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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촉한(蜀漢)에서 강유(姜維)의 북벌을 반대한 세 사람은.....

by 중은우시 2021. 12. 1.

글: 구개명(瞿凱明)

 

제갈량은 생전에 계속 북벌을 주장했고, 정사기록에 따르면 전후로 5회에 걸쳐 북벌을 진행한다가 오장원에서 병사한다. 그는 진정 "국궁진췌(鞠躬盡瘁), 사이후이(死而後已)"를 실천했다.

 

제갈량의 사후, 강유는 제갈량의 계승자로서 계속 북벌을 주장하고 한실의 부흥을 도모했다.

 

그러나, 강유의 북벌에 대하여 3명이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촉한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다. 비록 그들이 강유의 북벌을 강력하게 막았지만, 강유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북벌을 감행한다.

 

강유의 북벌을 반대한 첫번째 인물은 비위(費褘)이다.

 

비위는 관직이 대장군에 이른다. 보정(輔政)기간동안 강유가 매번 북벌할 때마다 비위는 제한한다. 강유에게 제공한 병력은 만명을 넘지 않았다.

 

비위는 강유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승상(제갈량)과 차이가 너무 크다. 승상도 중원을 수복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가 가능하겠는가? 차라리 힘을 길러서 장래 능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 요행으로 한두번 성공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큰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고, 후회해도 늦을 것이다.

 

<삼국지>는 <한진춘추>의 기록이 위와 같이 인용되어 있다. 비위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강유의 북벌을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그는 차라리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을 해야 하고, 북벌은 나중에 논해도 된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강유의 북벌을 반대한 사람은 장익(張翼)이다.

 

장익은 관직이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이르러, 요화(廖化)와 관직이 동급이었다.

 

연희18년(255년), 장익은 강유와 함께 성도(成都)로 돌아온다. 강유는 북벌을 주장한다. 당시 오직 장익만이 강유와 변론을 펼친다.

 

장익은 이렇게 반대한다: 국가가 약소하고, 백성은 매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받쳐줄 수가 없다. 장기적으로 대외전쟁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강유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삼국지.장익전>에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익은 위나라와 비교하면 촉한은 약소하고, 매년 전쟁을 일으키면 실로 버티기 힘들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강유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북벌을 고집했다.

 

촉한이 멸망한 후, 종회(鍾會)가 성도에서 난을 일으키고, 장익은 난군에게 피살된다.

 

세번째로 강유의 북벌에 반대한 사람은 요화(廖化)이다.

 

요화는 촉한의 원로급 중신이다. 여러번 제갈량의 북벌에 따라갔고, 관직이 우거기장군(右車騎將軍)이다.

 

경요5년(262년), 강유가 병력을 이끌고 적도(狄道)를 나간다. 요화는 그에게 이렇게 권한다. 우리는 위나라만큼 강대하지 않다. 실력차이가 너무 크다. 매년 병력을 일으켜 전쟁을 하고 쉬지를 않으면 어떻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삼국지>에서 인용한 <한진춘추>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강유는 요화의 말을 듣지 않고, 북벌을 고집한다. 경요6년(263년) 위나라가 촉을 공격하고, 등애(鄧艾)는 음평으로 몰래 넘어갔고, 촉한이 멸망한다.

 

경원5년(264년) 봄, 요화는 낙양으로 옮겨가는 도중에 병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