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부여(扶餘)의 도성(都城)을 찾아가다

by 중은우시 2021. 3. 16.

글: 왕평객(王平客)

 

동북지방에 일찌기 부여국이 출현했다. 부여국은 기원전108년을 전후하여 건립되었고(서한시기), 494년경(북위시기)에 멸망한다. 나라는 약 7백년간 존속했다. 부여인은 주로 두 민족이 융합하여 이루어졌는데, 송눈평원(松嫩平原)에서 남하하여 송화강유역에 자리잡은 예맥인(濊貊人)과 현지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의 주민이 합쳐서 형성된다. 부여왕국은 영토가 아주 넓었다. 주로 길림성의 대부분 지역이고 북으로는 흑룡강성의 비교적 많은 부분이 포함되며, 남으로는 요녕성의 약간 지역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넓은 영토를 가졌던 부여국의 도성은 어디였을까? 

 

사료를 보면, 부겨국의 도성은 전기와 후기에 두 곳이 있다. 그러나 어느 곳인지 명확히 기록해 놓지는 않았다. 학술계에는 부여국의 도성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다만 전기의 도성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정설이 있다. 즉 길림성 길림시 동단산(東丹山)에서 용담산(龍潭山) 일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궁성은 바로 동단산 자락 아래의 남성자(南城子)로 본다. 동북의 학술계는 부여국의 후기도성에 대하여도 새로운 주장들이 나오고 있고, 비교적 큰 진전을 이루었다. 후기도성은 길림성 요원시(遼原市)의 용수산(龍首山)일대로 본다. 전기와 후기의 구분은 기원후346년이다. 이 시기는 <자치통감>의 기록에 근거를 둔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국은 원래 '녹산(鹿山)'에 있었는데, 나중에 백제(百濟)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퇴하여 흩어지고 서쪽으로 연(燕)에 가까이 이주했다고 한다. <자치통감>에는 또한 부여국이 서쪽으로 이주한 후, 전연국(前燕國)의 모용황(慕容皝)이 병력을 보내어 부여국을 공격했고, 부여국왕 현(玄)은 포로로 잡혀 항복했다고 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은 모두 사료나 학술계의 결론이다. 필자가 이전에 알고 있던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필자는 그저 동북대지에 부여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도성은 아마도 길림성의 부여시 혹은 유수시(楡樹市)일 것이라는 정도였고, 길림시에 대하여는 잘 몰랐다. 필자는 부여시와 길림시로 가서 역사유적을 찾아보려고 준비했다. 동시에 현지박물관에 가서 자료도 살펴볼 생각이다.

 

부여시(扶餘市)

 

