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수(黃帥)
1211년(서요 천희34년) 가을, 후시호르도(虎思斡爾朶, 지금의 키르키즈스탄 부라나성)의 날씨는 여전히 매우 더웠다. 서요황제 야율직로고(耶律直魯古)는 자신의 점점 늙어가는 신체를 보면서, 더 이상 거란선조의 위업을 재건할 용기와 결심이 서지 않았다. 황궁안에서는 비록 가무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이 마음 속에는 산하가 무너진 광경만 남아 있었다. 호화로운 장식의 창문을 통해 그는 궁밖의 길거리에서 행인들이 오가는 것을 바라 보았다. 마치 병황마란(兵荒馬亂)의 시대가 점점 다가오는 듯했다. 땅에 흩어져 있는 서역과일은 뜨거운 태양아래 점점 썩어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일찌기 가졌던 방대한 제국처럼... 지금은 이미 몽골과 호르즘(花剌子模)의 협공하에 점점 쇠망해가고 있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야율직로고는 항상 조부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의 영웅이야기를 떠올렸다. 80여년전, 거란인이 망국 멸족의 위기에 처했을 때,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이끄는 여진인은 불가사의한 극단의 시간속에 요나라 천조제(天祚帝)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나 야율대석은 위기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족민을 이끌고 서역에서 서요제국을 건립한다. 그러나, 야율직로고는 야율대석이 아니다. 그는 태평한 시대에 태어났고, 전쟁과 살륙은 이미 역사로 되어 있었다. 그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자신의 이런 비극적인 혼용으로 인하여 망국의 댓가를 치르게 될 줄은.
<요사>에 야율직로고에 대한 기록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인종의 차남 직로고가 즉위한다. 연호를 천희(天禧)로 바꾸고, 34년간 재위한다. 가을에 사냥에 나섰을 때, 나이만왕(乃蠻王) 쿠츨루크(屈出律)이 복병 8천명으로 붙잡고, 그의 황제 자리를 빼앗는다. 요나라의 의관(衣冠)을 넘겨받아 직로고를 태상황으로 올리고, 황후를 황태후로 리고, 주석으로 기거(起居)를 보살피며 죽을 때까지 모신다. 직로고가 죽자, 서요는 끝이 난다." 야율직로고는 긴 재위기간동안 쿠츨루크의 이 대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신비한 제국은 후세에 그다지 많은 정보를 남겨놓지 않았다.
야율직로고는 늑대를 집으로 글어들인 셈이다. 장기스칸에게 패배한 나이만부의 왕자 쿠츨루크를 부마로 거두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쿠츨루크가 반격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그를 연금한다. 쿠츨루크는 서요의 황제에 오른다. 그러나 거란인과 나이만인은 전혀 다른 두 개의 민족이다. 서요의 황권이 넘어가자 야율대석의 제국은 종말을 고한다. 그러나 쿠츨루크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의 즉위는 원래 퇴폐하던 서요를 더욱 혼란에 빠트렸다. 원래 서요에 귀속되어 있던 세력들이 속속 반란을 일으킨다. 재위한지 겨우 6년만에, 쿠츨루크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죽는다. 서요의 영토는 몽골과 호라즘이 나눠서 차지한다. 그후 호라즘이 패배하여 망하면서, 서요의 잔존세력은 완전히 몽골제국의 판도에 편입된다.
