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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문원16

오함(吳唅): 개인의 비극에 그치지 않는다. 글: 관우당주(觀雨堂主) '문혁'을 회고하는 글에서 반드시 언급해야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전 북경시 부시장이자 명사(明史)전문가인 오함이다. 1965년 11월 10일 요문원(姚文元)은 기수 강청(江靑)의 뜻을 받들어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라는 글을 상해 <문.. 2019. 5. 27.
강청(江靑)의 법정 변론에서 드러난 몇 가지 진상 글: 임휘(林輝) 강청은 중국공산당의 전최고지도자 모택동의 네번째 부인이다. 모주석이 일으킨 문혁때 중요한 지도자중 한 사람이다. 1976년 모주석이 사망한 후, 화국봉(華國鋒), 섭검영(葉劍廉)등은 정변을 일으켜, "사인방"을 체포한다. 강청은 "사인방"의 우두머리로 지목된다. 1981년, .. 2018. 1. 31.
요문원(姚文元)의 실현되지 못한 출옥후 2가지 바램. 작자 미상 요문원은 1960,70년대에 아주 잘나간 글쟁이로, '무산계급이론가'이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모택동은 "남요북척(南姚北戚)"(요문원 척본우)이라 불릴 정도이니, 그의 지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척본우(戚本禹)는 얼마후 타도되지만, 요문원은 여전히 잘나갔다. 1976년 10월 6일 밤에 .. 2016. 1. 1.
왕홍문(王洪文)의 최후 글: 현세보(現世報) 1977년 7월 중순, 중공10기 3중전회가 베이징에서 거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등소평동지직무회복에 관한 결의>가 통과되어, 등소평(덩샤오핑)은 다시 중공중앙 부주석, 중공중앙 군위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의 "삼부일장(三副一長)"의 직무.. 2013. 9. 14.
모택동의 임종유언의 역사진상 글: 학길림(郝吉林) 1976년 9월에서 10월, 중국정계는 한 마디 말을 둘러싸고 경심동백(驚心動魄)할 투쟁을 전개한다: 그것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按旣定方針辦)"는 말이다. 이 말의 영향력은 아주 크고 깊어서, 지금 생각하면 탄식이 나온다. 그리고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모두 .. 2012. 4. 23.
모택동 사후의 사인방(四人幇) 글: 서염(徐焰) 1976년 9월 9일, 모택동(毛澤東)이 서거한 후 1시간여가 지난 새벽2시경 중앙정치국은 202루(樓)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하여, 장례문제를 논의했다. 강청(江靑)은 회의에서 울며불며 소란을 피웠다. 그녀는 모주석이 등소평(鄧小平)때문에 화가 나서 죽은 것이라고 말하.. 2012.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