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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宋) 요(遼)간의 4대전투

by 중은우시 2016. 8. 6.

글: 장효민(張曉珉)


<요사(遼史)>의 기록에 따르면, 짧은 13일내에 송나라와 요나라간에는 4번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4번의 전투결과에 대하여 <요사>에는 역사책이 영원히 기록하고 있지만, <송사>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송,요의 제1차대전은 십일월 초하루에 발생한다.


이날 밤, 송군은 요군이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틈을 타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즉 대규모의 야간기습을 한 것이다.


야간기습이라는 이 전술은 정말 아무리 써도 질리지 않는 좋은 전술이다. 중국 오천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역사서를 뒤지거나, 혹은 어느 무협지를 뒤지더라도 모두 야간에 기습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요군은 일찌감치 대비를 하고 있어서, 송군이 막 요군의 군영입구까지 왔을 때, 순라를 돌던 요군에 발견된다. 그 후, "소곤타육(小棍打肉), 대도절체(大刀切菜)"를 당하여 송군은 수백구의 시체만 남기고 참패하여 도망친다.


이로써 송.요간의 제1차전투의 결과는 송군패, 요군승이다.


송,요의 제2차전투는 십일월 초삼일에 발생한다.


그날, 송군의 와교관(瓦橋關) 수비군 장사(張師)는 군대를 이끌고 성을 나가, 성밖에서 진을 펼치고 적을 맞이한다. 알아야 할 것은, 장사의 의도는 아주 명확했다. 그는 성밖의 송군와 협동작전을 펼쳐, 안팎에서 호응하여 성을 포위하고 있는 요군을 협공하려 한 것이다.


이비록 장사의 의도는 정확하고, 담량도 충분했으며, 병력도 웅후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적군의 총사령관이 누구인지 하는 것이다.


이 공성의 요군 총사령관은 바로 요나라의 전신(戰神), 북원대왕(北院大王) 야율휴가(耶律休哥)였다.


거기서 끝났다.


사실은 증명한다. 야율휴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송군이 자라처럼 움츠리고, 지구전을 펼치고, 공성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이제 너희가 성밖으로 나왔으니 잘되었다. 너희가 무슨 진세를 펼치든간에 야율휴가는 즉시 명령을 내린다: 전군을 나를 따르라. 돌격!


<요사.야율휴가전>의 기록에 따르면, 야율휴가의 강력한 공격하에, 이건 아예 전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는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이 전투가 끝난 후, 송군에서 전사하고 포로로 잡힌 사람은 수만명에 달한다. 장사 본인은 전쟁터에서 전사한다. 그것도 야율휴가에게 목이 베인다.


이렇게 송,요의 제2차전투의 결과도 송군대패, 요군대승이다.


송,요의 제3차전투는 십일월 초구일에 발생한다.


이날, 송군의 원군은 와교관 바깥에 도착한다. 그들은 역수(易水) 남안(南岸)에 병력을 배치하고 진을 펼친다. 직접 북안에 주둔하고 있는 요군과 전투를 벌인다.


<요사.야율휴가전>의 기록에 따르면, 전투개시전에, 요경종은 야율휴가가 오유창급감을 입고, 황색의 오추마를 타고 있으며, 손에는 용담양은창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얼마나 위풍당당하고 멋진 모습인가.


이런 모습을 보고 요경종 야율현(耶律賢)은 깜짝 놀란다. 그래서 그는 완곡하게 야율휴가에게 말한다:


"장군의 이런 모습은 너무나 쉽게 적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 가련한 부마(蕭咄李)를 보지 못했습니까. 안전제일입니다. 이런 건 좋지 않습니다."


요경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야율휴가는 가가대소하며 말한다: "황상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은 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황상께서는 그냥 보시면 됩니다."


그날, 전쟁터의 모든 사람은 보았다. 한 미치광이가 자신의 수천명의 정예철기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송군을 공격하는 것을. 결국, 야율휴가는 파죽지세로 일거에 수만의 송군을 무너뜨리고, 그들은 막주까지 쫓아내고서야 끝낸다.


이것이 무엇을 설명하는가?


저자세, 이는 약자의 특허이다; 전쟁터에서의 강자는 굳이 감춰야할 필요가 없다.


이 전투가 끝난 후, 송군은 다시 수만의 병마를 잃는다. 역사서에서는 "횡시만가(橫屍滿街)" 즉 온 길거리에 시신이 널부러져 있다고 하였다. 야율휴가는 일거에 수명의 송군장수를 포로로 잡는다. 그후 요경종은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찬탄을 한다: "만일 사람들이 모두 경과 같다면, 짐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송요 제3차전투의 결과는 송군이 참패하여 물러나고, 요군은 전승을 거두었다.


송,요의 제4차전투는 십일월 초십일에 발생한다.


<요사> 기록에 따르면, 막주로 물러난 후, 이들 송군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물러났다 다시 나왔다. 다시 역수의 남안에 병력을 배치하고 진을 형성하며, 요군과의 결사전을 준비했다.


바로 이 결정으로 송군은 참패에서 대궤멸로 끝나게 된다.


<요사>의 기록을 보면 이날의 전투과정은 내용을 충실하게 적어오던 거란의 사관들도 쓰질 않았다. 만일 정말 썼다면 4글자면 충분하다."격지태진(擊之殆盡)" 공격해서 모조리 죽였다.


이제 송요의 제4차전투의 결과, 송군은 참불인도(慘不忍睹), 요군은 사기여홍(士氣如虹)이다.