필자는 먼저 오늘날의 부여시와 옛날의 부여국 도성간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당연히 부여시는 현급시로서, 이 지역이 옛 부여국에 속한다는 것에는 의문이 없다. 어쨌든 당시 부여국의 강역은 비교적 넓었으니까. 그렇다면 부여라는 이 작은 도시가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일찌기 부여국의 활동중심인 도성소재지여서일까? 만일 이곳이 부여국의 도성이 아니라면, 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필자는 이런 의문을 가지고, 고속철을 타고 부여시로 갔다. 부여북역에서 필자는 택시를 타고 '부여시박물관'으로 간다. 내 생각에 먼저 박물관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서였다. 당연히 나는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여하한 기회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택시에서, 필자는 택시기사에게 이곳을 왜 부여시로 부르는지 물어보았다. 돈후한 중년의 택시기사는 이전에 이곳이 부여국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약간 흥분했다. 현지의 사람들도 부여국이라는 것을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나는 즉시 부여국은 아주 넓었는데, 왜 하필 이곳을 부여시라고 부르는지 설마 이곳이 부여국의 도성이었는지 물어보았다. 택시기사는 자시는 평상시에 책을 많이 보지 않아서 그건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나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이곳에 있는 도로중 태조로(太祖路)가 있는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물어보았다. 어느 왕조의 태조를 기념하기 위한 것인지. 그러자, 택시기사는 나에게 금태조(金太祖)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라고 말해준다. 나는 당시 약간 실망했다. 완안아골타가 이곳에서 그렇게 명성이 높으면, 부여시의 가장 중요한 역사사건 혹은 인물은 당연히 완안아골타일 것이다. 부여국의 도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나는 부여시박물관의 정문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새로 지은 박물관은 아직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주 실망하며 박물관을 떠난다. 나는 다시 태조로로 가보기로 했다. 동시에 완안아골타의 조각상도 보러 갔다. 거기에 가면 분명히 완안아골타와 부여시에 대한 소개가 있을 것으로 여겼다. 나는 박물관 앞의 태조로를 따라 서쪽으로 걸어갔다. 태조로와 진영대로(振瀛大路)가 만나는 곳에 아골타의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상 아래의 글에는 완안아골타가 병력을 일으켜 요에 항거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원래 부여시의 아래쪽에 의가점향(依家店鄕)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는 석비촌(石碑村)이 있다. 석비촌은 바로 완안아골타가 거병한 곳이다. 부여시는 완안아골타가 부여시 경내에서 거병한 것을 기념하여 새로 만든 이 동서대로를 태조로라 부르게 되었고, 완안아골타의 조각상도 배치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작은 도시가 금태조의 이 역사를 끄집어 낸 것은 분명히 이 작은 도시와 완안아골타간에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설명한다고 여겼다. 부여국의 도성과는 아마도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부여시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얻어야할 것을 얻지 못한 것처럼. 나는 다시 한 곳을 갔다. 아마도 거기에는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바로 부여공원이다. 부여공원은 이 도시의 북쪽에 있었다. 교외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거기에 가면 무슨 유적이 있거나 혹은 부여시의 역사에 관한 진열이나 소개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졌다. 부여공원은 좀 떨어져 있어서 몇 킬로미터는 가야 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나는 택시를 타고 갔다. 다행인 것은 이 현급시에도 택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기본요금은 높지 않은데, 조금 멀리 가려면 가격을 흥정해야 했다. 그러나 나를 실망시킨 것은 이곳에 택시를 타려는 사람이 비교적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택시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걸어서 가기로 한다. 내가 걸어간 길은 태조로의 서쪽끝에서 동쪽으로 부여대가까지 걸어간 다음 다시 북상하여 부여공원까지 가는 길이었다. 다시 나를 실망시킨 것은 공원안에 볼만한 것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보고자 했던 역사소개는 전혀 없었다.

 

시간도 늦었고, 고속철을 타야 해서, 나는 택시를 타고 바로 부여북역으로 가기로 한다. 이번에는 운이 좋게도 공원 문앞에서 그다지 기다리지 않고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택시기사는 내가 현지에서 만난 대화상대가 되었다. 나는 즉시 기사에게 물었다. 이곳을 왜 부여시라고 부르는지. 그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원래 삼차하진(三岔河鎭)이었다고 한다. 부여시는 원래 현재의 송원시(松原市) 녕강구(寧江區)를 가리켰는데, 나중에 부여시를 포함한 지역이 지급시인 송원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여시라는 명칭은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여구(扶餘區)라고 불리다가 나중에 녕강구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다시 부여현을 설립할 때, 삼차하진을 현정부소지재로 삼았다고 한다. 부여시의 지명변천과정을 알고 나니, 부여시는 그저 명칭일 뿐이고 예전에는 다른 곳을 가리켰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림시 동단산 남성자

 

부여시와 부여국도성은 관계가 없었다. 나의 의문점 하나는 풀렸다. 그래서 마음 놓고 다음 장소인 길림성 길림시로 향했다. 나는 거기에서 부여국의 전기도성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부여부격에서 고속철을 타고 길림시로 갔다. 중간에 길림성의 성회 장춘도 지나갔다. 동북의 이 대도시를 나는 내려서 보지 못하고 그저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12시이후, 나는 길림역에 도착했다. 내가 알고 있는 자료를 가지고 걸어서 남성자가 있는 동단산으로 갔다. 동단산은 바로 북류송화강의 동안이다. 내가 갔던 노선은 길림역 동광장에서 계속 동족으로 가서 요북로까지 가고, 요북로를 따라 다시 동쪽으로 계속 가면 멀지 않은 곳이 송화강이 나온다. 그후 오른쪽으로 바꾸어 송강동로를 간다. 송강동로는 기실 송화강 서안의 강을 까라 난 길이다. 송강동로에서 송화강의 경치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곳의 송화강은 이미 얼음이 풀리고, 강물도 흐르고 있었다. 당연히 강에는 여전히 얼음덩어리도 남아 있었다. 강변에 어떤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곳의 송화강 양안의 "길림무송(吉林霧松)"은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 단지 이때는 이미 계절이 지나서, 무송을 볼 수는 없었다. 눈을 들어 먼 곳을 보니, 송화강의 건너편은 길림성 교외였고 먼 곳에는 길다란 산맥이 보였다.

