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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요문원(姚文元)의 실현되지 못한 출옥후 2가지 바램.

by 중은우시 2016. 1. 1.

작자 미상




 

요문원은 1960,70년대에 아주 잘나간 글쟁이로, '무산계급이론가'이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모택동은 "남요북척(南姚北戚)"(요문원 척본우)이라 불릴 정도이니, 그의 지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척본우(戚本禹)는 얼마후 타도되지만, 요문원은 여전히 잘나갔다. 1976년 10월 6일 밤에 체포될 때까지 당중앙의 선전을 담당하는 입이었다.

 

1996년, 요문원이 석방된 후, 상하이시의 촨샤(川沙), 칭푸(靑浦)에서 차례로 은거하고 있으면서, 중국역사, 중공당사를 연구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1998년 6월, 요문원은 돌연 유관부서에 남은 생애동안 두 가지 바램이 있다고 말한다: 회고록을 내는 것과 공산당에 다시 입당하는 것. 2001년 9월, 중앙의 유관부서에서는 요문원의 회고록 출판을 허락한다. 다만 중앙선전부의 심의를 받아야 하고, 해외에서 출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요문원은 정말 회고록을 쓴다. 4고(稿)를 거쳐 42만자에 이르는 회고록을 썼고, 1956년부터 1976년 체포될 때까지의 일을 썼다.

 

요문원이 회고록을 썼다는 소식이 퍼져나가자, 국내의 20여개 출판사가 서로 노렸다. 홍콩에서도 몇 개의 좌파출판사에서 높은 원고료를 제시한다. 결국 대륙의 3개출판사가 500만위안으로 판권을 매입한다.

 

다만, 이 회고록의 원고를 탈고한 후, 유관부서에서 심의를 했지만, 계속하여 회신이 없었다. 중앙지도자는 이런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출판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생활이 곤란하면 보조금을 높여줄 수 있다. 이때부터, 요문원은 매월 4000위안의 양로비를 받게 되고, 경위 겸 직원 한명을 붙여주어 그의 생활을 돌봐주게 한다.

 

2002년초, 유관부서는 마침내 요문원회고록의 출판에 대한 회신을 내린다. 다섯가지 불허사항이 있었다: 공개적으로 당, 정, 국가의 기밀을 공개할 수 없다; 당과 국가 및 국가의 작고한 지도자의 사적문제를 공개할 수 없다; 사회논쟁을 일으키고, 국외반중국세력에 이용되거나 국가의 명성을 해할 자료를 공개할 수 없다;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민감한 정치문제를 공개할 수 없다; 공개적으로 발행할 수 없다.

 

이렇게 하여, 요문원이 회고록은 출판금지된다. 그 후, 그는 다시 유관부서에 요청한다. 본인이 친히 겪고 참여하고 본 역사적 사실을 회고, 서사의 형식으로 쓰겠다고. 그의 이 요구도 허락받는다. 그를 위하여 자료보조원도 한 명 배치해 준다.

 

요문원은 근 8개월의 시간을 들여, 5만여자의 <회고와 반성>을 쓰게 된다. 중요한 몇 개의 역사사건의 진위를 해명했다. 거기에는 약간의 역사적 진상도 폭로되어 있어, 실제로는 회고록의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내용은 여전히 발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이 시대와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바램인 입당도 여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2005년 12월 23일, 요문원은 당뇨병으로 사망하여, 마지막에 사망한 '사인방'의 일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