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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유비(劉備) 군중의 황건적 출신인물은...?

by 중은우시 2018. 1. 11.

글: 살소(薩蘇)


삼국중 촉국의 장군중에서 요화(廖化)는 황건적 출신이다. 기실 연의에서는 황건적의 면모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비천야차(飛天夜叉) 하만(何曼), 관해(管亥)등등 황건적 출신들이 적지 않다. 예를 글어 관운장의 오관참육장때 그 안에 기수관(沂水關)의 수비장수 변희(卞喜)는 바로 황건적 출신이다. 유비의 삼형제는 연의에서 황건적을 토벌한 영웅으로 나온다. 그러나, 유비의 부하중에는 황건적 출신이 적지 않다. 가장 유명한 이는 바로 요화, 주창(周倉)과 배원소(裴元紹)이다. 그외에 유벽(劉辟), 공도(龔都)도 역시 황건적 출신이다.


민간의 평화에서 이들 황건적 출신들에 대하여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를 얘기해보자.


삼국평화(三國評話)에서 요화는 장량(張梁)의 선봉이다. 관우에 귀순했다가 조운이 데려간 배원소는 장보(張寶)의 선봉이었다. 주창은 장보의 부선봉이었다. 유벽과 공도는 지위가 더 낮았다. 그저 '황건여당(黃巾餘黨)'이라고 되어 있다. 그들의 활동범위를 보면 황건적의 고위장수 파재(波才)의 군대에 속해 있었다.


황건적출신의 장수들은 특색이 있다. 그것은 기문병인(奇門兵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혹은 출신종교세력으로 인하여 무기도 법기(法器)를 쓴다. 모양이 기이하지 않으면 신도들을 끌어모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화는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를 잘 썼고, 주창은 연병쌍정추(軟柄雙釘錘)를 잘 썼으며, 배원소는 쌍수장추(雙手長錘)를 썼다. 이런 특징은 황건적중에서 유비의 부하들에게서만 나타나는게 아니라, 조조의 부하인 변희 총병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병기는 무협소설의 일조연편(一條軟鞭)에 유성추(流星錘)를 더한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관우의 목숨을 빼앗을 뻔한 무기이다.


앞의 세 사람 중에서 황건군내에서 가장 지위가 낮았던 사람은 주창이다. 나중에 가장 유명해진 것도 주창이다. 역사상의 주창은 그저 한번 나온다. 단도회(單刀會)때 큰 소리로 "한가토지(漢家土地)에서는 덕이 있는 자만이 있을 수 있다."고 소리친 대장부이다. 만일 그가 정말 주창이라면, 정치적 수준이 꽤 괜찮았던 것같다. 아마도 관우의 뒤에 서서 관우가 읽는 <춘추>를 보고 수양을 쌓았는지도 므렉ㅆ다. 삼국평화에서 주창의 이미지는 피부색이 새까맣고 눈빛이 날카롭다는 것이다. 봉목시성(蜂目豺聲), 전라호수(田螺鬍鬚)에 수전에 능했다. 마치 남해바다에서 온 구리빛피부의 토착민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장국량(張國良) 선생은 그의 무예에 대하여 높이 평가했다. 삼국 일류의 보장(步將)이라는 것이고, 호거아(胡車兒), 조린상(刁麟翔)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하다는 것이다. 그가 처음에 관우를 만났을 때 종도공(縱跳功)으로 연속 108번 추를 내려친다. 관우는 일시에 반격할 기회를 찾지 못한다. 그후에 방덕을 생포하는 경력도 있다. 오늘날에도 관제묘의 뒤에는 반드시 주창장군이 서 있는데,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화는 자가 원검(元儉)이고, 삼국때 가장 장수한 무장이다. 비록 수련한 시간은 길지만, 요화의 무공은 보통이었다. 배원소만 못했다. 관우가 요화를 거둔 후에도 그는 관우를 곁에서 따라가지 못하고, 그저 현지에 주둔하며, 유비의 대군을 기다린다. 관우가 간 후 요화는 산채에 식량이 부족하자,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강도짓을 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가 강탈하려던 것은 바로 관우를 쫓아가서 원수를 갚으려던 채양(蔡陽)이었고, 유화는 그를 보자마자 도의 고수인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보고 겨우 3합을 겨룬 후 칼을 버리고 도망친다. 산채도 버린다. 관우는 유비를 만나서 요호를 거두었는지 물어봤으나 이미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형조에 가서야 요화는 그들을 찾아온다. 그후에 요화는 촉한의 상록수가 된다.


