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박(劉博), 양류(楊柳)
1980년대에 김용, 양우생등을 대표로 하는 신파무협소설이 밀물처럼 중국대륙으로 들어왔다. 무협소설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소림사를 언급한다. 그리고 무당파와 함께 각각 승, 도의 무학정종으로 떠받들어 진다. 이는 민간에 '천하무술은 모두 소림에서 나왔다"는 인상을 갖도록 해주었다. 정종(正宗)이라면 성지(聖地)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남 숭산의 소림사를 위주로 하고, 복건 남소림(현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을 보조로 한다. 그리고 성지가 있으면 성인도 있어야 한다. 신파무협소설에서는 소림무술의 창시자를 달마라는 인도화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중국불교사상 유명한 고승은 거의 모두 정사(正史)에서 고증할 수 있지만, 달마는 예외이다. 그의 내력은 수수께끼이다. 소림사와 관련이 있는지 여부도 고증이 필요하다. 하물며 그가 소림무술의 비조인지 여부는 더욱 그러하다.
숭산 소림사를 가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달마동(達摩洞)이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초 이곳에서 수련을 했다고 한다. 면벽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지금까지도 달마가 석벽에 반영된 그림자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당연히 초현실주의이지만, 우리는 그저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달마(達摩)는 달마(達磨)나 보리달마(菩提達摩)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불교 선종에서는 개산조사로 본다. 달마가 누구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고 죽었는가? 이에 대하여는 주장이 서로 다르다.
원나라때 승려인 각안(覺岸)이 쓴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과 양나라때 석혜교(釋慧皎)의 <고승전>에 따르면 그는 남천축(南天竺) 사람이다. <석씨계고략>에는 명확하게 말했다. 그는 "서천이십팔조(西天二十八祖), 동토초조(東土初祖) 보리달마는 남천축국 향지왕(香至王)의 셋째아들로 이름은 살제리(殺帝利)이다."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그는 페르시아인(波斯人)이라고 한다. 북위때 양현지(楊炫之)의 <낙양가람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시에 서역사문의 보리달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페르시아국의 호인(胡人)이다. 황예(荒裔)에서 중토(中土, 중국)로 왔다." 이상의 세 책은 모두 불교연구의 중요문헌이다. 다만 기록간의 차이가 아주 크다. 남천축은 현재의 인도이고, 페르시아는 현재의 이란이다. 달마는 도대체 인도사람인가, 이란사람인가? 이것은 아마도 해결하기 힘든 수수께끼일 것이다.
달마는 언제 중국으로 왔는가? 이것도 역시 수수께끼이다. 현재 비교적 유행하는 견해는 520년, 526년, 527년의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각각 <석씨계고략>, <경덕전등록>, <불조속기>에 나오는 견해이다. 우리는 원래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르면 될 것이다. 다만, <경덕전등록>에서는 "(달마)가 태화19년 병진 십월 오일 단거에서 사망했다." 남북조시기에 '태화(太和)'라는 연호를 쓴 경우는 북위 효문제 원굉(元宏)뿐이다. 태화19년은 495년이다. 이렇게 되니 모순이 나타난다. 495년에 죽은 사람이 어찌 520년(혹은 526년., 527년)에 중국에 올 수 있단 말인가?
달마는 그럼 언제 죽었을까? 이것도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태화19년설 이외에 528년, 534년, 536년, 537년등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것은 각각 <석씨계고략>, <속고승전>, <구당서>등에 나온다.
달마가 중국에 온 후에 소림사에 갔을까? 이에 대한 답안도 오리무중이다.
<구당서.방기전>에 따르면, "후위말에 승려 달마라는 사람이 있는데, 원래 천축국의 왕자이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출가한다. 남해로 가서 선종의 묘법을 얻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석가모니가 전해주었다고 한다, 의발(衣鉢)을 신물로 삼아 대대로 전수한다. 달마는 의발을 가지고 바다를 항해하여 왔다. 요에 도착하여 무제를 만난다. 황제는 사업을 크게 벌일 것을 얘기하자, 달마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나라로 간다. 숭산 소림사에 은거하다가 독을 먹고 죽었다(遇毒而死). 그 해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총령(파미르고원)에서 그를 보았다. 그래서 제자들이 무덤을 파보니 신발만 남아 있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우리는 대체로 달마가 중토에 온 이후의 활동노선을 알 수 있다. 달마가 중국에 온 이후 먼저 남조의 양나라로 간다. 그리고 양무제 소연과 한번 만나기도 했다. 소연은 경건한 불교도이고, 세번이나 스스로 몸을 사원에 바친 적이 있다. 그리고 친히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최해서 친히 설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불교에 대한 관점이 달마와 크게 차이났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지만 잘 통하지 않게 된다. 그후 달마는 강을 건너 북상한다. 북조의 북위에 도착하여 숭산 소림사에 은거한다.
<구당서>의 작자가 누구인가? 현재는 논쟁중이다. 통상적인 견해로는 오대시기 후진의 유구(劉昫)라고 본다. 유구가 생활한 시대는 달마가 생활한 시기와 400여년의 차이가 있다. 이전에 달마를 언급한 <낙양가람기>, <고승전>, <속고승전>중에는 모두 달마가 소림사에 갔다는 얘기를 적지 않았다. 그래서 <구당서>의 기록에는 상당한 의문이 있다.