학자인 가총강(賈叢江)의 고증에 따르면, 서요 거란인의 수량과 현지의 복잡한 환경을 고려하면, 서요의 대부분 인구는 도시나 농경지역에 거주한 것이 아니었다. 거란인들은 서요에서 여전히 유목전통을 유지했고, 물과 풀을 따라다니며 살았다. 거란황족도 아마 항상 수도인 후시호르데에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요나라의 "사시나보제(四時捺鉢制)" 즉 전국에 여러 곳의 '나보'(행궁)를 두고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보통의 거란인이건, 왕공귀족이건, 그들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는 유목민족의 본색이다. 이 본색은 일찌기 거란인들로 하여금 광활한 제국을 건설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일반백성들조차 피가 뜨거울 때, 일국지주가 전투의지를 잃어버렸으니, 요나라의 국조(國祚)는 끝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황제이므로, 야율직로고는 묘호(廟號)를 받지 못했다. 그저 한어로 된 연호 '천희'만 남긴다. 그래서 후인들은 그의 국가가 머나먼 중원제국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야율직로고는 퇴위한지 2년후에 사망한다. 비록 태상황이라는 허명은 있었지만, 그의 내심은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했다. 거란황족이 두 번 쇠망했는데, 야율직로고는 두번째를 목격한다. 하늘에서 서서히 지는 낙조를 바라보며, 야율직로고는 80여년전의 역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더욱 적막하고 쓸쓸했다. 그가 생각한 것은 아주 명확했다. 자신은 제2의 천조제이다. 그러나 제2의 야율대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야율대석의 시대는 풍운이 변환하던 시대였다. 1114년, 요나라와 북송의 강역은 모두 자기 역사상의 최전성기에 도달한다. 요나라는 동으로 지금의 사할린섬 일대에 이르렀고, 거란인만 원하면 바로 바다까지 나가서 연해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상품을 교환할 수 있었다. 서쪽으로는 요나라가 마침내 돌궐인 니안바거(粘八葛)부를 정복하여, 판도를 알타이산 일대까지 확장한다. 이 신비한 니안바거부는 바로 나중의 유명한 나이만부의 조상이다. 다만 이때 그들은 인원수가 많지 않았고, 세력이 약했으며, 거란인에 대항할 수준에는 훨씬 못미쳤다.
지금까지 판도가 비교적 적은 문제가 있었던 송나라는 이때 마침내 아얼진산(阿爾金山) 일대의 황두(黃頭) 회흘을 정복하고, 농우도호부를 설치한다. 어떤 의미에서, 농우도호부는 한나라의 서역도호부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송나라사람들에게 다시 태평성세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가장 중요한 하서주랑은 서하가 확실히 지배하고 있고, 서역도 일찌감치 중원왕조의 지배를 벗어나 있었으며, 현재는 고창회흘과 동카라카국이 통치하고 있었지만.
다만, 이 모든 것은 여진이 강세로 굴기하면서 신속히 변화한다. 1115년, 완안아골타가 칭제하고, 금나라가 설립된다. 겨우 10년후인 1125년, 요나라는 멸망한다. 천조제 야율연희(耶律延禧)는 막북으로 도망한다. 협산 일대에서 힘들게 저항했다. 도망치는 동안, 병력과 장수들을 많이 일었으며, 거란황족도 여진인들에게 많이 도륙당한다. 요나라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천조제 곁에 있는 사람들도 조불보석(朝不保夕)했다. 그래서 모두 목숨을 지킬 방안을 강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조제가 여진인들에게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거란황족은 아직 남아 있었다. 중신 야율대석은 이때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바로 정통 거란황족 출신이고, 요태조 야율아보기의 팔대손이다.
<요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야율대석은 요나라문자 ,한자에 능통했고, 말타고 활쏘기에 능했다. 천경오년 진사급제하여, 한림원에서 일하며 승지로 승진한다. 요나라는 한림을 임아(林牙)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대석임아(大石林牙)라고 불렸다. 태주, 상주 두 주의 자사를 역임하고, 요나라의 흥군절도사가 된다." 그는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자신이 멍청한 군주 천조제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여러번 국가를 위기에서 구할 방법을 제안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기회를 틈타 천조제에서 멀리 떨어져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간다. 요나라를 위하여 새로운 공간을 찾으려 한 것이다.
야율대석의 이 전략은 아주 정확했다. 당시 요나라는 중부와 동부의 영토를 모두 점령당했다. 특히 대량의 좋은 경작지는 다 빼앗기거나 훼손되어 버린다. 요나라의 여러 도시, 인구, 자원도 모두 잃은 상태였다. 다시 빼앗아 오려면 기세등등한 금나라를 상대해야 했다. 이는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다. 다만, 요나라의 서부 특히 서북부는 아직 전쟁이 미치지 않았고, 여진인들이 아직 막북초원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서역제국도 요나라와 관계가 좋았다. 왜 서쪽으로 가서 기회를 찾지 않겠는가? 야율대석은 서쪽으로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여겼다.
