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겸16 <해방군보>: 황제와 태상황이 싸울 때는 관망하라? 상령명절불타지(常令名節不墮地) 학계영(郝啓榮) 왕흔(王欣) 명나라때의 명신 우겸(于謙)의 는 이렇게 쓰여 있다: 호화일거난재득(豪華一去難再得) 장기소침토일구(壯氣銷沉土一丘) 단령명절불타지(但令名節不墮地) 신외구구안용구(身外區區安用求) 대체적인 뜻은 부귀는 한번 잃으면 다시 얻기 힘들고, 사람은 뜻을 잃어버리게 되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오직 명절(명성과 절개)을 지켜야하며, 나머지 모든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상령명절불타지.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적인 의미가 있다. 명절은 태산보다 무겁다. 이욕(利慾)은 홍모(鴻毛)보다 가볍다. 우겸은 관직에 여러 해동안 있으면서, 시종 청렴했으며, 명절을 지켰다. 그가 죽은 후에도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토목보의 변"이 발생한 후, 명영종이 .. 2021. 10. 15. 명나라시기 오이라트(瓦剌)는 언제 멸망하였는가?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은 오이라트(瓦剌)의 '가장 휘황했던 시기'이다. 그들은 가볍게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을 포로로 잡았을 뿐아니라, 명나라의 병방요지까지 맹렬하게 진격해 들어갔었다. 만일 우겸(于謙)이 없었더라면 명나라는 그때 멸망했을 것이다. 다만 오이라트의 운은 좋지 못했다. 명나라에 패배하면서 크게 타격을 입었을 뿐아니라, 내부에서 모순이 폭발하여, 스스로 무너진다. 이는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이라트의 역사는 당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민족은 아주 사납다. 하루종일 주변부락과 당나라의 변경을 돌아다녔다. 당나라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오이라트는 죽어도 투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할 수 없이 그들과 싸워야 했고, 백여년.. 2021. 5. 1. 명나라의 최고군사지휘관은? 글: 오수(吳垂)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립한 후, 군대관리에 대하여 고심을 하게 된다. 명나라는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했고, 당연히 무장들의 공로가 가장 컸다. 그리하여 무장들이 발호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그리고 소수인들을 제외하고 대두분의 무장들은 스스로를 절제할 줄 몰랐다. 가.. 2019. 9. 5. 명나라의 북경천도후 남경의 지위는? 글: 풍장안량(風長眼量) 명나라 276년간, 남경의 지위는 아주 특수했다. 특수하다는 것은 남경이 명나라의 정정지지(定鼎之地)이고, 주원장은 남경에서 40년간 있으면서(황제에 오르기 전까지 포함), 천하를 통일했다. 그러나 북원(北元)의 위협이 너무 커서, 명성조 주체는 국도(國都)를 북.. 2019. 1. 9. 탈문지변(奪門之變)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명대종(明代宗) 경태제(景泰帝) 주기옥(朱祁鈺)은 유일한 아들인 주견제(朱見濟)가 죽은 후, 하루빨리 아들은 낳기 위하여 여색을 계속하여 탐한다. 심지어 당시의 명기(名妓) 이석아(李惜兒)까지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이 일은 명나라사람 황경방(黃.. 2018. 12. 5. 경태제(景泰帝) 주기옥(朱祁鈺)은 황태자를 교체하기 위해 어떻게 하였는가? 글: 두문자(杜文子) 황제가 되면 모두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한다. 경태제 주기옥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사정이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대명에는 이미 황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위는 이러했다. 명영종 주기진(朱祁鎭)이 오이라트와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다. 손.. 2018. 9. 20.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