 

나는 송강동로를 따라 남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앞에 멀지 않은 곳은 철로대교가 있었다. 이 대교는 송화강을 가로지른다. 나는 사람이 강을 건너는 통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청소원에게 물어보니, 이 철로교는 확실히 행인들도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고 한다. 철로의 양측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인도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철로로 강을 건너서 동단산을 가려고 했다. 자료를 보면 동단산은 철로 건너편이라고 되어 있긴 했는데, 현지인에게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한 노인이 마침 지나갔다. 나는 즉시 그 노인에게 동단산이 건너편의 그다지 크지 않은 원형의 작은 산인지 물어보았다. 노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둥근 작은 산의 남쪽이라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가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곳에는 무슨 산같은게 보이지 않았다.

 

이 산이 동단산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면, 직접 철로대교로 강을 건너지 않기로 한다. 나는 택시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서 물어보기로 한다. 택시가 한대 왔다. 나는 확인을 위하여 강건너편으로 간다고 말하지 않고, 동단산으로 간다고 했다. 누가 알았으랴. 이 택시기사는 동단산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택시가 왔다. 운이 좋게도 이 택시기사는 동단산을 안다고 했다. 바로 건너편의 둥근 작은 산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철로대교 북쪽의 새로 만든 다리인 무송대교(霧松大橋)로 강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나는 택시를 탔고, 기사는 나에게 말한다. 동단산에는 볼 게 아무 것도 없다고. 길림에 와서 산을 보려면, 당연히 용담산을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용담산에는 뭐 볼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거기에는 고성이 있고, 수뢰(水牢), 한뢰(旱牢)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용담산이 어디에 있는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용담산도 송화강의 건너편에 있었다. 다만 무송대교의 북쪽이었고, 동단산보다 높았다. 나는 당시에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원래 이 용담산은 길림에 확실히 이름이 있었다. 길림사대명산중 으뜸이었다. 위에는 고구려시기에 만든 고성이 있다. 나는 당시에는 용담산을 갈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번에 길림에 온 목적은 부여국의 도성을 찾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성은 당연히 부여국이후의 것이다. 내가 이번에 여기에 온 주요목적은 아니었다.

 

