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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화9

촉한(蜀汉) 후기에 인재가 없게 된 근본 이유는...? 글: 역사대작회(历史大炸烩) 촉중무대장(蜀中无大将) 요화충선봉(廖化充先锋) 촉은 왜 후기에 인재가 결핍되었을까? 촉은 삼국정립시기 비교적 특수한 정권이었다. 유비는 당시 18로제후들 중에서 명성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고, 어떻게 보더라도 조역이었으며, 언제든지 원소나 황건적에게 소멸될 터였다. 그러나, 그는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똑똑해지고, 살아남은 자가 왕이 되는 법이다. 손권, 조조등 세력이 강력한 자들을 모두 제거한 후, 귀퉁이에서 발전하고 있던 유비도 마침내 세력을 이루게 된다. 촉한의 굴기는 유비가 남의 것을 훔쳐서 이룬 것이다. 동시에 유비는 스스로 유황숙으로 칭하면서,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유일한 정통혈맥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인재들이 그에게 의탁하게 되었.. 2024. 1. 2.
제갈량 vs 이엄 (3): 촉국 인재고갈의 원인이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230년, 이엄은 제갈량에 의해 한중으로 옮겨가고,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를 관리한다. 231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기산을 나선다(제4차북벌). 이엄은 양초의 운송을 책임진다. 이번 북벌은 제갈량과 사마의가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였다. 구체적인 전황은 여기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여름,가을이 교체하는 시기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양식운송이 되지 않았다. 이엄은 참군 마충, 독군 성번을 보내 제갈량에게 철군하도록 말을 전한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철군한다. [의사리] 이엄이 제갈량에게 철군을 통지하였다는 내용의 원문은 이러하다: "평견참군호충(平遣參軍狐忠) 독군성번유지(督軍成藩喩指), 호량내환(呼亮來還)" 여기의 유지(喩指)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이엄이 후주 유선의 뜻이라고 .. 2022. 3. 9.
촉한(蜀漢)에서 강유(姜維)의 북벌을 반대한 세 사람은..... 글: 구개명(瞿凱明) 제갈량은 생전에 계속 북벌을 주장했고, 정사기록에 따르면 전후로 5회에 걸쳐 북벌을 진행한다가 오장원에서 병사한다. 그는 진정 "국궁진췌(鞠躬盡瘁), 사이후이(死而後已)"를 실천했다. 제갈량의 사후, 강유는 제갈량의 계승자로서 계속 북벌을 주장하고 한실의 부흥을 도모했다. 그러나, 강유의 북벌에 대하여 3명이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촉한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다. 비록 그들이 강유의 북벌을 강력하게 막았지만, 강유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북벌을 감행한다. 강유의 북벌을 반대한 첫번째 인물은 비위(費褘)이다. 비위는 관직이 대장군에 이른다. 보정(輔政)기간동안 강유가 매번 북벌할 때마다 비위는 제한한다. 강유에게 제공한 병력은 만명을 넘지 않았다. 비위는 강유에게.. 2021. 12. 1.
관우가 형주를 지킬 때, 그의 문신무장(文臣武將)은 누가 있었을까? 글: 이치아(李治亞) 유비(劉備)가 형주를 차지한 후, 서천(西川)을 칠 때, 제갈량(諸葛亮)으로 하여금 형주를 지키게 한다. 당시 형주에는 많은 명장이 있었다. 제갈량이 형주의 수비총사령관이고, 관우(關羽)는 양양(襄陽)의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장비는 영사군순강(領四郡巡江)이었고.. 2018. 7. 21.
유비(劉備) 군중의 황건적 출신인물은...? 글: 살소(薩蘇) 삼국중 촉국의 장군중에서 요화(廖化)는 황건적 출신이다. 기실 연의에서는 황건적의 면모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비천야차(飛天夜叉) 하만(何曼), 관해(管亥)등등 황건적 출신들이 적지 않다. 예를 글어 관운장의 오관참육장때 그 안에 기수관(沂水關)의 수비장수 변희(卞喜.. 2018. 1. 11.
삼국소인물(6): 요화(廖化), 촉한의 명장 글: 살소(薩蘇) 이런 말이 있다. "촉중무대장(蜀中無大將), 요화작선행(廖化作先行)". 실제로 삼국연의를 자세히 읽어보면, 요화는 삼국시대에 명장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가 명장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저 시운을 만나지 못해서일 것이다. 요화가 명장이 되.. 2018.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