매번 역사서에서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야율대석의 기민함에 탄복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나라가 망한 거란인들이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앟는 신념에 감동하게 된다. 이전에 역대왕조는 수도가 점령되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멸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나라부터 송, 명은 모두 수도가 점령당하였다고 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대부분 국토를 잃었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싸운다. 야율대석이 바로 그 시작이었다. 이전에 흉노가 서진을 멸망시켰을 때도 같은 상황이 일어나기는 했었다. 이것은 아마도 이전의 왕조는 대부분 내란으로 멸망했고, 이때는 강대한 이민족과 전쟁을 하다가 부득이하게 수도가 점령당하다보니 죽을 때까지 항거하겠다는 용기가 형성되었을 수 있다.
야율대석에게 가장 긴급한 일은 근거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기본영토가 있어야, 숨을 쉴 수 있고, 대오를 키울 수 있으며, 요나라의 기업을 회복할 수 있다. 그는 수백의 거란용사를 이끌고, 수일간 급히 행군하여, 요나라의 변방에 위치한 가돈성(可敦城)으로 간다. 이곳에는 여ㅓㄴ히 요나라황제에 충성하는 병사와 백성들이 있었다. 천조제가 이미 포로로 잡혔지만, 야율대석은 거란인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 그들은 더욱 지혜있고, 용기있는 지도자가 복국의 꿈을 실현시켜주기를 바랐다. 가돈성에서, 야율대석은 한편으로 휴식을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더욱 먼 서방국가의 상황을 알아본다. 그리고 부하들과 미래전략을 논의한다.
가돈성에서, 10여개의 부락에서 사람을 보내와 야율대석과 만난다. 그들은 일찌기 거란제국에 복속했던 중요한 역량들이었다. 요나라가 망할 때, 그들은 여전히 야율대석의 요청에 따라 찾아온 것이다. 이는 제국의 위세가 남아있기도 했지만, 야율대석의 인간적 매력과 영향력과도 관련이 있다. 야율대석은 생각한다. 설마 우리 일족이 몸을 누일 곳이 없단 말인가. 사서에는 야율대석의 곁에 있던 장수들의 이름을 그다지 기록해 놓지 않았다. 심지어 그 본인의 활동에 관해서도 기록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후인들은 어떤 수단으로 거란부족의 지지를 받아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그 후에 그가 천리원정을 떠나면서 요나라를 존속시킨 것으로 볼 때, 그는 말그대로 거란영웅이다. 진정한 이상주의자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거란인들과 맟나가지로 금나라 혹은 송나라에 투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위험한 길을 선택한다. 배수진을 치고, 위기의 가운데 생존을 구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야율대석은 실력과 운이 모두 좋았다. 멀지 않은 동방에서 북송은 정강지치를 겪으면서 중원이 혼란에 빠져 버린다. 송,금 두 나라는 남북에서 밀고당기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야율대석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생긴다. 여진인들이 가돈성을 정벌하러 올 여유가 없는 틈을 타서, 야율대석은 반드시 더욱 안전한 근거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이때 서역일대에 위치한 고창회흘, 동카라칸국등 정권은 서로 정도는 다르지만 내분이 있었다. 각파세력의 다툼으로 교착상태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이 지역을 통일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요나라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1130년, 야율대석은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한다. 역사에서는 이를 "대석서정(大石西征)"이라 부른다. <요사>는 소량의 문자로 서정을 시작할 때의 격정적인 인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월 갑오, 청우백마(靑牛白馬)로 천지, 조상에 제사를 지내고, 전체 군대는 서쪽으로 향했다." 그후, 야율대석은 회흘왕 필륵가(畢勒哥)에게 길을 빌려달라며 군사적 의도는 없다는 뜻을 보내고, 계속 서쪽으로 진격한다. 야율대석은 회흘정권의 열열한 환대를 받는다. 그리하여 '군대의 기세는 날로 흥성해지고, 날카로움도 날로 배가된다.'
