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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때의 외국인 유학생

by 중은우시 2014. 10. 24.

글: 예방육(倪方六)

 

지금 중국인들이 멀리 국외로 유학가는 것이 유행으로 되었다. 어떤 사람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은 현재 세계최대의 유학생파견국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중국고대에, 특히 수당시기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중국으로 유학오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중국고대에 언제부터 외국유학생을 대량으로 받기 시작했을까? 외국인은 어떻게 하여야 중국으로 유학올 수 있었을까?

 

최초의 유학생은 일본에서 왔다.

 

교육계에서는 수나라가 중국고대에 대량으로 외국유학생을 받은 왕조라고 본다. <수서.동이열전>에 따르면, "왜국조(倭國條)"에 이런 기록이 있다: 대업4년, 수문제 양견은 "문림랑(文林郞) 배세청(裴世淸)을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왜국은 바로 지금의 일본이다. 당시의 일본국왕은 배세청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듣기로 해서에 대수(大隋)가 있고, 예의지국이라고 드렀다. 그래서 조공을 보내겠다"

 

대업4년 즉 608년, 즉 일본추고(推古)16년, 왜왕은 소야매자(小野妹子)를 견수사(遣隋使)로, 길사웅성(吉士雄成)을 부사로 한 사신단을 해서의 중국으로 보낸다. 같이 따라온 사람으로는 고향현리(高向玄理), 남연청안(南淵淸安), 승만(僧曼)등 8명의 유학생과 학문승이 있었다.

 

중일학술계의 고증에 따르면, 이는 중국이 최초로 최초로 외국유학생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문자기록이다. 당시, 수문제 양견은 북주를 대체하여 황제를 칭한지 이미 20여년이 되었고, 중국은 장기간의 남북분열국면을 종결했으며, 국력이 크게 늘어나 세계에서 가장 선성한 강대국가가 되어 있었다. 바로 이 시대배경하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유학생을 중국에 파견하여 "경술(經術)"을 공부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1년전인 대업3년, 즉 607년, 일본은 이미 "사문의 수십명을 파견하여 불법을 배우게 했다"

 

중국에서 대규모로 외국유학생을 받아들인 것은 당나라때이다. 일본 및 고구려, 백체, 신라, 안남, 유구 및 불름(拂菻, 동로마 비잔틴제국)과 대식(大食, 지금의 이란)등 국가와 지구에서도 속속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거나 유학성격의 사신, 승려를 보냈다. 일본에 있어서, 매번 중국에 유학오는 일본학생의 수량은 적으면 1,2십명, 많으면 2,3십명에 이르렀다.

 

<신,구당서>, <대일본사>등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정관4년(630년) 처음 견당사를 파견하고, 건녕원년(894년)에 이르기까지 265년동안, 일본에서 보낸 견당사신단은 19회에 이른다. 그중 정식으로 파견하여 당나라에 도착한 사절단은 13변이다.

 

매번 견당사에는, 중국에 공부하러 오는 유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융기(당현종)이 황제로 있던 개원 5년(717년), 일본이 제9차로 중국에 견당사를 파견한다. 이는 일본이 중국에 보낸 사절단중 인원이 가장 많았던 경우이다. 대사, 부사등 관리를 포함하여 모두 557명이다. 저명한 일본적 유학생 현방(玄防), 길비진비(吉備眞備), 아배중마려(阿倍仲麻呂)등이 모두 이 때의 구성원이다.

 

고대에 중국에 온 외국유학생은 자비생(민간)과 공비생(정부파견)의 구분이 있다. 다만 절대다수는 정부가 파견한 유학생이다. 당시, 중국유학생은 정부채널을 통했다. 그래서 초기에 중국에 온 유학생은 대부분 고관자제 혹은 귀족자제였다. 공부에 뜻을 둔 한문제자(寒門弟子)들은 중국에 와서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수당시기, 한반도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등 3개의 국가가 있었다. 이 시기는 역사학자들이 '삼국시대'라고 칭하는 시기이다. 고려의 역사학자 김부식은 한자로 <삼국사기>를 편찬하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이 바로 이 시기의 역사이다. 당시 정부에서 파견한 학생을 중국에 유학보낸 나라중에서 한반도의 이 세개 국가가 가장 활발했고, 중국유학생의 수도 일본을 크게 초과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정관14년(640년), 영류왕23년, 고구려는 최초로 중국에 유학생을 보낸다. 소위 "왕이 자제를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게 하여 국학에 들어가기를 청하다"이다. 여기의 '자제'는 왕실구성원 혹은 관리의 자식이었다.

 

같은 해, 한반도의 벡제국의 무왕도 왕실자제를 중국으로 보내 유학시킨다. 국가인재배양계획의 대사로서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는 일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기록이 있다. 무왕41년(640년) "이월, 자제를 당나라에 보내어 국학에 들어가기를 청했다"

 

"국학에 들어가기를 청하다"는 요즘 말로 하면 '입학신청'이다. 각국의 상황에 따라 당시의 중국고정은 상응한 TO를 두었다. 소위 '례(例)'이다. 매번 해당국가에서 몇 명의 유학생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례'에 따랐다. '구례'의 제한으로 신청한 후 모두 통과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만일 중국에 유학을 오려면, 먼저 'TO'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당나라 개원원년(836년), 신라의 신청은 단지 2명만 받아들인다. <당회요>에는 구체적으로 기재하고 있다: '신라숙위생 왕자 김의종(金義宗)등이 유학생이 되기를 신청했는데 ,구례에 따라 2명을 남길 것을 허락하다.'

