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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탈문지변(奪門之變)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by 중은우시 2018. 12. 5.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명대종(明代宗) 경태제(景泰帝) 주기옥(朱祁鈺)은 유일한 아들인 주견제(朱見濟)가 죽은 후, 하루빨리 아들은 낳기 위하여 여색을 계속하여 탐한다. 심지어 당시의 명기(名妓) 이석아(李惜兒)까지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이 일은 명나라사람 황경방(黃景昉)이 쓴 <국사유의(國史唯疑)>에 나온다.


황제와 명기가 만나는 것은 역사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송휘종(宋徽宗)과 명기 이사사(李師師)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사사는 당시 변경의 명기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송휘종조차도 그녀의 명성을 들었을 정도이다. 그래서 한번 만나보고자 한다. 송휘종은 미복으로 이사사를 만난 후 선녀같은 모습에 완전히 정신을 잃는다. 후궁가려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자주 출궁하여 이사사를 찾아가 만난다. 어떤 때는 대학사 왕보(王黼)를 불러 같이 갔다. 이사사는 점점 송휘종의 진실한 신분을 알게 되고, 자연히 그를 잘 모시게 된다. 송휘종은 이사사를 차지한 후, 다른 사람들은 감히 이사사를 건드리지 못한다. 황제와 여자를 놓고 싸울 수는 없으니 그저 바라만 보고 탄식할 뿐이었다. 무공원외랑 가혁(賈奕)은 원래 이사사와 교정이 두터웠는데, 하루는 술에 취해서 취기가 올라 송휘종을 풍자하는 시를 한 수 쓴다. 송휘종은 그 말을 듣고 내노하여, 가혁을 죽이려고 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사사의 체면을 봐서 경주참군으로 좌천시킨다. 후궁의 미녀들은 송휘종이 일개 기녀에게 빠져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총애를 받던 위현비(韋賢妃)는 송휘종에게 물어본다: "이사사가 도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폐하께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송휘종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게 아니다. 너희들 100명에게 화려한 옷을 벗고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게 하고, 이사사를 그 안에 섞어넣어도, 바로 구별이 된다. 유자일운(幽姿逸韻), 그윽한 자태와 빼어난 운치가 있다. 그것은 얼굴이 에쁜 것과는 다르다." 이를 보면 이사사가 송휘종의 마음에 든 것은 그녀의 풍운(風韻)이 독특하기 때문이었다.


경태제가 이석아를 좋아한 것은 이곡동공(異曲同工)의 맛이 있다. 이석아는 다른 후궁의 비빈들과 비교했을 때, 풍정이 남달랐다. 그래서 경태제의 총애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석아는 개성이 있었다. 다른 후궁들처럼 그저 떠받들지만은 않았다. 경태제와 말다툼도 벌였다. 그리하여 경태제가 화가 나서 이석아를 황궁에서 쫓아내 버린다.


이석아 이후에는 경태제가 다시 당비(唐妃)를 들여서 아주 총애한다. 아쉽게도 경태제를 위하여 아들을 낳아주지는 못한다. 경태7년(1456) 이월, 황후 항씨(杭氏)가 병사하여, 경태제는 더욱 타격을 받는다. 게다가 여색에 빠져 있다보니 자신의 몸이 견디질 못한다.


이때, 경태제는 부득이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기왕(沂王) 주견심(朱見深)은 당연히 고려대상에서 제외했다. 기왕을 다시 황태자로 앉힌다면,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의 세력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경태제가 그동안 형인 주기진을 어떻게 대했던가. 그것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형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고 후임 황제가 되면 자신의 후사를 잘 돌봐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결국 한 명이 떠오른다. 바로 양왕(襄王) 주첨선(朱瞻墡)이다.


