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소태후)

소태후는 어떻게 국내외를 다스렸는가?

by 중은우시 2012. 6. 3.

글: 장계합(張繼合)

 

 

 

어떤 여자가 대시인 볼테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인이 연약함으로 자신을 무장할 때 가장 강하다." 이 말은 요나라의 '여황'과 같은 인물로 대권을 장악했던 소태후, 소작의 생각과 일치한다. 여성의 아름다운 눈물은 쉽게 남자들로 하여금 눈앞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만든다. 몇번 울면 천하가 태평하다. 이러한 '부드러운 방식'은 일본만리(一本萬利)이다. 소작은 일찌감치 이 도리를 잘 알았다. <요사. 후비열전>에는 당연히 이런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구체적으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황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모친은 과부이고 자식은 어리다. 부족내의 강한 남자들이 있고, 변방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야율사진, 한덕양이 나와서 아뢰기를 '신등을 믿으면 걱정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황후는 야율사진, 한덕양을 대정의 결정에 참여하게 하고, 월휴가에게 남쪽 변방의 일을 맡겼다."

 

이것은 요경종이 죽은 후, 가장 중대한 인사조치이다. 소작은 금방 '정치적 적계'를 결정한다. 야율사진은 야율현의 당숙이고, 요나라조정의 실권파라 할 수 있다. 한덕양은 비록 한족신하이지만, 소작의 '오랜 친구'이고, 믿을 만하다. 황후는 이제 과부가 되었고 인비황화수(人比黃花瘦)이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한바탕 울음을 보인다. 누가 가슴아프지 않겠는가? 야율사진과 한덕양이 즉시 가슴을 치며 앞으로 나서서 충성을 맹세한다. 소작은 감격하여 그들을 바라본다. 눈물 속에서 두 줄기 광채가 빛난다. 이 말등에서 자란 여인은 대초원과도 같은 흉금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用人不疑)"했다. 즉 군정대권을 이 고굉대신들에게 맡겨버린다.

 

소작의 손에는 두 가지 뜨거운 감자가 있었다. 하나는 내정을 통제하는 것이다. 거란인도 좋고, 한인도 좋고, 조정의 적이면 모두 쳐야 한다. 나에게 쓸모있는 자이면 모조리 끌어들인다. 다른 하나는 외교개척이다. 남쪽의 송나라, 북쪽의 여진. 동쪽의 고려, 서쪽의 당항....이들은 온 몸에 가시를 가득 세우고 있는 이웃들이다. 누구 하나 만만한 나라가 없다. 가까워서도 안되고 멀어서도 안된다. 요나라의 외교는 바로 이 여인이 어떻게 그 균형을 유지하느냐에 달렸다.

 

여인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의미가 심장하다. 이것은 요경종 사후의 권력안배를 순조롭게 만들었다. 소작은 경중과 완급을 잘 알았다. 먼저 '총칼'을 장악한다. 궁정숙위, 남경유수와 같은 주요부서는 자신의 심복으로 바꾼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규정을 만든다. 특히 교만방자한 종실친왕들로 하여금 '여러 왕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사사로이 서로 만나지 말 것"을 명한다. 이것은 결국 창칼을 뺏고 집단적으로 연금시킨 것과 다름없다.

 

당연히, 골육상쟁의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일을 만나면, 소작은 조그만큼도 여인의 나약함을 보이지 않았다. 친척이라도 방해가 될 때면 마찬가지로 없앴다. 예를 들어, 소작의 언니는 병권을 찬탈하기도 전에 감옥에 갇힌다. 친자매인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조야의 상하가 모두 밀접하게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결과는 아주 명쾌했다. 사형. 관련자들도 모조리 생매장하였다. 그후, 소작의 둘째언니도 비슷한 지경에 처한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죽였다.

