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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양사이(梁士詒): 잊혀진 민국총리(民國總理)

by 중은우시 2018. 11. 14.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중화민국 역사상 총리는 많았다. 그러나 양사이는 아마도 사람들에게 가장 덜 알려진 인물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손중산, 단기서와 같은 대인물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고, 웅희령(熊希齡), 육정상(陸征祥)같은 사람들과도 차이가 많다. 금융계의 소수인들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 그는 거의 잊혀진 인물이다


그는 "오로재신(五路財神)"이라고 불리웠고, 일반사람들은 그를 "양재신(梁財神)"이라고 불렀다. 전해지는 바로는 마지막황태후도 그에게 목숨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이다.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뛰어난 금융인이지만, 정치에는 아마추어였다. 그가 총리가 된 것은 잘못된 자리에 잘못된 사람이 앉은 것이니 그로서는 억울해할 일이다.


양사지는 자가 익부(翼夫)이고, 호는 연손(燕孫)이다. 광동 삼수(三水) 사람이다. 광서제때 진사이고, 한림원 편수를 지낸다. 일찌기 원세개가 청황실을 협박하여 황위에서 퇴위하게 하는 활동에 참가했고, 원세개총통부의 비서실장, 교통은행총리, 재정부차장, 북양정부국무총리등의 직위를 지냈다. 중화민국시기 북양정부의 교통, 재정분야 고위관료이고, 구교통계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청말과 민초에 크게 활약했던 중요한 정치인이다.


아마도 그는 관료로서 험악한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진사가 되었을 때 서태후는 강유위, 양계초일당에게 이를 갈고 있었고, 강(康), 양(梁)이라는 글자만 봐도 치를 떨 때였다. 그런데 양씨성을 가진 그는 바로 양계초의 동생으로 인식되고, 게다가 강유위의 원래 이름이 '강조이(康祖詒)여서 이 '이'자까지도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게다가 그는 광동사람이다. 그래서 즉시 그의 이름을 합격자 명단에서 지워버린다. 나중에 곁에 있던 사람이 계속 설명해줘서 다행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장원급제해야할 그가 '양두강미(梁頭康尾)'로 인하여 하마터면 감옥에 갇힐 뻔한다.


그는 먼저 원세게 북양서국총판을 맡는다. 나중에 중국초대 철로총국 국장이 된다. 중화민국이 건립된 후, 그는 우전부(郵電部)를 만든다. 그는 중국의 우정건설에 공헌한 인물이다. 다음 해에는 원세개총통부의 비서실장이 되는 외에 다시 교통은행 총리, 재정부차장이 되어, 원세개내각의 핵심이 된다. 나중에는 그가 원세개의 칭제를 극력 찬성했고, 또한 전국청원연합회를 조직하여 참의원에 국체를 황제국으로 변경하도록 청하여 원세개의 총애를 받는다. 그리하여 원세개가 죽은 후, 그는 '홍헌화수(洪憲禍首)'로 지목되어 지명수배된다.


양사이가 처음 정계에 발을 내디딜 때, 당시의 중국은 최초로 스스로 건설하는 철로인 당서철로(唐胥鐵路)가 개통하여, 중국근대교통사업의 개시를 상징했다. 그후 철로뿐아니라, 항운, 우정, 전보사업도 날로 발전한다. 당시에는 이를 교통사정(交通四政)이라고 불렀다. 이는 대청국의 주요수입원중 하나였다.


통일적인 관리를 위하여, 청나라조정은 1906년 우전부를 설립한다. 그래서 우전부는 당시 청나라조정이 극히 중요시하던 부문이었다. 또한 청나라말기 왕공귀족과 권력대신들이 앞다투어 차지하려던 실권부서이기도 하다. 


다만, 국가철로의 건설은 당시에 있어서 외채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런 차입금으로 인하여 점점 도로권리를 내놓게 되고, 외자가 점점 중국의 경제명맥을 장악하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양사이는 교통은행의 설립을 주청한다. '밖으로는 각국의 권리를 회수하고, 안으로는 중앙은행의 세를 두터이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조정의 비준을 받은 후, 1908년 교통은행이 정식 개업한다. 교통은행은 당시 민족경제를 진흥시키는 대명사였다. 그것은 북양정부의 '중앙은행'이었고, 북양정부의 재정을 떠받치는 대들보였다.