요화는 확실히 명이 길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소주평화에 따르면, 백세요화위선행(百歲廖化爲先)行)이라고 한다. 철룡산 일전때 이미 백살이라는 것이다. 그는 촉국이 멸망한 후에 죽는다. 아마도 당시의 장수 챔피언일 것이다.


배원소는 삼국에서 운이 없는 맹장이다. 그는 무예가 뛰어났지만, 그가 탄 말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좋은 말을 찾다가, 곽가장에서 관우의 적토마를 빼앗으려다가 관우에게 붙잡혀 거두어진다. 관우는 마찬가지로 그에게 자신을 따르게 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현지에 주둔하며 유비의 대군을 기다리게 한다. 관우가 떠난 후, 배원소는 계속 말을 찾는다. 마침 말장수가 지나가서 산을 내려가 길을 막는다. 그 말장수의 다른 말은 놔두고, 말장수가 타고 있던 학정룡구(鶴頂龍駒)가 탐이 나서 배원소는 그것을 사겠다고 하는데, 말장수가 팔지 않는다. 그리하여 싸움이 벌어진다.


배원소는 운이 나빴다. 그 말장수는 바로 공손찬쪽에서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나온 조운(趙雲)이었다. 말은 백마의종(白馬義從)의 유물이고, 말장수로 분장해서 유비를 찾고 있었다. 어찌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팔겠는가? 두 사람이 싸우게 되었는데, 배원소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 같은 편이고, 상대방이 그 유명한 조자룡일 줄은.


조운은 무공이 뛰어나지만, 배원소도 만만치 않았다. 주창이 그의 부수(副手)였는데, 관우와 수십합을 겨룰 수 있었다. 그러니 그의 재주도 만만치 않았다. 쌍방이 수십합을 싸운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배원소가 탄 말이 형편없었다. 배원소의 병기는 쌍수장추이고, 조운의 장창과 부딛쳤다. 두 사람은 모두 힘이 좋은데, 있는 힘을 모두 쓰자, 배원소의 말이 버티질 못하고 그 자리에서 등뼈가 부러져, 입으로 피를 토하고 죽는다. 배원소가 말에서 떨어지는데 마침 조운의 창에 그의 목이 찔린다. 이렇게 배원소는 유비의 부하 황건적 중에서 가장 먼저 죽는 인물이 된다.


유벽, 공도는 모두 삼류무장이다. 두 하람은 금도(金刀)와 은도(銀刀)를 가지고 있어 병기에서도 그다지 특이한 점은 없다. 그러나 전설은 하나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관우가 조조의 군에서 여남(汝南)을 취할 때의 일이다. 진진(陳震)은 미리 관우와 연락을 하여 두 사람을 내보내 관공과 거짓으로 삼합을 싸우고 여남을 내주겠다고 한다. 두 사람은 처음에 겁을 먹었지만, 나중에 가짜싸움이라는 말을 듣자 서로 먼저 나서려고 한다. 왜냐하면 안량이 관공과 겨우 1합만에 죽었는데, 만일 관우와 3합을 싸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로 먼저 나서려고 거의 싸우다 시피 하고, 나중에 진진이 그들 둘에게 뽑기를 해서 결국 공도가 나서게 된다. 관우와 싸우는데 수십합이 지났지만 그는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는 관우와 삼백합은 싸우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천하제이도라는 명성을 얻으려고...


나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관우의 앞에서 칼춤을 추다" 바로 공도를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