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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동단국(東丹國): 발해의 후예?

by 중은우시 2013. 5. 18.

글: 남아행(男兒行)

 

중국의 역사책을 펼치면, 현란한 왕조교체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왕조교체는 역사가 전진하는 동력이다. 하나의 새로운 왕조는 항상 이전의 구왕조의 멸망으로 탄생한다. 발해국도 예외는 아니다. 처음에는 진국(震國)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하고,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그도 멸망후의 비애가 있다. 926년 초봄, 신흥 거란국(나중에 요-遼-라 함)이 발해국이 도성 홀한성(忽汗城)을 함락시키고, 발해국의 마지막왕 대인선(大諲譔)은 "소복고색견양(素服稿索牽羊)"하여 신료 삼백여명을 이끌고 성을 나와 항복한다. 거란국왕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킨 공을 영흥전의 벽에 새기게 조서를 내린다. 나중에 학자들이 고증한 바에 의하면 공헌을 벽에 새긴 영흥전은 바로 발해국 궁성의 제1전이라고 한다. 이해 2월 29일 요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국을 동단국(東丹國)으로 바꾼다. 홀한성은 천복성(天福城)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황태자 야율배(耶律倍)가 인황왕(人皇王)이 되고, 야율배의 동생 질랄(迭剌)을 좌대상으로 하고, 발해노상을 우대상, 발해사도 대소현(大素賢)을 좌차상(左次相)으로, 야율우지(耶律羽之)를 우차상(右次相)으로 삼는다. 이때부터 거란인은 발해의 옛땅에서 동단국을 경영한다. 소위 "동단"은 거란(契丹)에 대응하는 뜻이다. 즉 "동거란"이라는 뜻이다. <요사>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야율아보기는 천복성을 떠날 때 황태자, 동단국왕 야율배(突欲)에게 말한다: "이땅은 바다에 가까워 오래 거주할 곳이 못된다. 너를 남겨서 다스리게 하니, 이는 짐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네가 동쪽 땅을 다스리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요태조 야율아보기의 말은 발해지역을 단독국으로 통치하고 황태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나중에 동단을 남으로 옮기며 천복성을 불태우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역사상 영웅은 이 웅장한 도성을 건설했다. 그것을 훼멸시키는 것도 사람이다. 그래서 도성의 운명은 실제로 그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의 운명과 관계된다.

 

거란이 요나라를 건립한 후, 발해국 지역의 통치 혹은 관리에 대하여 별도의 나라를 건립하여 왕을 두는 방식은 아주 예외적인 것이다. 이 측면에서 보자면 발해국의 여세가 얼마나 컸고, 강역이 얼마나 넓었는지 알 수 있다. 요나라가 일시에 이를 제어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요태조 야율아보기는 회유정책을 시행하여 왕의 풍모를 보였다. 이것이 아마도 요나라가 이백여년간 존속했던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동단은 실제로 국가의 정권체제를 갖추었다. 왕은 지존으로 권력이 아주 컸다. 거란황제의 바로 다음가는 지위였다. 야율배가 즉위한 후 천자의 관복을 입었다. 그리고 감로(甘露)라는 연호를 쓴다. 중앙기구는 여전히 발해의 제도를 활용한다. 좌우대차(左右大次)의 네 자리는 거란과 발해인이 각각 2개씩 차지했다. 동단국은"발해는 비록 멸망했지만 그 날카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국면을 보인다. "동단의 신민이 다른 나라로 갈 때면 스스로 발해라 칭했고, 이국의 기록에도 발해라고 적었고, 동단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동단은 매년 거란에 "포십오만단(布十五萬端), 마천필(馬千匹)을 공물로 바쳤다." 이를 통하여 왕황관계(王皇關係)를 분명히 했다. 역사의 발전은 항상 자신의 규율에 따르고, 일부 돌발사건은 항상 역사의 수레바퀴를 구르게 해서 중대한 역사적인 변고가 발생하게 만든다. 요태조 야율아보기가 바다를 건너와서 동단국을 건설한 후, 926년 5월 군대를 이끌고 상경 임황부로 되돌아간다. 7월 요태조 야율아보기는 부여부(扶餘府)로 가는데, 돌연 병사한다. 그의 처인 술률씨(述律氏) 초태후(肖太后)는 칭제(稱制)하여, "권결군국사(權決軍國事)", 즉 국사를 처리한다. 이 변고는 동단국에도 일련의 사변을 불러온다. 당시 천복성에 거주하고 있던 황태자인 동단국왕 야율배는 부황이 병사했다는 말을 듣고 성을 떠나 장례를 치르러 간다. 대외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야율배의 북쪽에 야율덕광도 스스로 장례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상경 임황부로 간다. 명목은 장례식참석이지만, 실제로는 황위를 다투는 것이었다. 황태후가 차남 야율덕광을 편애하였기 때문에 야율배는 할 수 없이 양보한다. 야율덕광은 천황왕이 되니, 그가 요태종이다. 야율배는 황제에 오르지 못하여 불만이 컸다. 수백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간다. 그러나 순라사병에게 제지당한다. 나중에 초태후가 이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죄를 추궁하지는 않고 상경임황부에 머물게 한다. 실제로는 연금된 것이다.