양왕 주첨선은 이미 그가 황태자로 세번째 고려하는 것이다. 경태제가 양왕 주첨선을 고려하는 것은 자연히 양왕 주첨선이 외번이어서 만일 즉위한다면 반드시 그에게 감사할 것이고, 최소한 후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려운 점이 있었다. 친왕을 입경시키는 금패는 손태후가 계속하여 장악하고 있었다. 손태후가 어찌 자신의 손자 기왕 주견심을 놔두고, 양왕 주첨선을 세우려 할 것인가? 여러가지를 고려한 끝에 계속 미뤄온 것이다. 경태제는 어쨌든 자신이 아직 젊다고 생각하여, 후사는 아직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놀랄만한 음모가 다가오고 있었다.


탈문지변(남궁복벽)은 실제로 경태제의 병이 위중해지면서, 일부 투기분자들이 생각해낸 것이고, 사전에 주도면밀한 계획같은 것은 없었다. 이 정변에 참가한 사람은 주로 석형(石亨), 환관 조길상(曹吉祥), 왕기(王驥), 장월(張軏), 양선(楊善), 그리고 서유정(徐有貞)이다. 서유정이 주모자이다.


석형은 위남(渭南, 섬서성) 사람이다. 부친의 직위를 이어받아 관하위지휘첨사가 되었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정통제때, 관직이 도독동지에 이르고 참장이 되어, 주면(朱冕)을 보좌하여 대동을 수비한다. 예센(也先)이 대동을 침범했을 때, 명군이 패배하고, 석형은 단기로 도망쳐서, 감옥에 갇히는 등 처분을 받는다. 나중에 북경보위전때, 병부상서 우겸(于謙)은 석형이 오군대영을 관장하도록 추천한다. 석형은 우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큰 공을 세워 무청후(武淸侯)에 봉해진다. 석형은 죄를 지은 패군지장에서 순식간에 관직과 작위를 받았으니 그의 마음 속 깊이는 우겸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우겸의 지우지은에 감사하기 위하여, 석형은 특별히 상소를 올려 경태제에게 우겸의 아들 우면(于冕)이 작위를 봉해달라고 청한 바 있다.


석형도 우겸이 당초 그를 기용한 것은 그저 그가 군사를 잘 알아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공적인 이유이고 사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우겸의 사람됨을 잘 몰랐던 것같다. 우겸은 말한다: "국가에 사건이 많을 때, 신하가 도의상 개인의 은덕을 신경써서는 안된다. 그리고 석형은 대장으로서 그가 은사를 한 사람 추천하거나, 병졸을 한 사람 발탁해서 국가군대에 도움이 되게 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의 아들만 추천하다니, 그게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나는 군공에 대하여는 요행은 극력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아들이 공로를 함부로 차지하게 할 수 없다" 그는 당당하게 석형의 호의를 거절했을 뿐아니라, 그의 사심을 사람들 앞에서 질책한다. 그렇게 많은 대신들 앞에서 석형은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부끄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는 원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이제는 원한만 남는다. 그래서 언젠가 보복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경태제는 석형을 아주 신뢰했고, 총애한다. 그에 대한 총애는  심지어 우겸을 넘어섰다. 웃기는 일은, 경태제의 병이 위중할 때, 그가 신경을 써서 황제를 대신하여 제사의례를 올릴 대신을 뽑는데, 그는 우겸을 선택하지 않고, 석형을 선택한다. 그리고 바로 이 석형은 경태제의 병이 위중한 것을 보자, 딴 마음을 품고, 명영종 주기진을 복벽시켜 불세의 공을 세우려고 밀모한다. 탈문지변후, 경태제는 누군가 변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첫마디가 바로 "우겸이 모반을 일으켰느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역사인물의 미묘한 점은 이번 슬픈 정변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조길상은 탈문지변에 참가한 또 다른 중요인물이다. 그는 영평 난주(지금의 하북성 난현) 사람이다. 환관이다. 일찌기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었던 대환관 왕진(王振)에 빌붙어, 녹천지역(麓川之役), 올량합(兀良哈)정벌, 등무칠(鄧茂七)과 섭종류(葉宗留)를 토벌하는데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바 있다. 당시 명영종이 재위하고 있을 때였는데, 조길상은 총애를 받았다. 경태제가 즉위한 후, 왕진을 일당인 마순(馬順), 모귀(毛貴)등은 모두 피살된다. 조길상은 간사하고 교활하며 틈을 잘 비집고 들어가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금방 금군과 내정시위를 관장한다. 신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이 된다.


