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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7

<이십사사(二十四史>에 왜 <서하사(西夏史)>는 없을까? 글: 서소봉(舒小峰) 서하왕릉을 갔을 때는 이미 초가을의 황혼녘이었다. 여행객들은 점점 떠나고, 능원은 조용했다. 서하왕릉은 필자가 영하(寧夏)여행의 주요목적지중 하나였다. 서하의 개국황제 이원호(李元昊)의 묘 앞에서, 천년전의 그 신비왕조가 이때 나와 지척거리에 있어서 손만 .. 2018. 12. 4.
초(肖): <백가성(百家姓)>에 나오지 않는 대성(大姓) 글: 소담야사(笑談夜史) 문자의 출현은 사람의 교류와 생활을 크게 편리하게 만들었고, 한 지역의 역사발전을 바꾼다. 한자문화권에서 중국은 문자를 기초로한 성씨문화가 연원이 길다. 매 성씨는 모두 자신의 독특한 역사연원이 있다. <백가성>은 중국전통의 아이들이 공부할 때 처.. 2018. 12. 3.
송(宋) 요(遼)간의 4대전투 글: 장효민(張曉珉) <요사(遼史)>의 기록에 따르면, 짧은 13일내에 송나라와 요나라간에는 4번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4번의 전투결과에 대하여 <요사>에는 역사책이 영원히 기록하고 있지만, <송사>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송,요의 제1차대전은 십일월 초하루에 발생한.. 2016. 8. 6.
동단국(東丹國): 발해의 후예? 글: 남아행(男兒行) 중국의 역사책을 펼치면, 현란한 왕조교체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왕조교체는 역사가 전진하는 동력이다. 하나의 새로운 왕조는 항상 이전의 구왕조의 멸망으로 탄생한다. 발해국도 예외는 아니다. 처음에는 진국(震國)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하고, "해동성국(海東盛國)".. 2013. 5. 18.
서하(西夏)개국황제는 왜 3가지 성(姓)을 가졌는가? 글: 몽광정우(夢光情雨) 11세기초인 1004년, 송,요 두 나라는 유명한 '전연지맹"을 맺는다. 당말의 '안사의 난'이후 계속하여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중국의 북방지역에 드디어 평화의 기운이 돌게 된 것이다. 중원을 점거한 북송왕조는 태평성대를 누렸고, 모든 것은 완벽했다. 더 이상 재난.. 2012. 8. 15.
소태후는 어떻게 국내외를 다스렸는가? 글: 장계합(張繼合) 어떤 여자가 대시인 볼테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인이 연약함으로 자신을 무장할 때 가장 강하다." 이 말은 요나라의 '여황'과 같은 인물로 대권을 장악했던 소태후, 소작의 생각과 일치한다. 여성의 아름다운 눈물은 쉽게 남자들로 하여금 눈앞의 상황을 제.. 2012. 6. 3.
소태후(蕭太后)는 어떻게 조정을 장악했는가? 글: 장계합(張繼合) 중국역사는 일방적이다. 남자들중 운이 좋은 사람이 자연히 주인공이 된다. 운이 나쁘면 조연이 된다. 여자는 '단역'조차도 할 자격이 없었다. 당당하게 조정에 들어가서 정사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거란국지>와 <요사>만이 예외적이다. 이 정권은 '집.. 2012. 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