 

동단은 건국초기 주로 몇 개의 세력으로 구성된 통치집단이었다: 하나는 국왕 야율배를 중심으로 한 십복세력이고, 둘은 야율우지를 대표로 하는 거란 귀족실력파이며, 셋은 투항한 발해노상 및 사도 대소현등을 우두머리로 한 발해귀족세력이다. 처음에, 야율배는 부왕 야율아보기의 신뢰와 중시를 받아, 그는 권력의 중추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다.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는 극력 투항해온 발해후예세력을 회유했다. 이들 발해유민은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야율배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극력 돕게 된다. 그러나 요태조가 병사하고, 태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태자가 황제위를 양보하고 상경에 연금되는 등의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자, 동단국의 실권은 이미 요태종 야율덕광과 우차상 야율우지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동단국왕 야율비의 실세는 필연적으로 발해유민의 실세를 불러왔다. 동단정권은 건립하는 날부터, 국내에는 갈등과 투쟁이 충만했고, 발해유민의 완강한 반항은 시종 멈추지 않았다. 동단국이 건국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안막, 정리등의 부군민은 반란의 기치를 내건다. 그들의 영향하에 항복했던 군이 다시 주먹을 쥐고, 발해유민들이 봉기했다. 발해의 잔여세력들은 부여성과 장령부등지에서 거란점령자에게 반기를 든다. 이 모든 것은 거란통치자에게 중대한 타격이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요태종의 심복한 우차상 야율우지는 상소를 올려 동단국의 남천(南遷)을 건의한다. 됴태종이 즉위한 후 동단은 땅이 멀고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야율배가 그의 황제위를 계속 노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하물며 요태조 야율아보기도 일찌기 "이 땅은 바다에 가까워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928년 야율우지에게 영을 내려, 동단국을 동평(東平)으로 남천하도록 명한다. 동평은 지금의 요양(遼陽)일대이다.

 

동단국의 남천은 실제로 발해유민의 대이주이다. 발해의 주현도 동시에 모두 이전한다. 이런 대규모의 거국적인 남천은 강제적인 것이었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의 103개성을 얻었다고 한다. 이것은 남천과정에서 대부분 파괴된다. 왕도 홀한성(천복성)을 버려두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거란총치자는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 위하여, 왕도의 궁전, 종묘를 불태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발해인들이 옛 왕도에 대한 그리움을 품지 못하게 한 것이다. 발해국 229년간 창조한 문명과 문화는 남천과 더불어 사라진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에게 천고의 수수께끼를 남긴다. 여러해동안 발해국의 상경 용천부 유적지를 정리하고 발굴했는데, 궁전, 사묘, 관아, 택저 및 기타 건축유적지가 모두 불애 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에 탄 벽돌, 기와, 니토 와 석재가 나왔고, 심지어 일부 벽돌, 기와, 니토와 돌맹이는 뜨거운 불에 타서 하나로 붙어 있었다. 벽, 노석(路石), 주춧돌 등도 모두 큰 불에 의하여 부서지고 갈라졌다. 이를 보면 당시의 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그저 깨진 기와와 폐허 속에서 한 때 흥성했던 도성의 모습을 엿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그것을 창조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훼멸시켰다. 사라므이 의지가 그것의 흥망성쇠를 주재했다.

 

동단국의 남천후, 국왕 야율배는 다시 국도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이때의 동단왕부는 이미 옛날의 웅장한 천복성이 아니었다. 930년 동단국왕은 오랫동안 감시받으며, 앞날을 에측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냥을 떠난 틈을 타서 후당(後唐)으로 도망친다. 그가 도망칠 때 일찌기 이런 시를 남긴다.

 

소산압대산(小山壓大山) 작은 산이 큰 산을 누르니

대산전무력(大山全無力) 큰 산은 아무런 힘이 없다.

수견고향인(羞見故鄕人) 고향 사람을 보기에 부끄러워

종차투외국(從此投外國) 이제 외국으로 떠난다.

 

그의 시에는 정치투쟁에 실패한 아픈과 고향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다. 야율배가 후당으로 도망친 후, 동단국은 왕비 초씨(肖氏)가 주재한다. 후당은 천자의 예로 야율배를 영접하고, 변경으로 간다. 거기서 회화절도사, 서,신등주관찰사의 직위를 받는다. 나중에 이씨(李氏)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찬화(贊華)라 한다. 우주절도사로 있다가 4년후에 살해된다.

 

940년, 동단왕비 초씨가 병사한다. 국정은 동단왕 야율배의 장남 야율올욕(耶律兀欲)이 주재한다. 947년, 요태종 야율덕광이 국호를 요로 개칭한다. 그리고 야율올욕을 영강왕에 봉한다; 같은 해 4월, 야율덕광이 진(晋)을 정벌하는 도중에 난성에서 병사한다. 영강왕 야율올욕이 황제에 즉위하니, 그가 요세종이다. 모친 초씨를 황태후로 모시고, 선부 동단국왕 야율배를 양국황제(讓國皇帝)로 추존한다. 그리고 능을 현릉(顯陵)이라고 한다. 그리고 숙조 야율안단을 명왕에 봉하고, 동단국의 국정을 담당하게 한다. 951년, 요세종이 시해된다. 발해인 고모한(高模翰)은 동단국의 중대성우상에 임명된다. 다음 해 명왕 야율안단이 병사한다. 959년, 고모한이 좌상이 되는데 얼마후 병사한다. 그후 발해인은 더 이상 동단국의 중요직위에 오르지 못한다. 동단정권의 '발해'색채는 점점 약화된다. 982년, 요나라조정은 동경 중대성을 없애고, 동단국은 역사에서 철저히 소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