왕기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남궁을 지키는 정원백(靖遠伯)이다. 그는 전공을 얻어서 승진하고, 명영종때와 경태제때 모두 신임을 받는다.


장월은 영국공(英國公) 장보(張輔)의 막내동생이다. 묘(苗)를 정벌할 때 군율을 지키지 않아 우겸에게 탄핵을 당한 바 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우겸을 미워했다. 이때는 전부우도독(前府右都督)으로 경영병(京營兵)을 지휘했다. 즉 경사의 병권을 쥐고 있는 실권파 인물이다.


양선은 태상황을 모셔온 예부좌시랑이다. 그는 스스로 불세의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는데, 경태제가 인정을 해주지 않으니, 자연히 명영종에게 도박을 걸 수밖에 없었다.


서유정은 오이라트군대가 경사로 진격할 때, 앞장서서 '남천'을 주장했다가 우겸등에게 반박당한 바로 그 서정(徐珵)이다. 그후 서정은 명성이 너무 나빠져서 조정내외의 조롱을 받고 여러 해동안 승진을 못했다. 서정은 여러번 우겸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국자감제주의 자리를 맡게 해달라고. 그리고 우겸도 경태제에게 그 일을 얘기한 바 있으나, 경태제는 서정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바로 멸시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바로 그 남천을 주장한 서정 말이냐? 그 자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 국자감 제주의 직을 어찌 그런 마음씨를 가진 자에게 맡긴단 말인가?" 그렇게 되자 서정은 아주 우울해진다. 그는 우겸이 중간에서 장난을 쳤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자신의 앞날이 막힌 것이라고 생각하여 우겸에게 뼛속깊이 한을 품는다. 낙담한 그는 내각대삭하 진순(陳循)을 따른다. 그리고 진순의 건의하에 이름을 서유정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경태3년(1452년) 서유정은 좌첨부어사가 된다. 그는 장추(張秋)지구를 찾아가 황하의 치수사업을 한다. 당시 황하는 사만(沙灣)일대의 제방이 터진지 이미 7년이 되었고, 계속 제대로 치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통초년, 황하는 여러번 북쪽으로 제방이 터진다. 그리하여 사만 운도(運道)를 위협했다. 정통13년(1448), 황하는 하남 신향의 팔류수에서 제방이 다시 터진다. 동북으로 산동 장추까지 황하물이 밀려온다. 제방을 무너뜨리고 운도를 막았다 .조정이 놀라서 전후로 왕영화(王英和), 홍영(洪英), 왕섬(王暹), 석박(石璞)등을 파견해서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막고 나면 다시 터지기를 반복하여 근본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경태3년(1452) 육월 황하는 다시 사만운도의 북안이 무너진다. 그리하여 운하물이 동해로 들어간다. 경태4년 오월, 다시 사만묵안이 터지고, '운하물이 염하로 들어가 조운선들이 모두 막힌다.'


이 영향이 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때 서유정은 비범한 행정능력을 발휘한다. 그가 부임한 후, 황하의 상황을 현지조사한 후, 갑문을 설치하고, 지류를 만들며, 운하를 소통하는 세 가지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민공을 조직하여 친히 공사건설을 감독한다. 경태4년말에 착공하여, 경태6년 칠월에 완공된다. "나무, 쇠, 대나무, 돌을 누적하여 만의 수를 쓰고, 인원을 오만팔천여 동원하며, 일자는 오백오십여일이 들었다." 마침내 사만의 결구를 막았고, 수환을 방지하게 된다. 나중에 서유정은 다시 명을 바들어 조하, 제녕등 13개 주현을 순시하며 제방복구작업을 감독했다. 그는 치수에 공로가 있어, 좌부도어사가 된 것이다.