이 양사이는 확실히 이재에 뛰어난 인물이다. 그가 지명수배되었을 때, 권력을 잡은 군벌들은 어떻게 금융을 운용해야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돈은 아주 중요했다. 그리하여 북경정부의 재정이 곤란할 때, 그가 없이는 정말 안되겠다고 여기게 된다. 지명수배를 받고 있던 아니든 급히 그를 불러들여서 조치를 취하게 해야 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정계로 되돌아온다.


양사이가 다시 나온 후, 대총통 서세창(徐世昌)은 그를 민국총리로 임명한다. 이 조치는 봉계(奉係)군벌의 지지를 받는다. 다만 나중에 그는 서원차관(西原借款) 문제로 직계(直係)군벌의 불만을 사서 할 수없이 하야하게 된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도망친다.


당시 각계군벌이 난립하는 상황하에서, 이 민국총리라는 자리는 정말 쉽지 않은 자리였다. 그는 먼저 직계군벌 오패부(吳佩孚)의 반대에 부닥친다. 당시 북양정부의 형세는 아주 복잡했다. 내각은 주마등처럼 바뀌었고, 양사이는 이미 곤란을 예견한다. 그가 취임한 후, 일찌기 그와 같은 광동사람이며 일가이고 친구인 양계초를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는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이다. 아는 사람이라면 고통으로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직접 당하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외우내환으로 곤란한데, 일은 모두 시기가 있고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런 위험한 국면을 지탱하려면 현명하고 지혜있는 인물이며 다 그 어려움을 알 것이다. 나는 재주가 모라자니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국가가 망하는데는 반드시 요망한 인물이 있다. 양사이는 홍헌(원세개가 황제가 되었을 때의 연호)의 죄괴(罪魁)이다. 다행히 도망쳐서 죽임을 면했지만, 사적으로 일당을 모아서, 총리의 자리까지 훔쳐 앉았으니 사갈과 같은 마음에 노예근성을 벗어나지 못했고, 아부하는 천성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자리에 오른지 십일만에 이미 매국노로서의 활약이 이처럼 두드러진다. 우리나라에 아직도 촌토가 남아 있는가, 우리나라에 아직도 초류(噍類)가 남아있는가?" 이것은 오패부가 직접 쓴 글이다. 당당한 민국총리로서 이런 욕을 얻어먹다니 가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엇다.


양사의는 민국총리로 일한 기간이 한달도 안되어 물러나서 짧을 뿐아니라, 뭔가 잘한 일도 없다. 필자가 처음 역사를 배울 때, 많지 않은 역사문장에서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 볼 수 있는 자료를 다 찾아봤지만, 그이 일생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좋지 않은 레테르를 남긴 것같다. 하나는 원세개 칭제의 화수(禍首)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친일매국했다는 것이다.


다만 당시 원세개정부의 2인자로서 사람들은 그를 '이총통(二總統)'이라고 불렀다. 그의 일생의 공과에 대하여 당시의 형세를 벗어나서는 시비를 논할 수 없다. <양사이>의 작자인 이길규(李吉奎)에 따르면, 전자는 사실이나 후자는 모함이라는 것이다.


서원차관의 시시비비를 여기에서 일일이 따질 생각은 없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내막이 있다. 얘기하자면 아주 복잡하다. 여기에선느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역사변증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차관은 부당한 것이 아니다. 그저 후인들이 이를 여러가지로 곡해했을 뿐이고, 양사이가 그 오명을 뒤집어 썼을 뿐이다.


양사이는 국가를 위해 공헌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한 상황하에서 그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따. 그는 이에 대하여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십여년간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하여 부강한 국가와 강한 백성을 만들고자 희망했지만, 아쉽게도 국가는 사분오열되어 있어 내가 애를 써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전해지는 바로는 양사이가 임종하기 전에 가족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일생동안 받은 칭찬과 욕은 이루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지금까지 한번도 변명한 적이 없다. 이 세계에는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양사이는 공리공담을 얘기하지 않았고, 실무형의 인물이다. 재조에 있건 재야에 있건 정치이건 경제이건 재경이건 실업이건 모두 성과를 낸다. 그리하여 '재신'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중국의 모건 스탠리이다. 양사이는 비록 원세개가 홍헌칭제할 때 아주 나쁜 짓을 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점은 그가 당시 초창기의 교통은행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해싸는 것이다. 특히 중국근대 민족금융사업의 발전과정에서 양사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국총리를 맡은 건에 대하여는...뭐라고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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