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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패부10

북양육진(北洋六鎭)의 연혁과 최후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갑오년 청일전쟁이후인 1895년, 청나라정부는 광서안찰서(廣西按察使) 호율분(胡燏棻)이 천진에서 신군(新軍)을 편성훈련시킨다. 11월에는 조선에서 돌아오고 같은 회군계(淮軍係, 이홍장계열)인 원세개(袁世凱)가 호율분을 대체한다. 1897년 원세개는 직예안찰사(直隸按察使)로 승진하고, 신군은 무위우군공위경사(武衛右軍拱衛京師)로 개편된다; 1899년 겨울 무위군은 원세개가 산동순무(山東巡撫)로 가면서 따라간다. 1901년 11월 원세개는 이홍장의 뒤를 이어 서리직예총독(署理直隸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된다. 1904년 원세개는 왕영해(王英楷), 오장순(吳長純), 단기서(段祺瑞)의 3진(鎭)을 북양상비군(北洋常備軍)으로 건립하고, 무위우군은 제4진, 제5진으로 확대개.. 2023. 1. 25.
민국시대의 각지방 군벌(軍閥)은? 글: 대웅역사관(大熊歷史觀) 원세개(袁世凱)가 소참(小站)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킨 후, 그의 손으로 당세 세력이 가장 큰 북양군벌(北洋軍閥)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민국의 대총통에 오른다. 원세개는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다. 특별히 당시 각 지역의 장수들이 모두 원세개에게 기.. 2019. 9. 30.
원세개의 용인철학(用人哲學): 4종류의 인재를 중용한다. 글: 백가잡평(百家雜評) 근대사의 풍운인물로 원세개(袁世凱)는 논쟁의 대상이다. 사학자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용인의 각도에서 본다면, 원세개는 거의 일치하여 찬양받는다. 심지어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보다도 훨씬 높은 평가를 받는.. 2019. 1. 26.
양사이(梁士詒): 잊혀진 민국총리(民國總理)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중화민국 역사상 총리는 많았다. 그러나 양사이는 아마도 사람들에게 가장 덜 알려진 인물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손중산, 단기서와 같은 대인물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고, 웅희령(熊希齡), 육정상(陸征祥)같은 사람들과도 차이가 많다. 금융계의 소수인들에 대한 .. 2018. 11. 14.
소림사 사상 최대의 겁난: 풍옥상부하의 소림방화 글: 황소범(黃小凡) 1928년, 중원지역의 군벌혼전으로 총포가 날로 보급되어갔다. 일부 소림제자들도 군벌이 부대에 참여하여 전공으로 공업을 세우고자 했다. 마지막에는 소림사에 유례없는 겁난을 가져오게 된다. 1500년의 역사에서, 소림사는 많은 겁난을 당한다. 봉건시대에 매 왕조가 .. 2018. 7. 29.
풍옥상은 왜 소림사를 불태웠는가? 글: 관첩(關捷) 많은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다. 청나라정부가 소림사를 불태웠다고. 그것은 아니다. 사실상, 청나라때의 여러 황제들은 모두 소림사에 관심을 가지고 혹은 친히 편액을 써주고, 혹은 절로 순유를 왔다. 건륭15년(1750년), 건륭제는 친히 소림사로 가서, 밤에 방장실에서 잠을 .. 2014. 5. 30.
민국시대의 파벌 글: 녕녕(寧寧) 민국시대를 얘기하자면, 파벌을 얘기해야 하지 않으면 민국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파벌을 얘기하자면, 육영정(陸榮廷)을 얘기하지 않으면, 파벌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육영정이 광서(廣西)를 십년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민국의 파벌이 난립한 배경과 관련이 있.. 2013. 8. 5.
오패부(吳佩孚): Biggist Man in China 글: 유계흥(劉繼興) 오패부는 북양군벌중에서 보기 드문 수재(秀才, 과거최종합격자) 출신이다. 그는 유장(儒將)의 풍모를 다분히 지니고 있었으며, 당시 사람들이 오대수(吳大帥)라고 불렀다. 그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닌 Time지의 표지인물이 된 첫번째 중국인이다. 1924년 9월 8일자 Time.. 2011. 4. 4.
우리는 북양군벌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글: 조세룡(趙世龍) 이오(李敖)가 북경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북양(군벌)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의아해 했을 것이다. 이 말의 표면적으로는 오늘날 너와 내가 서 있는 이 북경대학이라는 곳이 북양시기에 건립된 것이고.. 2007. 12. 11.
북양군벌 오패부(吳佩孚) 북양군벌 오패부(1874-1939)에 대하여 그동안은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은 군벌로 인식되어 왔으나, 최근 들어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타나고 있다. 그의 일생에서 적어도 두가지 점은 매우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매국노가 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는 스스로 쓴 자.. 2006.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