과장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서유정은 중국치수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정치적으로 그는 여러번 간신에 올랐지만, 그는 뛰어난 학자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산동에서 황하의 치수에 성공하면서, 서방보다 근 400년 앞서서 수상방수(水箱放水)실험을 했는데, 이는 과학사상의 일대사건이다. 서유정이 치수에 성공한 1년후인 경태7년(1456), 산동에 홍수가 났다. 제방이 여러 곳 무너졌는데, 서유정이 쌓은 곳만 문제가 없었다. 장추지구의 백성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사만은 예전에 지옥같았는데, 지금은 천당같다." 서유정은 일생이 영욕과 부침으로 얼룩졌고, 공과에 대하여 말이 많다. 이는 역사의 복잡한 다면성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경태8년(1457) 정월 십이일, 경태제는 여전히 병석에 있었다. 여러 날동안 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신하들이 좌순문으로 가서 문안을 한다. 환관 흥안(興安)이 나와서 말한다: "공등은 모두 조정의 고굉인데, 사직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매일 문안을 오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신하들이 유구무언할 수밖에 없었고, 할 수없이 물러난다.


조정에서 여러 신하들이 모여서 조용히 상의하고 있었다. 흥안의 말에 숨은 뜻이 있는 것같다는 것이다. 아마도 대신들에게 후계자를 논의하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사 소유정(蕭維楨)등은 다시 기왕 주견심을 황태자로 세우자고 건의한다. 대학사 소자(蕭鎡)는 기왕은 이미 물러났으니 다시 세우기 어렵고, 마땅히 다른 현량(賢良)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군신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자, 종동(鍾同)의 예전 일을 전철로 삼아 아무도 감히 쉽게 새로 기왕을 후계자로 세우자는 청을 올리지는 못하고, 그저 "하루빨리 후계자를 세워달라"고 청하는 글을 올리기로 한다.


정원십사일 신하들의 상소문이 올라온다. 그러나 경태제는 답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명을 내린다: "짐은 감기에 걸린 것이다. 십칠일에는 조회에 나가겠다. 청한 것은 윤허하지 않겠다." 황제가 정월 십칠일에 조회에 나가겠다고 표시한 것이다. 명나라의 관례에 따르면, 정월십오일 황제는 남교(南郊)로 가서 전례를 주재하고 천지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 신하들은 이것을 경태제의 몸이 호전되었다는 표시로 여기고 각자 물러나 정월 십칠일 다시 논의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경태제는 이미 마음이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원래 정월 십오일에 친히 천지에 제사지내고, 정월 십육일 회궁하고 정월 십칠일 조회에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침대에서 일어나자 바로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한동안 탄식하고나서 경태제는 다른 믿을만한 대신을 보내어 비밀리에 그를 대신헤 남교에서 제사지내게 하기로 결정한다. 이치대로라면, 이런 천자를 대신하여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것은 덕고망중(德高望重)한 노신이 맡아야 한다. 내각이나 육부에서 뽑는다. 그러나 경태제는 자신의 병세가 인심을 동요시킬까 우려하여, 무장을 한명 뽑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 중임이 예상외로 무청후 석형에게 떨어진 것이다.


역사는 이런 우연으로 인하여 다시 쓰여진다.


경태제가 석형을 병상으로 부른다. 그리고 직접 당부한다. 석형은 말하는대로 시원시원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그는 경태제의 병세를 본 다음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물러난 후, 즉시 사람을 전부우도독 장월과 환관 조길상에게 보낸다. 두 사람에게 경태제는 이미 안되겠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살길을 상의하자고 한다.