무송대교를 지나, 송화강동안의 길을 따라갔다. 바로 빈강동로였다. 왼쪽으로 꺽으면 용담산 방향이고, 오른쪽으로 꺽으면 동단산 방향이다. 기사는 계속하여 용담산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동단산을 가자고 말했다. 기사는 다시 한번 실망하며 당연히 손님말씀을 들어야지요, 손님이 가자는대로 가야지요. 거기 가봐야 볼 것도 없지만이라고 말했다. 나는 먼저 동단산 남성자 유적을 볼 것이며, 시간이 되면 용담산을 가겠다고 말했다. 동단산은 멀지 않았고, 금방 도착했다. 그러나 자동차는 산 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저 빈강동로의 가에 정차할 수밖에 없었다. 빈강동로와 동단산의 사이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동단산을 가려면 이 마을을 지나야 했다. 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이곳이 길림시 풍만구 강남향 영안촌 이대(二隊)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마을의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동단산으로 걸어갔다. 서쪽방향이다. 마을은 크지 않았고, 길도 넓지 않았다. 그러나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었다. 마을 입구의 철도를 지날 때 나는 60세가량의 노인이 아이를 데리고 마을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바로 그 노인에게 물어본다. 앞의 산이 동단산이냐고. 그는 맞다고 했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는 흥분했다. 왜냐하면 마침내 동단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 사는 노인의 입을 통해 이곳이 동단산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이 곳에 남성자라고 부르는 고성이 있는지 물어본다. 실망스럽게도 노인은 없다고 대답한다. 나는 다시 이 길을 걸어가면 동단산까지 가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산위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이 산이 동단산인 것은 확실하다면, 나는 반드시 가서 봐야 했다. 산아래에 무슨 고성유적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옛날에 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 흘러서, 성은 이미 없어졌을 수도 있다. 고성유적지가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나의 두 발로 이 옛 고성이 있던 곳을 밟아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이 마을은 개략 수십호가 살았다. 모두 평방(平房, 단층집)이고, 2층집은 없었다. 그러나 마당은 모두 있었다. 나는 마을 안으로 걸어들어갔는데, 동단산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안으로 계속 들어가지 않고 마을 중간의 작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갔다. 몇 집을 지나자, 마을의 최남단이 나왔다. 더 이상 집은 없었다. 다시 서쪽으로 산을 향해 걸어갔다. 동단산에 가까워졌을 때 길가에 두 집이 있었다. 나는 마침 이 두 집의 앞을 지나갔다. 나는 조금 전의 그 노인이 첫번째 집에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즉시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인사했다. 나는 다시 한번 노인에게 동단산 근처에 고성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아마도 이번에는 노인이 내 말을 정확히 알아들은 듯했다. 아니면 두번째 만나니 낯이 익다고 여겨서 그런지 고성이 있기는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앞에는 단지 4개의 비석만 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흥분했다. 유적지를 볼 수 없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비문만 있으면 된다. 나는 그것만 보면 된다. 내가 보기에 비석이 있다면 거기에 고성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까. 나는 즉시 노인에게 어떻게 가야 그 네 개의 비석을 볼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노인은 열정적으로 나를 데리고 가주겠다고 한다. 우리는 눈을 밟으며 밭 옆의 작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갔다. 동단산은 오른쪽에 있었다. 즉 우리는 동단산의 자락 아래로 걷는 것이다. 길지 않은 작은 길에서 노인과 나는 얘기를 나누었다. 노인은 나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남방의 남경 가까운 곳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노인은 이렇게 멀리 이걸 보러 왔냐고 말한다. 이곳에 볼 것이 정말 없다면서. 나는 흥미만 있으면 볼 게 있다고 말했다. 금방 우리는 한 농지에 도착했고, 그 농지도 눈으로 덮여 있었다. 거기에서 4개의 비석을 볼 수 있었다. 2개는 아주 오래 되어서 글자도 불분명했다. 노인은 2개의 오래된 것과 2개의 새 것은 같은 것일 거라고 말해준다. 비문에서 이곳이 일찌기 동단산 평지성(平地城), 속칭 남성자(南城子)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부여국 전기의 도성이 있던 곳이고, 궁성이 있던 곳이다. 즉 부여국의 국왕과 왕실구성원들이 살던 곳이다. 비문의 사방에는 이미 성벽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밭들만 있었다. 이때 노인이 말해준다. 곁의 동단산의 산중턱에는 부서진 성벽이 있다고, 단지 눈에 덮여서 잘 보이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당시에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왜 성벽이 산 위에 있는지.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부여국은 자주 산을 등지고 적지 않은 산성을 쌓았었다는 것을.

 

나는 그곳을 떠날 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이 옛적 부여국의 도성이어서뿐만이 아니라, 이 노인, 대대로 이 곳에 살아온 노인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아마도 당시 부여국의 후인일 것이다. 내 생각에. 아마도 노인은 이곳의 고성이 바로 부여국의 도성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의 집은 바로 부여국의 도성 안에 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노인에게 성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자신의 성이 노(路)라고 했다. 나는 당시 호기심에 물어보았다. 한족입니까? 그러자 그는 그렇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부여국의 후손일 거라 생각했다. 나중에 한족에 융합되어버린. 노인의 집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마음 속으로부터 노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별 거아니라고 말했다. 이곳의 눈은 거의 녹지 않았다. 노인은 나에게 어제도 눈이 한번 내렸었다고 말해준다. 다만 그날 햇볕이 좋아서, 눈밭이 밝게 빛났다. 나는 아쉬워하면서 그 마을을 떠났다.