이를 보면 태평흥국 5년(980년) 십일월초하루에서 초열흘까지 열흘내에 송과 요는 4차에 걸친 전투를 벌였고, 요군은 4전전승을 거두어 사기가 더할 수 없이 올라갔다; 송군은 4전 전패하여, 결과는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성적표를 본 후 만일 당신이 조광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친히 전투에 나서는 것 외에 조광의에게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이 선택은 조광의가 죽어도 선택하기 싫은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지난번 다리에 화살 두 발을 맞아서 하마터면 요나라에 포로로 잡힐 뻔한 이후, 이 황제의 몸과 마음은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는 심지어 도광검영의 전쟁터에 대한 일종의 공포심리까지 생겨났다.


이후, 그를 대신하여 전선에 나갈 사람만 찾을 수 있다면, 이 황제는 절대 친히 나서지 않을 것이다. 어가친정같은 일은 미룰 수 있으면 미루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 나서기 싫은 것이다.


조광의의 이런 "전쟁을 겁내고, 전쟁을 피하려는" 심리는 그의 후반생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에게도 유전되었다.


그 후에 그 중국역사를 바꾼 전투에서, 송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고 강산사직이 위험질 때 황제는 어가친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광의의 아들 즉 송진종 조항은 부친과 같은 성품이다. 즉 미룰 수 있으면 미루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어쨌든 가지 않는 것이다. 나중에 만일 구준이 그를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중국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좋다. 미래의 일은 미래에 보는 것으로 하고,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서 이 송,요대전투를 얘기하자.


조광의에 있어서 전선의 4전전패로 대송강산은 위기에 처했고, 곧 끝장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억지로 버텨야 했다. 그래서 '어가친정(御駕親征)'의 일막이 일어난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도 송태종 조광의는 다시 3일을 미루다가 겨우 출정에 나선다.


이를 보면, 송태종의 내심 속으로 얼마나 전쟁을 두려워하고, 얼마나 전쟁터에 나가기 싫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송나라가 국력을 총동원하여 황가금군이 북상해오자, 요경종은 고민을 한 다음 어쨌든 빼앗을만큼 빼앗았고, 화도 풀릴만큼 풀리고 해서 굳이 죽어라 싸울 일은 없으니 빨리 본거지로 돌아가서 빼앗은 것이나 나누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조광의가 어가친정한다는 말을 들은 후, 요나라사람들은 겁을 먹도 도망쳤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같이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말에 대하여 조광의 본인은 아주 기뻐했다. 이제 모두 살게 된 것이다.


"거란인 만여명을 대파하고, 삼천여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일은 또 어찌된 일인가?


여기에 무슨 설명할 일이 있겠는가. 당시의 배경을 한번 살펴보자. 거란인은 4전전승을 거두고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수성하던 송군은 감히 응전하지 못하고 피하기에 바빴고, 그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숨어 있었다. 그저 이 거란인들이 몰려와서 만족할만큼 빼앗아서 돌아가는 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너무나 멍청하다. 정말 멍청하기 그지없다.


마지막으로 이들 요나라사람들은 빼앗을만큼 빼앗고 그들이 개선할 때, 송군이 비로소 성을 나와서 공격한다. 그들은 기습을 하여 아직 준비를 못했던 거란인들을 쳤고, 한번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송군이 거두었다는 승리이다. 그것도 그저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곡하고 우회적으로 은근슬쩍 집어넣은 것이고, 당당하게 크게 써놓지 못한 이유이다.


진상이 어떠하든 간에 태평흥국 5년 십일월 십사일, 송요간의 와교관전투가 끝나고, 조광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최소한 다시 어가친정을 할 필요는 없었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제 북방의 전투는 안정되었고, 송,요간에는 잠시 전투가 없었다. 천하가 태평해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정말 끝났는가?


아니다. 더 많은 재미있는 일들이 이제 막 시작한다.


정말 "지분이 샐 때 하필이면 장마가 오고(屋漏偏逢連夜雨), 배를 느린데 하필이면 역풍은 만난다(船遲又遇打頭風)" 이 말만 떠올리면 조광의는 머리가 빠개지는 것같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원래 이 송,요간의 전투이전에, 대송의 남방에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요나라는 송군이 남하했을 때를 틈타서 병력을 대거 끌고 내려온 것이다.


북방전쟁에서는 요나라가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송나라가 수동적으로 방어한 것과는 달리, 이 제국 남방의 전쟁은 완전히 송나라가 주도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바로 한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광의를 속여서 일으킨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전투인가. 이 황상을 속인 사람은 또 누구인가?


그외에 아무도 생각지 못한 것은 이 천리바깥의 전쟁이 대송의 정계를 완전히 재편되게 하고 한 명의 태산북두급의 인물이 재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 송,요전쟁이후, 송나라황실에도 대규모의 동란이 일어난다.


송태조 조광윤의 장남 조덕소가 기이하게 사망한 후, 또 다른 황자도 비명에 죽는다. 마찬가지로 원인불명으로 죽었다.


그렇다면 이 비명에 죽은 황자는 누구인가. 그는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가? 그의 죽음는 조광의에게 어떤 위험을 가져올 것인가?


이렇게 많은 일이 발생하다니, 네가 만일 조광의라면 분면 머리가 빠개지는 것같이 아팠을 것이다.


이제 이런 내우외환의 시기에, 새로운 선장인 조광의 황제가 송나라라는 이 곳곳에 상처를 입은 전함을 이끌고 암초가 가득한 얕은 물을 잘 헤쳐나가 안전하게 해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웅재대략을 지녔으나 전쟁에는 음영이 드리워진 황제가 계속 큰 뜻을 펴고, 자신의 패업을 이루어 낼 수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