 

외국유학생이 중국에 오면 현재의 북대,청화같은 최고학부에 입학했다. 도성에 설립된 태학, 국자감에서 공부한다. 당시 중국의 고등교육제도, 고시제도는 모두 세계최고수준이었고 가장 선진적이었다. 국제적인 명성도 지금의 미국 하버드, 영국 캠브리지등을 능가했다.

 

그외에 중국유학은 '비용이 전부 면제'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괜찮은 편이었다.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비도 면제되었다. 교복도 무상으로 내주었다. 예를 들어 개성원년(836년), 신청이 통과된 2명의 신라국 유학생은 신청이 통과되자 조정이 '의복과 양식을 례에 따라 지급했다.'

 

'의복과 양식'은 교복, 이불, 생활일용품, 음식등을 포함한다. 이들 비용지출은 모조지 중국조정의 금고에서 지급했다. 신라유학생에게도 이러했지만, 고구려, 일본 및 기타 국가의 중국유학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중국유학생은 기본적으로 돈을 낼 필요가 없었다. 이는 당시 중국학생이 태학, 국자감에 입학했을 때의 대우와 같았다.

 

'개성'은 당문종 이앙의 연호이다. 당시 당왕조의 국력은 이미 예전만 못했다. 조정이 부담하는 유학비용은 상당히 컸다. 당문종 개성원년, 신라국의 유학생만 216명에 이른다.

 

학습내용, 형식과 배양목표가 서로 다르므로, 고대에 중국에 온 외국유학생은 '유학생'과 '유학승'의 구분이 있었다. 중국의 <논어>, <시경>같은 '사서오경'을 공부하는 정종의 유학생은 과목이 중국학생과 같았고 같이 수업을 들었다.

 

외국유학생에 대한 관리는 중국학생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엄격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거나 학교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개인행위에 문제가 있으면 모두 처분당한다. 심한 경우에는 제적당하고 강제귀국당한다. <당회요>의 기록에 따르면 대화9년(835년), 7명의 신라국 유학생이 처분을 당하여 강제귀국당했다.

 

중국에 유학온 외국학생은 중국학생과 동등하게 과거시험에 응시할 권리가 있었다. 만일 합격하면 마찬가지로 관리가 된다. 당시에는 현대와 같은 '학위증서'가 없었다. 그러나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아배중마려는 개원5년(717년) 진사에 합격하고, 관직을 받는다. 나중에 오늘날의 국가도서관장에 해당하는 비서감의 관직을 받고 당대종때는 진남절도사에 임명된다.

 

중국에 유학온 학생들 중에서 명성을 얻은 사람도 많았다. 신라유학생을 보면, 당목종 장경초년(821년)에서 당말까지 거기에 오대까지 더해서 과거시험에 급제한 사람은 김운경, 최치원, 최광유등 89명이다. 한국의 문헌 <증보문헌통고,선거고일>에는 이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한다: "9당나라때) 빈공과에 등과한 사람이 58명이고, 오대 양, 당에서 다시 31명이다."

 

그중 '한국공자'라고 불리는 최치원의 영향이 가장 크다. <조선사략.신라기>에 따르면, "최치원, 나이 12살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가서 스승을 찾아 공부하고, 18세때 등과하다." 18세때 과거에 급제했다. 이는 중국본토학생들에게도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중국유학생에는 성년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학생도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유학생은 공부를 마친 후, 당연히 귀국하여 일을 해야 했다. <구당서.동이열전>의 '신라'조 기록에 따르면, 당개성5년(840년) 귀국한 신라유학생은 한번에 105명에 달했다.

 

유학생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 중국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절차와 관리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파견국에서 먼저 유학생귀국신청을 한다. 당원화원년(806년), 일본사신 고계진인(高階眞人)은 면세(免勢)등과 함께 돌아가겠다고 청한다. 허락했다."

 

당나라때, 외국유학생이 중국에 체류하는 현상도 많았다. 예를 들어, 아배중마려, 길비진비는 장기간 중국에 체류한다. <구당서.동이열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배중마려는 '중국의 기풍을 앙모하여 남아 있고 돌아가지 않았다." 나중에, 아배중마려는 중국식으로 이름도 개명한다. "조형(晁衡)" 중국에서 53년간이나 살다가 중국에서 죽는다.

 

그동안 아배중마려는 천보12년(753년) 귀국한 바 있다. 당시 그가 해상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의 중국친구인 이백은 그 소식을 들은 후 <곡조경형(哭晁卿衡)>을 쓴다: "일본조경사제도(日本晁卿辭帝都), 정범일편소봉호(征帆一片燒蓬壺), 명주불귀침벽해(明珠不歸沉碧海), 백운추식만창오(白雲秋色滿蒼梧)" 얼마후 아매중마려는 대당으로 되돌아오고, 모두 그제서야 '해난사고'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배중마려와 비교하면 길비진비가 중국에 머물렀던 기간은 비교적 짧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후로 19년에 달한다. 개원23년(일본천평7년, 735년)에 귀국한다.

 

이들 외국유학생들은 귀국후 중국에서 배운 학문으로 본국의 문명을 제고시켰다. 동시에 중화문명의 전파에도 큰 공헌을 한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국가가 강대하면 외국인이 온다. 지금 중국은 여전히 앞다투어 국외로 유학을 떠난다. 몇몇이나 낙후한 가난한 나라로 가는가. 현재 중국도 외국유학생들에게 적지 않은 우대조치를 해주고 있다. 다만 왜 수나라 당나라때처럼 앞다투어 오지 않는 것일까. 바로 중국이 아직은 강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GDP가 세계제일이라고 떠들며 경제규모가 세계최대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종합실력이 말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