乎下), 거천지지중자왈중국(居天地之中者曰中國), 거천지지편자왈사이(居天地之偏者曰四夷)"(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다. 천지의 한가운.. 2018. 6. 7.
유구(琉球)국이 일본 시마즈(島津)군에 함락될 때 명나라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글:신유융(愼由戎) "수나라의 군대가 힘으로 위협해도 굴복하지 않았던(隋兵劫之而不服)"하던 유구국이 명나라가 건립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귀순하여(首效歸附)" 주원장에게 조공을 바치고 가장 우대받는 번속국(藩屬國)이 된다. 유구는 명나라의 비호와 지지하에 동남아, 조선, .. 2018. 1. 9.
당나라때의 외국인 유학생 글: 예방육(倪方六) 지금 중국인들이 멀리 국외로 유학가는 것이 유행으로 되었다. 어떤 사람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은 현재 세계최대의 유학생파견국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중국고대에, 특히 수당시기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중국으로 유학오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중국고.. 2014. 10. 24.
목단사사건(牧丹社事件): 유구의 번국지위를 바꾼 사건 작자: 미상 목단사사건은 1874년(청나라 동치13년, 일본 메이지7년)에 유구왕국의 선박조난자들이 대만 원주민에게 피살된 사건이다. 일본은 이로 인하여 출병하여 대만남부 원주민부락을 공격하는 군사행동을 개시하고, 그후 청일양국은 외교적으로 절충한다. 이것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2014. 5. 29.
진실한 중일교악사(中日交惡史)를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글: 풍학영(馮學榮)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중국에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지금 중국청년들은 '일본'이라는 두 글자만 나오면 이를 간다. 원한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중국인의 일본에 대한 .. 2014. 5. 29.
딩니라때 사람들은 상관완아(上官婉兒)를 어떻게 평가했는가? 글: 조염(趙炎) 차문도장리(借問桃將李), 상란욕하여(相亂欲何如) 이것은 무주(武周)시대 여관 상관완아의 응제시(應制詩)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1300년이 지난 오늘날, '당고소용상관씨묘(唐故昭容上官氏墓)'가 발굴되면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묻고 있다. 상관완아, 도대체 어떤 여인인가?.. 2014. 4. 4.
중국고대에 "농민의 난"은 존재하지 않았다. 글: 양진도(楊津濤) 사학계에서는 "농민의거"의 성격규정과 평가에 대하여 이견이 존재해 왔다. 절대다수의 사람은 "농민의거"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진승, 유방, 주원장, 이자성의 이야기도 귀에 익숙할 것이다. 1949년이후의 중국통사에서 "농민의거", "농민혁명"의 내용은 오랫.. 2013.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