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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안아골타10

송휘종(宋徽宗)은 금나라에 잡혀간 후 어디에서 살았을까? 글: 역사대작전(歷史大作戰) 중국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정강지변(靖康之變)"을 알고 있다. 금나라가 송휘종, 송흠종(宋欽宗)을 끌고가서 가두었던 사건이다. 그렇다면, 송휘종은 어디로 끌려가서 살았던 것일까? 송휘종이 만일 황제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아주 우수한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다. 금기서화에 모두 능했다. 특히 서예가 뛰어나 수금체(瘦金體)를 남겼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황제로서는 좋은 황제가 아니었다. 그의 일생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전반기에는 아주 성실했고, 수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양산박의 농민반란을 처리하면서 정치적 지혜를 발휘한다. 그는 초안(招安) 정책을 써서, 송강등이 조정을 위해 일하도록 함으로써 농민반란군을 와해시킨다. 다만, 송휘종의 .. 2022. 5. 12.
부여(扶餘)의 도성(都城)을 찾아가다 글: 왕평객(王平客) 동북지방에 일찌기 부여국이 출현했다. 부여국은 기원전108년을 전후하여 건립되었고(서한시기), 494년경(북위시기)에 멸망한다. 나라는 약 7백년간 존속했다. 부여인은 주로 두 민족이 융합하여 이루어졌는데, 송눈평원(松嫩平原)에서 남하하여 송화강유역에 자리잡은 예맥인(濊貊人)과 현지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의 주민이 합쳐서 형성된다. 부여왕국은 영토가 아주 넓었다. 주로 길림성의 대부분 지역이고 북으로는 흑룡강성의 비교적 많은 부분이 포함되며, 남으로는 요녕성의 약간 지역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넓은 영토를 가졌던 부여국의 도성은 어디였을까? 사료를 보면, 부겨국의 도성은 전기와 후기에 두 곳이 있다. 그러나 어느 곳인지 명확히 기록해 놓지는 않았다. 학술계에는 부여국의 .. 2021. 3. 16.
변경대역(汴京大疫): 금나라 멸망의 서곡 글: 종가수(宗家秀) 금나라 천흥원년(1232년) 사월, 몽골대군이 금나라의 '남경개봉부'인 변경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반달후에 철수한다. 몽골군이 철수한 후, 변경성내에 돌연 대규모 전염병이 발생하여 50일간 지속된다. 절반의 인구 근 100만명이 사망하고, 금애종(金哀宗)이 도.. 2020. 3. 4.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 중국의 명의(名醫) 글: 원사문(苑嗣文) 금나라(1115년-1234년), 중국역사상 여진족이 건립하여 중국의 북방과 동북지방을 통치한 봉건왕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건립했다. 서로는 서하, 몽골등과 국경을 접했고, 남으로는 남송과 대치했다. 모두 10명의 황제, 119년간 존속했다. 천경4년(1114년) 금태조 완안.. 2020. 2. 27.
역사속에 묻혀버린 서요제국(西遼帝國, Kara Kitan) 글: 황수(黃帥) 1211년(서요 천희34년) 가을, 후시호르도(虎思斡爾朶, 지금의 키르키즈스탄 부라나성)의 날씨는 여전히 매우 더웠다. 서요황제 야율직로고(耶律直魯古)는 자신의 점점 늙어가는 신체를 보면서, 더 이상 거란선조의 위업을 재건할 용기와 결심이 서지 않았다. 황궁안에서는 .. 2019. 1. 6.
야율초재(耶律楚材): 징기스칸은 왜 그를 중용했는가. 글: 황수(黃帥) 1211년, 징기스칸의 철기(鐵騎)가 야호령(野狐嶺)에서 금나라군대와 격전을 벌일 때, 야율초재(耶律楚材)는 겨우 21살이었다. 그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금나라 황제와 함께 곧 중원으로 쳐들어올 몽골인을 격퇴하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역사의 저울은 이때 이미 몽골인에게 기울어 있었다. 수십년간의 향락과 소비로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자손들이 지탱해온 국가는 사상유례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야호령 전투에서 금나라군대는 정예병을 모조리 잃는다. 심지어 황제 금선종(金宣宗)마저 남으로 도망쳐 변경(지금의 개봉)으로 간다. 일시에 금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공포분위기가 중원의 대지를 감싸게 된다. 야율초재는 몽골인과 더욱 거리가 가까웠던 중도(中都)에 남는다. 즉 지금의 북경이다. 이곳은 여.. 2018. 12. 19.
누르하치는 금(金)의 후예로 자처하면서 왜 여진문자를 쓰지 않고 만주문자를 만들었을까? 글: 담사용(覃仕勇) 명나라 만력13년(1615년) 일대효웅 누르하치가 신빈현 이도하자반에 있는 허투아라성(赫圖阿拉城)에서 칸을 칭하고 나라를 건국하며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후금(後金)"이다. 확실히, 누르하치는 여기에서 세상사람들에게 선언한 것이다. 자신.. 2018. 2. 26.
지금은 사라진 역사의 고성(古城) 1.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상경용천부는 고대 발해국의 도성이다. 당나라 장안성을 모델로 설계하였고, 요태조 야율아보기가 천현원년(926년) 발해국을 멸망시킨 후 훼멸된다. 유적지는 흑룡강성 흥안시(興安市) 경내에 있다. 발해국은 200여년간 존속하여 시간이 짧지 않은 편이다. 그러.. 2017. 7. 4.
강대했던 금(金)나라는 왜 신속히 멸망했는가? 글: 냉열군사사(冷熱軍事史) 12세기초,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는 2500명을 이끌고 거병하여, 동북지구의 여진족 부락을 통일하고 대금왕조(大金王朝)를 건립한다. 대다수의 (반)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여진인들은 용맹하고 무를 숭상하며 기마와 궁술에 능했다. 12년의 짧은 기간만에 그.. 2017. 2. 7.
1234년 2월 9일: 하루에 2명의 금나라 황제가 죽은 날.....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하룻만에 두 황제가 연이어 죽었다. 어느 왕조인지 혹시 아는가? 바로 금왕조이다. 미친듯이 북송을 멸망시키고 변경을 점령했으며, 대명이 자자한 송휘종,송흠종 두 황제를 금나라 수도로 끌고갔던 그 왕조로 한때 불가일세하며 회남강북을 횡행하며 송고종이 .. 2016.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