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종가수(宗家秀)
금나라 천흥원년(1232년) 사월, 몽골대군이 금나라의 '남경개봉부'인 변경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반달후에 철수한다. 몽골군이 철수한 후, 변경성내에 돌연 대규모 전염병이 발생하여 50일간 지속된다. 절반의 인구 근 100만명이 사망하고, 금애종(金哀宗)이 도망친다. 2년후, 금나라는 멸망하고, 금애종은 자살한다. 금애종은 명나라 숭정제의 비극을 400년전에 한번 리허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조말기의 난상
대금왕조는 1115년 완안아골타가 건국한 때로부터 1234년 금애종 완안수서(完顔守緖)의 죽음으로 망국에 이르기까지 겨우 백여년간 존속했다.
금애종의 원래 이름은 완안수례(完顔守禮)이고 역사상 비극적인 색채를 지닌 왕조의 마지막 황제중 하나이다. 그는 원래 태자가 아니었고, 후계자가 아니었다. 황태자인 완안수중(完顔守中)은 금나라의 중도가 함락당하자 우울하게 사망한다. 황태손 완안쟁(完顔錚)도 요절한다. 금선종(金宣宗)은 어쩔 수 없이 완안수서를 태자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수례에서 수서로 개명하게 한다. 1223년 금선종이 붕어하고, 완안수서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금애종이다.
이때 대금왕조는 이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같았고, 강력한 몽골대군의 쇠발굽이 밀려오고 있었으며, 금나라의 영토는 날로 축소되고 있었다. 그리고 남송과의 전쟁에서 금나라는 여러번 싸우지만 이기지 못하고, 진퇴가 혼란스러웠다. 국내의 기강도 흐트러지고, 관리들은 부패했으며,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각급관리들은 백성을 착취하고, 도적은 창궐하고, 의군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완전히 왕조몰락의 난상이 나타났다.
금애종은 즉위한 후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여, 금나라를 중흥시키려 한다. 그는 간악한 자들을 제거하고 언로를 널리 열며, 항몽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기용했다. 동시에 송나라, 서하에 보내어 휴전하여 우호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나라를 진흥시킬 뜻을 지녔던 금애종도 금나라가 멸망할 역사적 숙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금사>에서는 이렇게 평한다: "금선종은 남으로 내려갔다. 원래의 뿌리를 버린 것이다. 밖으로는 남은 위세를 가지고 연이어 송과 서하를 공격하고, 안으로는 곤경에 빠지니 스스로 붕괴를 앞당긴 것이다...애종은.....얼마 남지 않은 인원을 모아서 살아남고자 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죽는다. 슬픈 일이다."
변경대역으로 하루에 2만명이 죽다.
천흥원년(1232년) 정월, 변경대역이전에, 몽골과 금 양군은 삼봉산(三峰山)전투를 벌여, 몽골군이 대승을 거둔다. 금나라의 명장 이라포아(移喇蒲阿)와 완안진화상(完顔陳和尙)이 모두 균주성(鈞州城)에서 전사한다. 주력군대는 크게 타격을 입었고, 금나라멸망이 서막이 열린다.
천흥원년(1232년) 삼월, 몽골인은 금나라이ㅡ 도성 변경에 공격을 감행한다. 대군이 성을 포위하였고, 쌍방은 격전을 벌인다. 금애종은 친히 승천문을 나와 장병을 위로한다. 16일밤낮동안 몽골군이 변경을 공격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쌍방은 합쳐서 백만명의 전사자를 낸다.
몽골군은 일시에 변경성을 함락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쌍방은 화의를 한다. 금왕조는 형조조왕(荊州曹王)을 의화인질(議和人質)로 성을 나가 몽골인들에게 보낸다. 그리고 호부시랑 양거인(楊居仁)이 성을 나가 몽골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준다. 이렇게 하여 몽골인은 철수한다. 여름인 사월 팔일, 쌍방은 전투를 멈추고, 금나라의 대장 합희(合喜)는 스스로 성을 지키는데 공이 있다고 여기고 대군이 퇴각하면 온 성이 경축하자고 제안한다.
금나라사람들이 축하행사를 준비하며, 연회를 베풀려 할 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한다. 돌연 전염병이 변경성에 발생한 것이다.
<금사.애종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흥원년 오월, 변경에 큰 전염병이 발생한다. 오십일간, 여러 분에서 죽어나간 자가 90여만명이다. 가난하여 장례식도 할 수 없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이 사료로 계산하면, 1일 사망자수는 2만명이다.
