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의 북경천도후 남경의 지위는?

중은우시 2019. 1. 9. 21:56

글: 풍장안량(風長眼量)


명나라 276년간, 남경의 지위는 아주 특수했다. 특수하다는 것은 남경이 명나라의 정정지지(定鼎之地)이고, 주원장은 남경에서 40년간 있으면서(황제에 오르기 전까지 포함), 천하를 통일했다. 그러나 북원(北元)의 위협이 너무 커서, 명성조 주체는 국도(國都)를 북경으로 천도한다.


주체의 정치적 기반은 북평(北平)에 있었고, 남경에서 그는 인심을 그다지 얻지 못했다. 그래서 영락원년 즉 1403년, 주체는 조서를 내려 북평을 북경으로 고치고, 천도할 준비를 했다. 이때의 북경은 아직 정식 국도가 아니었다. 그저 "행재(行在)"였다. 어쨌든 북경에는 황궁을 대규모로 건축해야 했다. 영락19년, 즉 1421년초,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주체는 정식으로 북경을 국도(경사)로 정하고, 원래의 국도인 남경은 유도(留都)로 격하시킨다.


유도의 급은 배도(陪都)보다 높다. 생생한 비유를 들자면, 배도는 첩이고, 유도는 전처이다. 주체는 남경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경은 그의 부친 주원장이 천하를 얻은 곳이다. 명효릉도 거기에 있다. 이 점에서 남경은 더 이상 국도가 아니라고 정했지만, 정치적인 지위는 낮출 수 가 없다. 원국도 남경의 모든 정치기구는 원래 그대로 보류한다. 예를 들어 북경에 육부가 있으면, 남경에도 육부가 있다. 상서, 시랑이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 당연히, 남경의 육부상서는 무슨 권력은 없다. 북경의 육부에서 은퇴하여 내려오거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쫓겨온 경우이다.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다: 남경에 육부아문이 있지만, 호부는 돈을 거두지 못하고, 병부는 군대를 움직이지못하고, 예부는 과거를 관리하지 못한다. 많은 관리가 출근하지만, 낮잠을 자거나, 아니면 차를 마시면서 이빨을 깐다.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남경응천부의 지위는 북경순천부와 동급이다. 합쳐서 이경부(二京府)라고 불렀다.


주체가 죽은 후, 명인종 주고치(朱高熾)는 북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남경에서 북경으로 양식을 공급하는 비용도 많이 들었다. 주고치는 그래서 국도를 남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조서를 내려 북경의 각 아문은 모두 다시 '행재'로 불리게 하고, 남경을 다시 국도로 삼는다. 주고치는 재위10개월만에 어찌된 일인지 붕어한다. 영무한 명선종 주첨기가 즉위한 후, 북원을 상대하기 위하여 북경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저 명의상 명선종때의 북경은 실재로 그저 행재였고, 정식국도는 여전히 남경이었다.




명영종 정덕6년(1441년) 십일월, 조정은 정식으로 남경의 유명무실한 국도지위를 폐지하고, 다시 북경을 경사로 승격시킨다. 그 후 남경의 유도 지위는 더 이상 바뀌지 않는다.


남경의 정치적 지위는 내려갔다. 그러나 경제적 지위는 남경이 북경보다 높았다. 먼저, 북경은 '고한지지(苦寒之地)'에 위치하고 있어, 양식공급을 남직예에서 북으로 운반해야만 했다. 강남은 명나라의 돈주머니, 쌀주머니이다. 강남의 돈과 양식이 없으면, 경사는 굶어야 한다. 남경은 유도이고, 조상의 능침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강남의 중심이다. 명나라때 남경의 정치, 군사적 지위로 강남의 돈과 양식을 통제한다. 명나라가 천도한 이후에도 남경에 10만의 병마를 남겨둔다. 만력연간에 이르러, 각종 원인으로 남경의 병력은 겨우 4만만 남게 된다.


사병이 적어졌지만, 백성은 많아졌다. 만력말기에 남경인구는 이미 백만을 돌파했다. 명신종 만력년간은 천하가 태평했고, 유도성내의 호구는 백만가에 이른다. 명무종 정덕제때, 어떤 관리는 남경의 지위를 이렇게 평가했다. 태종황제(주체의 이전 묘호)가 북경으로 천고하였지만, 북경이 의지하는 돈과 양식 기물은 모두 남경에서 가져갔다. 


남경은 서부, 남부의 물자가 북경으로 들어가는 중간역이라 할 수 있다. 남겨은 장강의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어, 사천, 호광, 강서의 물자가 장강을 따라 남경으로 내려온 후 운하를 통해 북경으로 보내는 것이다.


님걍이 경제적으로 잠시 쇠락한 시기가 있었다. 즉 주체가 처음 북경으로 천도했을 때, 남경성의 많은 민호(民戶), 공장(工匠)을 데려간다. 그러나 남경의 특수한 정치, 역사와 지연으로, 남경은 금방 남방중심도시의 지위를 되찾는다. 주체가 데려간 것은 관방수공업자였고, 민간수공업자들은 관방수공업자가 떠난 후의 공백을 메웠다. 여기에는 방직업, 인쇄업, 동기철기목기, 와사(瓦肆), 구란(句欄)등 오락장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가정, 만력연간에 강남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남경은 정국의 중요한 오락중심이 된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진회팔염(秦淮八艶)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만력41년, 알바로 세메도(Albaro Semedo)라는 포르투갈 선교사가 남경으로 와서 선교활동을 한다. 중국이름은 증덕소(曾德昭)라고 지었다. 증덕소는 명나라때 23년간 머물렀는데, 1636년 포르투갈로 귀국한다. 그는 책을 하나 썼는데, <대중국지>이다. 여기에서 명나라를 상세히 소개했다. 특히 남경의 경제발전상황이 기록되어 있어, 사료가치가 아주 높다.


남경에 대한 평가에서 증덕소는 이렇게 말했다. 남경은 명나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좋은 도시이다. 길거리는 아주 넓고, 깨끗하다. 백성들은 예절바르다. 가장 놀라운 일은 남경에 대량의 오락장소가 있다는 것이다. 매일 사람들이 오가는데, 너무 많아서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어떤 사람이 증덕소에게 물은 적이 있다. 북경이 명나라의 국도가 아니냐고. 설마 남경보다 작으냐고. 증덕소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다 북경은 그저 정치적으로 수도이고, 경제적인 수도는 역시 남경이다.


각도를 바꾸어 보자면, 북경은 국도이고 남경은 유도이다. 즉 예비국도이다. 일단 북경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국도는 바로 남경으로 이전된다. 토목보의 변때, 명영종이 포로로 잡힌다. 어떤 관리는 남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다행히 우겸이 이를 제지했다. 당시에 천도하는 것은 당연히 안될 말이다. 그러나 명나라말기의 대란때, 게다가 후금이 위협할 때, 남경으로 천도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복왕 주유송등이 혼용무도하여, 남경의 좋은 자원을 다 날려버렸다. 청나라가 통일된 후, 남경의 유도지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다. 강녕부(江寧府)로 격하된다. 그러나 여전히 강남의 대도시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