고창회흘의 서쪽에 동카라칸국이 있었다. 당시 동카라칸국은 주변부락과 싸우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국왕 이브라힘칸은 야율대석을 본국으로 들어오게 청하여, 각파세력간의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거란인은 당연히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야율대석의 군대는 거의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수도인 발라사군(八剌沙袞)을 점령하고 나중에 후시호르데로 이름을 고친다. 이곳은 거란인들의 새 정권의 수도가 된다. 1132년, 야율대석은 호시오르도에서 황제에 오른다. 서요의 개국황제가 된 것이다. 이 역사는 지금 보기에 아주 신기하다. 엣날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을 때처럼 , 서역제국은 중원왕조가 강성한 것을 고려해서 공동으로 강대한 적을 상대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연합하였다. 야율대석은 비록 중원인이 아니자만, 무력으로 상대를 정복하지 않았으니, 실로 탄복할 만한 일이다.
건국이후, 야율대석은 대장 샤오올리라(蕭斡里剌)를 동으로 보내 요나라의 잃은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무정했다. 그의 복국을 위한 길을 떠나자마자 열악한 자연환경의 충격을 받게 된다. 천리나 이어진 망망한 고비사막은 천연적인 장벽이 된다. 하늘에 가득한 황사와 복잡한 군사환경은 동방에서 오는 적을 막아줄 뿐아니라,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길도 막아버린 것이다. 야율대석은 할 수 없이 서역에 발을 붙이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서쪽으로 발전하며 계속 자신의 세력을 키운다. 그후 카트완(Qatwan, 卡特萬)전투를 거치면서, 서료는 셀주크제국을 격패시킨다. 나중에 셀주크제국이 날로 쇠락하면서 서요는 중앙아시아의 가장 강대한 국가로 된다.
12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요는 이미 면적이 금나라에 비견할 만한 방대한 제국이 된다. 서요의 강역은 동으로 몽골의 케레이트부(克烈部), 서하정권과 국경을 마주했고, 남으로는 청장고원의 북단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알타이산과 발하슈호수의 넓은 토지를 포함했으며, 서쪽으로는 아랄해에 닿고, 쿠를루크(葛邏祿)인, 캉리(康里)인과 호르즘인이 차례로 서요에 귀순한다.
야율대석은 개명한 정치와 종교관용정책을 시행한다. 그의 통치하에, 거란인은 다시 옛날의 강성한 제국의 영광을 되찾는다. 야율대석이후, 서요는 소탑불연(蕭塔不煙), 야율이열(耶律夷列, 야율보속완(耶律普速完), 야율직로고 네명의 거란통치자들이 뒤를 이으며 80여년간 존속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요는 농후한 중화문화의 유전자를 지닌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란문화, 유가문화와 중앙아시아의 서로 다른 문화가 부딛치고 융합했다. 그러나 정치문화는 여전히 많은 정도에서 중원왕조의 모델을 답습했다. 예를 들어, 야율대석과 야율이열은 모두 자신의 묘호가 있다. 각각 덕종(德宗)과 인종(仁宗)이다. 서요는 연호를 계승했고, 역대황제는 모두 한어로 된 연호를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서요의 몇 개 연호는 중원왕조의 연호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종 야율이열은 13년간 재위하는데, 연호가 소흥(紹興)이다. 이는 이전 남송 송고종 조구의 연호와 같다. 서요의 마지막 군주 야율직로고의 연호는 천희인데, 이는 북송 송진종의 조항의 연호와 같다. 사서에 이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놓지는 않았다. 비록 고대에 어떤 연호는 특별히 환영받기는 했지만, 서요와 송나라의 연호가 중복되는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아마도 이들 멀리 중원에서 떨어진 거란황제의 마음 속에 여전히 중원에 들어가서 천하질서를 주도하겠다는 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지리적으로는 이미 유가문명의 중심지역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은 문화적으로 유가문명에 깊은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야율대석에서 야율직로고까지, 거란황족의 국가는 팔십여년간 존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숙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수많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소멸하고 만 것이다. 그 후에는 후세의 평가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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