이때 경사에는 일종의 유언비어가 돌았다. 대학사 왕문정(王文正)이 경태제에게 양왕 주첨선의 장남을 황태자에 앉히라고 주청드렸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왕문정이 최고의 공을 차지하는 것이다. 설사 기왕 주견심을 황태자로 삼게 되더라도 그 논의는 문신들이 하는 것이고 석형, 장월같은 무신에게는 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석형은 이렇게 말한다: "경태제의 병이 이미 침중하여, 만일 불측의 사태가 있으면, 황태자도 없다. 차라리 이 기회에 상황을 복위하도록 청하여 불세지공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이 3명의 야심만만한 투기분자들은 태상황 명영종에게 도박을 걸어, 명영종을 옹립하여 복위시키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세 사람은 대공신이 되고, 비황등달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3사람이 업무를 나눈다. 환관 조길상은 입궁하여 손태후에게 청하여 복벽건을 그녀에게 알리고, 손태후의 지지를 받아낸다. 석형과 장월은 함께 태상사정경(太常寺正卿) 허빈(許彬, 명영종을 선부에서 맞이한 사람)을 만나 상의한다. 허빈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손으로 이마를 가린다: "이것은 불세의 공이다. 그러나 나는 늙었고, 쓸모가 없다. 서유정에게 계모가 많으니, 너희는 그를 찾아가서 상의해보라."


석형과 장월은 밤을 세워 서유정을 찾아간다. 서유정은 크게 흥분하며, 그 자리에서 천상을 보더니 자미에 변고가 있다며 급히 말한다: "제성(帝星)이 이미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이 일을 빨리 손써야 한다." 세 사람은 상세하게 계획을 세우고 정월 십육일 저녁에 거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정월 십육일, 이부상서 왕직(王直), 예부상서 호영(胡濙), 병부상서 우겸은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여, 함께 기왕을 황태자로 세우자고 주청하기로 결정한다.


사람들이 상로(商輅)에게 상소문을 초안하도록 추천했고, 상소문이 완성되자 이미 저녁이 되어, 조정에 올리기에 늦었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은 다음 날 경태제가 조회에 나올 때 상소문도 같이 올리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다. 그날 밤에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 만일 기왕을 황태자로 복위시키자는 상소문이 하루 먼저 올라갔더라면, 아마 우겸등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짦은 몇 시진은 대명의 역사를 바꾸었을 뿐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일생도 바꾸어 놓는다.


정원 십육일 저녁, 서유정은 조복을 갈아입고 긴장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을 떠난다. 떠나기 전에 처와 딸에게 알렸다: "나는 큰 일을 하러 간다. 성공하면 국가의 복이고, 실패하면 우리 서씨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너희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


문을 나선 후, 서유정은 가는 길에 양선과 왕기를 같이 데려간다. 양선과 왕기 두 사람은 모두 죽음으로 태상황에게 보답하겠다고 맹세한다. 왕기는 당시 이미 칠십여세였다. 그런데 친히 갑옷을 타고 말에 올랐을 뿐아니라, 아들과 손자들까지도 데려간다. 이들은 석형, 조길상과 만난 후, 다시 장월이 경영병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려, 함께 황성을 향해 진격한다. 장월이 병력을 이끌고 경성으로 들어간 것은 오이라트가 변경을 침범했다는 핑계를 대고 경성의 안전을 보호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석형은 황성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서 통행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 사고(四鼓)시경 한 무리의 인미가 장안문을 통하여 직접 황성으로 들어간다. 자금성에 들어간 후, 서유정은 다시 대문을 닫아 걸고, 외부에서 구원병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열쇠는 도랑에 던져 버린다. 황성내의 수비군은 이들이 아주 괴이하다고 보고,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래도 감히 나서서 묻지는 못한다.


이때 날씨가 돌연 급변한다. 검은 구름이 밀려와서 손을 뻗어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하늘의 뜻을 거슬려 천견(天譴)을 받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여 모두 어쩔 줄 몰랐다. 천상에 정통한 서유정이 이때 나서서 사람들에게 물러나지 말라고 말한다. 대사는 반드시 성공한다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계속 전진하여 순조롭게 남궁에 도달한다. 그러나, 남궁의 궁문은 아주 견고해서 어떻게 해도 열리지 않았다. 석정은 사람을 보내어 거목(巨木)을 밧줄에 걸고, 수십명이 함께 나무로 문을 쳤다.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문 오른쪽 옆의 담장에 큰 구멍이 생긴다. 사람들은 담장의 구멍을 통하여 몰려 들어간다.