 

이에 대하여 원나라때 편찬한 <요사>의 평가는 아주 간단하다. 이렇게 말한다: "황후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밝았다. 좋은 말을 들으면 반드시 따랐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녀에게 충성을 다했다." 송나라사람이 편찬한 <거란국지>에는 인신공격의 화약냄새가 날 정도이다. 섭융례는 <경종소황후전>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소황후)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검약할 줄 몰랐다." "황후는 천성이 잔인하고, 음독하며 살인을 좋아했다. 지략이 뛰어나고 좌우를 잘 부려먹었다. 대신들이 그녀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잔인, 질투, 방탕, 살인...나쁜 말을 모두 골라썼다. 소작을 '여자 염라대왕'으로 묘사못해서 안달일 정도였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병불참, 장불제(兵不斬, 將不齊)". "제가, 치국, 평천하"에서는 더욱 그렇다. 역대 궁궐에 얼마나 많은 백골이 묻혀 있을까? 강산을 차지하고 안정적으로 앉아 있기 위하여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을 제거하는 것은 무슨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소작이 살인을 많이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따르는 사람은 갈수록 많아졌다. 설마 문무대신들이 모두 백치란 말인가? 그들이 모조리 바람에 따라 방향을 트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만일 진심으로 소작을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 여인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였다'는 말을 할 것인가. "그녀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했다"는 말을 할 것인가. 결국 그녀의 품격과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섭융례와 같은 글쟁이가 아무리 말을 각박하게 하더라도, 소작의 인격적인 매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나라의 대국은 이미 결정되었다. 승리자는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양손에 묻은 피를 닦아낸다. 피의 장부는 영원히 명확할 수가 없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면, 다른 사람은 피를 흘린다. 북중국의 봄이 왔다. 소작은 이제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녀는 초췌한 모습으로 웃음을 보인다. 두 뺨에는 오랫동안 사라졌던 발그레한 기운이 떠오른다.

 

야율융서도 복있는 사람이다. 모친이 거대한 날개를 펼쳐주는 바람에 아들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이 '고아이지만 고생하지 않은' 소년은 마침내 편안하게 황제가 될 수 있었다. 983년의 여름 어린황제는 융중하게 모후에게 존호를 바친다. 승천황태후. 이전의 예지황후보다 한 단계 오른 것이다. 이제는 황태후가 되었다. 황태후는 그러나 아직 늙지 않았다. 아직도 붉은 입술과 검은 머리를 지니고 있고, 맑은 눈과 하얀 이를 지니고 있다. 그녀는 활짝 핀 꽃과도 같이 향기가 넘치고 요염하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전쟁의 불꽃이 문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자주 <양가장>을 듣고 보다보니, 요나라는 일찌감치 예술인들에 의하여 '마귀화'되었다. 에술인들의 입은 사관의 붓보다도 날카롭다. 소태후는 계속 요마화되고 왜곡되었다.

 

기실 소태후가 나라를 다스릴 때, 요나라조정은 확장하려는 야심이 없었다. 영토에 대한 욕구가 없었다. 그저 한 가지 생각이었다: 서로 싸우지 말고 각자 평안하게 잘 살자. 그러나, 예상외로, 송나라황제는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 조씨형제는 사방의 오랑캐를 무찌르려고 하였다. 요나라의 치하에 있는 연운십육주를 되찾기 위하여, 조씨형제는 온갖 머리를 짜내고, 마찰을 일으키고, 전쟁을 촉발시켰다.

 

"연운십육주"는 오래된 빚이다. "유운십육주"라고도 부른다. 동에서 서쪽까지, 지금의 베이징, 텐진, 허베이 및 산시 북부등의 광대한 지역을 포함한다. 이 지역은 유럽의 작은 나라 하나만 하다. 그리고 물산도 풍부하고, 경제가 발달되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누구든지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아쉽게도 조광윤은 너무 늦게 태어났다. 야육덕광이 '연운십육주'를 웃으며 받아들었을 때, 그는 막 10살이었다. 그가 황포가신한 그날, 이 토지는 이미 거란인들이 22년이나 통치해오고 있었다. 요나라의 4대배도(陪都)중 남경(지금의 북경, 베이징)은 바로 유주 경내에 있었다. 송나라는 통일하고 싶었다. 요나라는 반드시 지켜야 했다.