<구당서>이후 북송 송진종 경덕연간(1004-1007)에 쓰여진 <경덕전등록>에서는 다시 한번 달마대사가 '숭산소림사에 우거했다" "면벽구년" "거단이서(居端而逝)"등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 책의 또 다른 곳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달마는 495년에 서거했다. 소림사는 다음해 즉 태화20년(496년)에 완공된다. 이책은 이렇게 명백한 모순이 있다. 그렇다면 책에서 언급한 달마가 소림사에서 면벽구년을 했다는 이야기도 충분히 의심해볼 만하다.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필자는 달마와 소림사 그리고 소림무술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설사 달마가 소림사에 갔다고 하더라도, 소림사에 달마와 관련된 수많은 유적, 유물들이 있는데(예를 들어, 불전 앞의 '달마정', 천왕전 서북의 '일위도강'석상, 소실산 자락아래의 '달마암', 소실산 정상의 '달마동' '면벽석'등),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유일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달마가 확실히 소림가사 건립되기 전에 소실산에서 수행한 바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중의 <구당서>등 책에서 뒤의 일을 앞 사람에게 발생한 것처럼 적은 것이다.달마가 '소림사로 가서 머물렀다'는 것은 책에서 갓 태어난 유방을 '한고조'라고 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천하의 쿵후는 소림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림무술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문제는 명청이래로 논쟁이 뜨겁다. 그중 달마 혹은 소림초조 발타(跋陀)가 창조했다는 두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는 달마가 확실히 소림사에 갔다고 치고, 그와 소림사무술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역시 없다. 왜냐하면, <낙양가람기>, <고승전>, <속고승전> 그리고 <구당서>, <경덕전등록>등 사서에 달마가 소림무술과 관련이 있다는 내요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 달마와 소림무술을 연결시킨 것은 <역근경>이라는 무학저작이다. 이 책은 두 편의 신화적인 색채의 서문이 있는데, 작자는 전해지기로 당나라초기의 명장 이정(李靖)과 남송명장 우고(牛皋)라고 한다. 이 두편의 서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달마대사가 면벽구년후에 원적한다. 그는 망혜(芒鞋) 하나만 가지고 '서천'으로 간다. 즉 총령(파미르고원)으로 갔다. 나중에 그가 면벽한 곳이 파손되면서, 소림사의 승려들이 수리할 때 돌상자를 하나 발견한다. 절의 승려인 혜가(慧可)가 돌상자의 아교를 태워 붙인 곳을 열어보니 안에 두 권의 책이 있었다. 한권은 <세수경(洗髓經)>이고 다른 한권은 <역근경(易筋經)>이다. 두 책은 모두 범어(산스크리트어)로 적혀 있었다. 혜가는 <세수경>을 가져가고, 다른 승려가 <역근경>을 가져갔다. 승려들은 <역근경>의 일부분을 번역했는데, 이것이 무학저작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달마조사의 유물이므로 책에 나오는대로 익혀본다. 나중에 반랄체(般剌密諦)라는 천축승려가 <역근경>을 모조리 번역해낸다. 그리고 이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다가 수말당초의 '풍진삼협'중 한 명인 규염객에게 전해지고, 규염객은 다시 그의 의매부(義妹夫)인 이정에게 준다 이정이 사망한 후 수백년이 지나서 이 책은 신화처럼 한 늙은 스님의 손에 전해진다. 늙은 스님은 자칭 항금명장 악비의 스승인데, 그는 이 책을 우고에게 건네준다. 노화상이 왜 이 책을 악비에게 전하지 않았을까? 전해지는 바로는 그는 이미 "악비가 명성을 얻지만, 뜻은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확실히 악비가 간신에게 해를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만, 우고도 결국 진회가 보낸 사람이 독살한다. 우고, 악비는 같은 최후를 맞는다. 그런데 우고에게는 전해주고, 악비에게는 전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규염객이라는 사람은 그저 전설이야기의 인물일 뿐이다. 역사상 그런 인물은 없다. 그러므로 이 서문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근대의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는 이렇다. 무술을 소림사로 가져와서 크게 키운 사람은 소림사의 제2대주지인 조선사(稠禪師)이다. 조선사는 승조(僧稠)라고도 부르며, 조적은 하북 창려(昌黎)이다.
조선사는 33살때 혹은 그 이후에 소림사로 간다. 시간은 약 북위 선무제 연창연간(512년)이다. 문헌과 실물의 상호인증에 의하면, 조선사는 소년시기에 또 다른 무승이 대량으로 활동하는 불교사원인 업하사원(鄴下寺院)에서 무술을 익혔다(지금의 하남성 안양현 선응진 경내). 업하사원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문헌상 고증이 가능한 사원이다. 이는 즉, 조선사는 '대예진사(帶藝進寺)'했다는 것이다. 즉 이미 무예를 익힌 후에 소림사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당시 소림사의 방장은 고승 발타였는데, 그가 주지로 있을 때, 소림사의 문헌에는 무술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다. 이를 가지고 판단해보면, 조선사는 소림사 최초의 무승이고, 조선사가 소림사의 주지를 넘겨받은 후, 소림사는 무술을 익히는 기풍이 짙어졌으며 점차 발전하였다. 특정한 사회역사환경과 조건하에서, 정교하고 풍부한 소림무공이 형성된다. 고증에 따르면, 천하에 이름을 떨친 "소림사십삼곤승이 당왕(이세민)을 구하다"는 이야기의 제일승인 소림사 주지 지조법사(志操法師)는 원래 업하 청운사(淸雲寺)의 저명한 무승(武僧)이었다.
조선사가 죽은 후, 유골은 둘로 나누어서, 각각 등봉 소림사와 안양 운문사(雲門寺)에 보존한다. 이는 조선사가 소람사에 들어가기 전에 안양의 사원과 깊은 연원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소림무술의 근원은 하남성 안양시의 업하사원이고, 달마와는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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