명영종 주기진은 이때 아직 잠이 들지 않았다. 촛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돌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동생이 자기를 죽이러 사람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들이 갑자기 바닥에 엎드리더니 만세를 외치는 것이다. 명영종 주기진은 그제서야 묻느다: "너희는 나를 복위시키려 온 것이냐? 이 일은 신중해야 한다."


이때 검은 구름이 돌연 걷힌다. 달이 밝게 빛나고 별도 드물게 보였다. 사람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진다. 명영종 주기진을 모시고 대내로 진격한다. 가는 길에 명영종 주기진은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물으면서 공신들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한다.


일행이 동화문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는 병사가 앞으로 나서서 막는다. 그때 명영종 주기진이 나선다. 자신이 태상황이라고 밝혔다. 문을 지키는 사병은 깜짝 놀라서 감히 길을 막지 못한다. 그히하여, 사람들은 칼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황궁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황제가 조회를 거행하는 봉천문(奉天門)으로 가서 신속히 명영종 주기진을 봉천전의 보좌로 모시고 간다. 봉천전을 지키는 무사들이 무기를 들고 서유정등을 공격하려 하자, 명영종 주기진이 소리쳐서 막는다. 서유정 등은 같이 절을 하며 '만세'를 소리높여 외친다. 석정은 종고(鐘鼓)를 울려서 신하들을 불러모은다.


하늘이 이미 밝아오고 있으므로 여러 신하들은 경태제가 미리 얘기한대로 오늘 조회에 나오는 것인줄 알았다. 그래더 일찌감치 모두 오문(午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종고가 울리자 살마들은 순서에 따라 봉천문으로 걸어들어온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그들을 멍하게 만든다. 보좌 위에 앉아있는 황제는 이미 경태제 주기옥이 아니라, 8년전의 명영종 주기진이었다. 신하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일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람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서유정이 나서서 소리친다: "태상황께서 복벽하셨다." 명영종 주기진도 백관들에게 선포한다: "경태제의 병이 위중하여 여러 신하들이 나를 다시 맞이하여 복위했다. 너희는 원래 맡았던 관직을 그대로 맡아라." 신하들은 이 광경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명영종 주기진은 이렇게 다시 황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탈문지변'이다.


명영종 주기진이 다시 황위에 앉을 때, 경태제 주기옥은 건천궁(乾天宮) 서난각(西暖閣)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조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데, 돌연 종과 북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좌우에 물어본다: "설마 우겸이냐?" 그 뜻은 우겸이 모반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좌우는 경악하여 어떻게 대답해야할 지를 몰랐다.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우겸은 나라와 사직에 불세의 공을 세웠다. 특히 경태제의 등극시키고, 신속히 국면을 안정시키는데 우겸의 역할을 막대했다. 우겸이 없으면 경태제의 황위는 안정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경태제는 우겸에 대하여 총애와 신임을 보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 경태제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가 신임하는 사람도 경계하는 마음이 있을 줄은. 제왕의 박정과은(薄情寡恩)은 이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조금 후, 환관 흥안이 돌아와서 태상황이 복위했음을 고한다. 경태제는 연이어 말한다: "좋아, 좋아, 좋아." 그후에 몇번 숨을 들이킨 다음 다시 침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벽을 향해서 잠이 든다. 그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 속으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상실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똑똑히 깨달았다. 모든 것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그가 형에게 행했던 모든 독랄한 수단들은 배가되어 자신에게 닥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영종의 탈문지변은 황위쟁탈의 정변이다. 명나라의 정변횟수는 당나라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당나라의 빈번한 정변은 주로 환관의 권력독점과 번진의 난립에 있었다. 명나라는 비록 환관의 권력농단이라는 심각한 국면이 있기는 했지만, 여러번의 정변은 더욱 복잡한 역사배경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몇 마디 덧붙이자면, 명나라의 정변에서 성공한 것은 명성조 영락제 주체와 명영종 주기진 뿐이다. 그리고 명영종 주기진의 성공은 그가 사전에 전혀 모르는 상황하에서 아주 우연한 기회로 다시 등극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