 

'미국문학괴걸'이라 불리는 앰브로스 비어스의 <악마의 사전>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대포는 국가경계선을 교정하는 도구이다" 냉병기시대에 말로 통하지 않으면 싸운다. 누가 힘이 센지에 따라 그가 이긴다. 송나라 요나라 양국은 '연운십육주'를 놓고 서로 칼을 뽑아서 상대방을 겨누었다. 최고의사결정권자로서, 소태후는 3번의 전투를 지휘한다. 연운지전(燕雲之戰),  기구관지전(岐溝關之戰) 그리고 전주지전(澶州之戰).

 

요경종의 생전에, 양국은 한번 싸운 바 있다. 건형원년, 즉 979년, 송나라의 두번째 황제인 조광의는 병력을 3로로 나누어, 요나라의 남쪽 대문을 돌파한다. 역주, 탁주의 수비장수들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다. 조광의는 일거에 유주성 아래까지 치고 들어온다. 야율현은 '약탕기를 달고 사는 사람'이다. 기대할 수가 없었다. 소연연이 요나라조정에 자리잡고 바둑을 두는 것처럼, 오랫동안 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정확하게 판단한 후, 그녀는 담담하게 병력을 움직인다. 이 여인은 두려움이 없었다. 일단 싸울 거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확실히 어떤 신비한 역량이 요나라를 보호한 것같다. 이것은 전쟁법칙이라기 보다는 인심향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광의가 싸우는데 최소한 '두 개의 칼'이 있었다. 그가 병력을 일으켜 원정을 함으로써 토착민들의 평온한 생활을 깨트렸다. 현지 관민은 일체가 되어 남경유수 한덕양을 따르고, 성을 지켰다. 그 결과 두 가지 돌발사건이 발생하여 전투상황을 역전시킨다. 첫째, 소태후가 보낸 양로의 지원군이 도착하고, 고량하에서 대승을 거둔다. 둘째, 송나라군대내에 내분이 발생한다. 조광의는 지휘가 혼란에 빠진다. 이 불가일세의 '마상황제'는 나귀수레로 기어들어가 남쪽으로 황급히 도망쳐야만 했다.

 

986년, 송나라군대가 권토중래한다. 소태후는 즉시 아들을 데리고, 친히 전선으로 나간다. 그녀는 친히 삼로대군의 '최고사령관'이 된다. 여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궁중내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머리를 쓰고 술수를 꾸민 경우가 많다, 황제에 올랐던 무측천의 경우에도 그렇다. 여인들 중 말을 타고 직접 전장터로 나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소작은 감히 그렇게 했다. 그녀의 몸에는 농후한 남아의 기운이 넘쳤다. 요나라의 모자는 칼을 뽑아들고 말을 타고 나섰다. 이와 비교하자면, 송나라의 황제는 그냥 후방에서 조용히 동정이나 살펴보고 있었다. 이를 비교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결전의 장소는 기구관이다. 오월, 태양이 소작의 차가운 칼를 비춘다. <요사>에서 기록한 것처럼, "(소태후는) 군사를 잘 알았다. 친히 군대를 이끌고 삼군을 지휘했다. 상과 벌이 분명했고 장사들은 명을 따랐다." 전략적으로, 소작이 한 단계 위였다. 전술상으로, 송나라는 뛰어난 점이 없었다. 기구관에서 송나라는 10만의 주력이 죽는다. 맹장 양업은 '양무적'이라고 불리웠는데, 결국 생포되고 만다. 그리고 절식하고 죽은 전쟁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요나라의 기세와 소태후의 명망이 떨쳐졌다. 소작이라는 이 전쟁터의 여성최고사령관은 송나라군신들이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감탄하는 대상이 된다. 모택동은 소태후의 군사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이와 비교하자면 조광의는 저능아였다. 모주석은 이렇게 평론했다: "송나라사람들은 군사를 몰랐다. 거란의 적수가 아니었다. 거란은 '적을 깊이 끌어들여, 섬멸한다'는 전략전술을 잘 사용했다. 송나라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송태종은 무능했고, 연전연패했다."

 

송나라는 패배하고나서 기세가 꺽인다. 요나라는 오히려 더 강경해진다. 네가 그만두면 내가 시작하겠다. 네가 굴복할 때까지. 그러나, 소태후의 야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한 것이고, 연운십육주를 지키려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