이 참극은 <금사.후비열전>에도 묘사되어 있다. "임진, 계사년, 하남에 기근이 발생한다. 대원의 병력이 변경을 포위하고, 여기에 큰 전염병까지 발생하여, 변경성의 백성중 죽은 자가 백여만이다."
저명한 문사학자 원호문(元好問)은 당시에 마침 포위된 변경성 안에 있었다. 그는 친히 변경대역의 참상을 목격했다: "조임진지변(遭壬辰之變), 오육십일지간(五六十日之間), 위음식노권소상이몰자(爲飮食勞倦所傷而歿者), 장백만인(將百萬人)" 원호문은 당시에 '음식노권소상'으로 인하여 일어난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변경의 전염병은 아마도 페스트였을 것이다.
당시의 역사적 조건과 의료수준의 한계로 인하여 금나라가 멸방할 때 변경성의 전염병이 어떤 종류일지에 대하여 후세의 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유행성위장병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유행성독감이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페스트라고 한다. 그리고 상한(傷寒), 전염성간염 혹은 구단라선체병....일 수도 있다.
현재 학계의 주류입장은 페스트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13세기에 대유행한 페스트의 일부분으로 본다.
당시 성안에서 환자를 치료한 중의(中醫) 이고(李杲)가 그의 <내외상판혹론(內外傷辦惑論)>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환자에 발열, 담결, 호흡곤란, 해소혈담, 대량의 담말(痰沫)을 내뱉고, 극도로 피로한 등 전신증상이 나타나고, 두려워하고 쉽게 놀라며, 의식장애가 발생하고 조급하고, 짜증내며 어지러운등 신경계통의 이상도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10일내에 반드시 죽는다. 환자들의 발병증상으로 보면, 페스트와 유사하다. 단지 사망시간이 페스트보다 며칠 길다. 당시 어떤 학자는 아마도 비교적 경증상의 페스트일 것으로 본다.
이고가 묘사한 당시의 사망자수는 깜짝 놀랄 정도이다: "병으로 죽은 자가 계속 이어지며 끊이지 않았다. 도성의 문이 12개가 있는데, 매일 각문으로 내보내지는 것은 많은 곳이 2천, 작은 곳도 1천이 넘었다." 여기에서 문 하나당 1,5천구의 시신이 나갔다고 하면 12개성문이면 1만8천이다. 여러 기타 사료들과 들어맞는다. 이고는 전염병이 '기삼월(幾三月)'간 지속되었다고 했는데, 즉 2개월여이고, 3개월이 되지 않는다.
봉성(封城)의 정치적 고려가 재난을 확대시켰다.
맹렬한 전염병으로 변경성은 졸지에 죽음의 성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심각한 사회적 공황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성을 빠져나가려 한다. 5월에 이르러 수만명이 성을 나가겠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금왕조는 당시 정치적 고려에 따라 전염병이 몽골군에 알려지면, 몽골군이 그 헛점을 노려 쳐들어올 것이라고 여겨서 성을 봉쇄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통제한다.
다만, 전염병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성문을 개방한다. 몽골인의 포위에서 전염병창궐과 봉성까지 전후로 3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성안에 식량도 부족하여 대기근이 나타난다. 금왕조는 할 수 없이 성안의 백성들이 북으로 황하를 건너 먹을 것을 찾도록 허용한다.
변경성은 몽골군과 교전하기 전에 군대를 확충하기 위하여 성밖의 주민을 대량으로 성안으로 이주시켰다. 그리하여 당시 성안에는 인구가 조밀하게 모여 있었다. 여기에 거의 전민개병(全民皆兵)으로 군사화관리를 시행하다보니 성안의 백성들의 수는 250만 내지 300만에 이르렀을 것이다.
전염병이 피크에 달해 성문을 개방했을 때, 원래 남으로 이주해왔던 백성들은 북으로 혹은 동남쪽으로 도망친다. 원호문과 이고도 이때 변경성을 나와 피난한다. 일시에 '경성에 갇혀있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금나라가 멸망할 때, 변경성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길거리에는 풀과 백골이 마주하고 있고, 파리가 덮고 있었다. 사람의 흔적은 없었고, 병사 육칠백명이 보였다. 가시나무와 유해가 도로에 놓여 있었다. 단지 민가 천여채와 고궁 및 상국사 불각만이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몽조(夢兆)와 천의(天意)
몽골대군이 성을 포위한지 반달이 지나서 금군에는 '진천뢰(震天雷)'와 비화창(飛火槍)등 위력이 거대한 화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오랫동안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몽골군의 사상도 심각했다. 이때 쌍방은 의화하고 몽골은 철군한다.