 

길림시박물관

 

내가 다음으로 갈 곳은 길림시박물관이었다. 내 생각에 박물관에는 완벽한 부여국에 관한 소개를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분명 출토된 부여국문화재도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길림시박물관은 풍만구 세기광장에 있었다. 동단산에서 약간 거리가 있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갔다. 택시에서 나는 다시 기사와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기사에게 동쪽의 산맥은 이름이 뭔지 물어보았다. 그 젊은 택시기사는 포대산(炮臺山)이라고 말해준다. 아마도 그 기사가 말한 것은 그중의 어느 산봉우리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건 내가 묻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고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곳의 산맥은 장백산맥의 여맥이었다. 장백산이라는 이름을 얘기하면 나는 돌연 숙연해진다. 그건 이상할 것도 없다. 이곳의 송화강이 바로 장백산 천지에서 발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의 송화강은 송화강 간류의 정원(正源)이다. 박물관까지 비록 약간 멀었지만, 택시비는 겨우 13위안이었다. 어쨌든 여기의 기본요금은 5위안이니까.

 

박물관에는 여러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보려던 것들이 아니다. 박물관에는 운석우를 전시하고 있었다. 듣기로 1976년 3월 8일 내린 운석우는 국내에 기록으로 남은 최초이며, 세계에서도 최대였다고 한다. 많은 지도자들도 와서 보았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서, 나는 그날은 운석우전시를 보지 못했다.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길림시의 역사 및 출토유물이었다. 특히 부여국시기의 역사와 문화재였다. 나는 여전히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여국의 전기도성이 길림시에 있는지 아닌지, 바로 동단산의 아래에 있었는지 아닌지.

 

박물관에서 나는 내가 찾고자 하는 해답을 찾아냈다. 전시자료에 따르면, 부여국의 전기도성은 확실히 길림시의 동단산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남성자는 바로 궁성소재지였다. 남성자는 서쪽으로 동단산을 따라 둘레길이 약 2킬로미터였다. 박물관의 자료는 동단산 아래의 남성자가 부여국의 궁성이었다고 말해줄 뿐아니라, 남성자에서 용담산까지의 대지는 바로 곽성(郭城)이라라고 한다. 궁성과 곽성을 합쳐서 부여국의 전기도성으로 총칭한다. 박물관에서는 이 도성내에서 출토된 동진(東晋)시기 부여국의 문화재도 볼 수 있었다. 대두쌍조수동검(對頭雙鳥首銅劍), 회두쌍조수동검(回頭雙鳥首銅劍), 환수철도(環首鐵刀), 그리고 부여인들이 쓰던 장식품이 있었다. 이는 나에게 부여국에 대한 인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었다.

동단산의 남성자는 바로 부여국의 궁성이 있던 곳이다. 이는 나를 아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더욱 나를 흥분하게 만든 것은 내가 금방 남성자유적지를 다녀왔다는 것이다. 그곳은 이미 농지로 바뀌어 고성벽은 볼 수 없었지만, 나는 상상해볼 수 있었다. 2천년전에 거기는 아주 신성한 곳이었다는 것을. 나는 헛걸음한 것이 아니다. 비록 거의 아무 것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확이 컸다고 느꼈다. 

 

박물관의 자료에는 용담산의 산성에 대하여도 소개하고 있었다. 소개에 따르면, 용담산 산성은 고구려시기에 건설된 군사성보이다. 고구려왕국은 기원전37년(서한시기)에 건립되어, 668년(당고종시기)에 멸망했다. 705년간 존속했다. 410년이후, 고구려는 북으로 확장했고, 그 세력은 길림시일대에 이른다. 용담산에 산성을 건설하게 된다. 그때, 부여국의 도성은 이미 동단산에 있지 않았다. 346년 길림성 요원시 용수산일대로 옮겨간 다음이었다. 용수산 산성은 바로 부여국 후기의 도성이다. 당연히 어떤 사학자들은 용담산 산성이 아마도 부여국이 만든 성이고, 산 위의 수뢰, 한뢰는 부여국에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고구려가 용담산 일대를 점령한 후, 새로 이곳에 성을 짓기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에, 원래 이곳에 이미 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날 오직 동단산 남성자가 부여국의 도성인지만 확인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시간이 좀 더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용담산을 한번 가보기로 결정한다. 어쨌든 한번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까.