금나라의 수도 변경은 몽골군에 함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염병에 함락당한다.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이전에, 일찌기 몽조(夢兆)가 있었다. <금사>권23 <오행>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금애종 대정원년 정월 무오일, 황상이 처음 조회에 참가한다. 태후를 인성궁황태후로 모시고, 태원비를 자성궁황태후로 모신다. 그날, 큰 바람이 불어 단문의 기와를 날린다. 안개로 해가 보이지 않았으며, 누런기운이 하늘을 덮었다. 인성황태후는 또한 거지 수만명이 그녀의 뒤를 따르는 꿈을 꾸었고 ,마음 속으로 역겨웠다. 점을 치는 자가 말하기를,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입니다. 백성들이 가난하면 누구에게 호소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칙령을 내려 경성에 죽과 약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임진, 계사년 전염병의 징조라고 여겼다.
그해의 날씨도 마치 전염병이 창궐하는 특수한 바탕이 되는 것같다. 사료에 따르면 천흥원년 오월 "신묘일, 한겨울처럼 추웠다." 오월의 개봉은 원래 초여름의 날씨여야 한다. 그런데 기온이 돌연 내려가서, 살기 힘들다고 느낄 정도가 된 것이다.
전염병이 창궐하기 전에, 성내의 인구가 지나치게 많이 몰려 있었다. 전시상태인 것이다. 대군이 밀려오고 인심은 흉흉하며, 음식, 위생, 기후가 모두 좋지 않았다. 천시, 지리, 인화를 모두 잃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변경대혁이후, 성안에는 여전히 147만명이 있었다. 유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사료에 주변지역의 전염병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역사의 윤회
1232년 12월 금애종은 변경을 빠져나와 북으로 황하를 건너, 귀덕(歸德, 하남 상구)으로 간다. 귀덕성안에서, 금나라의 장수 석잔여로환(石盞女魯歡)과 원수 포찰관노(蒲察官奴)간에 내분이 일어난다. 금나라의 장수 무선(武仙)은 남송의 촉땅에 있는 광화(光化)를 공격했지만, 맹공(孟珙)에게 패퇴당한다. 이렇게 하여 금나라는 남은 원기마저 모조리 잃게 된다.
1233년, 금애종은 발호하던 포찰관노를 죽이고 채주(蔡州, 지금의 하남성 여남)로 도망친다. 당시 완안백철(完顔白撤)의 8만정예병사는 몽골대장 사택천일(史天澤一)에게 포성에서 섬멸된다. 1233년 8월, 몽골과 송나라의 연합군이 당주(唐州, 지금의 하남성 당하)를 함락시킨다.
이때, 금애종은 남송과 연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신을 보내어 남송에 말한다: "몽골은 나라를 40개 멸망시켰다. 이제 서하이다. 서하가 망하면 우리이다. 우리가 망하면 반드시 송나라일 것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남송은 아예 그를 무시한다.
천흥3년 정월(1234년), 몽골 송 연합군이 채주를 함락시키고, 금애종은 망국지군이 되기를 원치 않아서, 긴급한 와중에 황위를 총사령관 완안승린(完顔承麟)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채주 유란헌(幽蘭軒)에서 목을 매어 자결한다. 나이 겨우 37살때였다.
마지막 황제 완안승린은 금애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여러 신하를 이끌고 곡을 하며 시호를 애종이라 했다." 곡이 끝나기도 전에 성은 함락되었고, 완안승린도 같은 날 난전중에 사망한다. 대금왕조는 이렇게 철저히 멸망한다.
백여년전의 1127년 봄, 금나라병사들이 북송의 도성 변경을 함락시키고, 방화약탈을 벌인다. 그리고 송나라의 휘종, 흠종 두 황제와 황비와 귀족 3천여병을 포로로 잡아간다. 성안의 절반의 사람들은 살륙과 질병으로 죽어나갔다. 북송이 망한 것을 역사에서는 정강지치(靖康之恥)라 부른다. 일찌기 성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잡아갔던 금나라는 불가일세(不可一世)하였으나 결국 같은 성에서 창궐한 전염병은 왕조멸망의 서곡을 열었다.
역사의 윤회는 항상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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