 

길림시 용담산유적지

 

솔직히 말하면, 내가 길림시로 오기 전까지 용담산을 갈 계획은 없었다. 심지어 그런 산이 있는 줄도 몰랐다. 현재 보러 가려는 것은 첫째, 이전에 택시기사가 추천해주었기 때문이고, 둘째, 박물관의 자료에서 동단산에서 용담산에 이르는 이곳이 모두 부여국의 도성소재지였기 때문이다. 단지 동단산 아래가 궁성일 뿐이다. 그리고 박물관 1층의 지형도모형에서 용담산에 '부여국유적지박물관'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용담산도 분명 부여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나는 다시 용담산으로 가볼 생각을 했다. 비록 시간은 빠듯하지만.

 

나는 택시를 타고 용담산으로 갔다. 길은 멀었지만, 그래도 가기 좋았다. 오후 3시경, 나는 용담산유적지공원에 도착했다. 나는 고속철 시간을 계산한 다음 용담산을 참관하는 것은 1시간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에 눈이 내려서 산을 오르는 길은 눈이 쌓여 있었다. 어떤 곳은 아주 미끄러웠다. 당연히 계단이 있는 '어도(御道)'는 눈이 많이 쌓여 있지 않았다. 눈을 치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산을 오르는 것은 빠를 수가 없었다. '어도'를 모두 걸어볼 수는 없었다. '어도'라고 말했으니, 몇 마디 덧붙여야겠다. 이 '어도'는 분명히 산을 오르는 다른 도로보다는 걷기 좀 편하다. 왜냐하면 보통의 길은 그냥 경사길이고, 계단이 없는데, '어도'는 계단이 있을 뿐아니라, 위의 눈도 누군가 치웠기 때문이다. 이 '어도'는 옛적 건륭제가 산을 오르기 위해 만든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다른 보통의 산길과는 다르다.

 

산을 오르는 도중에, 나는 산성유적지를 보았다. 당연히 나중에 하산할 때는 다른 방향에서도 보았다. 이 성벽은 소위 용담산산성의 성벽이다. 산 위에는 사묘(寺廟)도 있다. 거기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어쨌든 시간이 부족했으므로. 나느 사묘에서 바로 다른 길을 따라 하산했다. 주로 수뢰를 보고 싶었다. 당연히 이곳으로 계속 올라가면 산성도 볼 수 있고, 한뢰도 볼 수 있다. 심지어 '부여국유적지박물관'도 볼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이미 4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고속철을 놓칠까봐 우려되어 하산하기로 한 것이다. 하산하는 도중에 나는 소위 '수뢰'를 보았다. 즉 용담(龍潭)'이고, 기실 연못이었다. 연못이라고 하면 그다지 신기할 것이 없다. 그러나 산 중턱에 만들어진 연못은 좀 다르다. 그리고 연못의 물은 시종 마르지 않는다. 그건 더욱 남다르다. 이 연못은 무슨 역할을 할까? '수뢰'라는 두 글자를 보면 확실히 기능이 1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마치 국가에서 범인을 수감하는 곳인 것처럼 보인다. 기실 그렇게 볼 수 없다. 이 연못은 국가의 저수지였다. 음용으로 쓰기 위한. 성을 산 위에 만들었기 때문에, 식수는 곤란한 문제이다. 이 용담은 일년내내 물이 차 있고 마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용담의 역할이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용담산의 고봉에 올라 길림시의 풍광을 내려다보지는 못했다. '부여국유적지박물관'도 참관하지 못했다. 그렇기는 해도, 용담산에 온 것은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산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부여국이 만들었는지 고구려국이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같은 시기의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또한 용담(수뢰)을 보았다. 그것이야말로 부여국사람(혹은 고구려사람)의 걸작이다.

 

짧은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길림성의 부여시와 길림시를 둘러보았다. 옛날 부여국의 옛땅을 밟아보았고, 부여국 전기의 도성소재지도 가보았다. 특히 부여국궁성유적지도 보았다. 나는 수확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번 시공을 초월한듯한 여행은 나를 너무나 흥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