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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소림사 사상 최대의 겁난: 풍옥상부하의 소림방화

by 중은우시 2018. 7. 29.

글: 황소범(黃小凡)





1928년, 중원지역의 군벌혼전으로 총포가 날로 보급되어갔다. 일부 소림제자들도 군벌이 부대에 참여하여 전공으로 공업을 세우고자 했다. 마지막에는 소림사에 유례없는 겁난을 가져오게 된다.


1500년의 역사에서, 소림사는 많은 겁난을 당한다. 봉건시대에 매 왕조가 몰락하고, 지방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소림사만 혼자서 잘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소람사의 무술로는 '산적'의 교란을 피하기 어려웠고, 만일 대규모의 유구(流寇)를 만나면 절안의 승려들은 왕왕 도망쳤고, 건물을 파괴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모든 겁난 중에서 1928년의 군벌 석우삼(石友三)에게 당한 것이 아마도 가장 심각한 경우일 것이다.


민국초기, 소림사의 승려는 200여명이고, 토지는 1,370무에 달했다. 다만, 당시의 형세때문에 소림사는 날로 쇠락하고 있었고,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군벌혼전으로 토비들이 극성이었고, 당시의 항림화상(恒林和尙)은 소림사를 보호하는데 공헌을 했지만, 또한 화근도 심었다.


항림(1865-1923), 무예가 고강하였다. 민국초기 정부가 쇠약하여 소림사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를 "소림사보위단 단총(團總)"으로 임명한다. 지방민단의 성격에 속했고, 항림은 총기를 구매하여 승병을 훈련시켰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이는 실제로 소림무승의 무장화이고, 무술을 연마하던 것에서 총기를 다루는 것으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실력은 당연히 크게 증가한다. 작은 토비무리를 상대하는데는 충분했으나, 다만 만일 대규모군사충돌에 관련되면 아주 위험할 수 있었다.


1920년 예서(豫西, 하남서부)에 큰 가뭄이 들어 토비가 횡행한다. 항림은 등봉현성, 백옥구등지에서 토비들과 수십번 격전을 벌여서 인질을 여러명 구하고, 이들 전투에서 얻은 무기와 탄약은 모두 소림사로 가져가 보관했다.


항림은 전투를 잘하는 것으로 명성을 널리 떨친다. 토비들도 감히 소림사에 싸움을 걸지 못했다. 소림사주변지역은 한동안 평화롭게 지낸다. 민국의 하남성정부 주석인 장봉대(張鳳臺)는 항림에게 상장을 수여하고, 소림사에 편액을 보내 감사를 표한다.


1923년, 항림이 병사하고, 다음해 부근의 300여 민중은 돈을 보아 그를 위해 비석을 세운다.


항림이 죽은 후, 그의 제자 묘흥(妙興)이 소림사보위단 단총의 직무를 이어받는다. 항림에게는 또 한명의 제자가 있는데 번종수(樊鍾秀)이다. 그도 기인(奇人)이다. 묘흥과 번종수는 결국 소림사를 일대 겁난으로 몰아넣는다.


번종수의 원래 이름은 탁(鐸)이다. 별호는 성민(醒民)이고, 하남 보풍(寶豊) 사람이다. 소년시대에 소림사에 들어갔고, 항림방장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그 문하에서 무예를 배운다.


청나라말기에 하남에 토비가 횡행한다. 무예를 배우는 것은 현지인들이 자아보호하는 일종의 필요한 수단이었다. 얼마 후, 번씨집안은 토비의 환난을 피하기 위해 섬북 낙천으로 이사간다. 섬북은 청나라말기에 좌종당이 서정(西征)한 후, 전투를 거쳐, 인구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예서의 인민들이 이곳으로 많이 이주한다.


번종수는 무예를 익혔고, 나이도 젊어 새로운 이민자들중의 두목이 되어, 섬서독군 육건장(陸建章)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는 섬서의 하남적군인들을 모아서 정국군과 협력하여 정국이군(靖國二軍)이라 불렀다. 호법이 성공하면서 번종수의 명성은 높이 올라간다. 손중산은 그를 광주로 불러 친히 상을 내리고, 건국예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북벌때, 건국예군은 혁명의 동맹군이었다. 국민연군의 석우삼 부대와는 전우였다. 풍옥상이 섬서에서 하남으로 들어오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어 번종수에게 연락한다. 그의 뜻은 번종수의 부대를 흡수하여 자신의 편제하에 두기 위함이다.


그때의 풍옥상은 무력으로 북양총통 3명을 퇴임시켰고, 섬서, 감숙, 하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소련에서 돌아와 대량의 무기를 보충받아, 병력도 강했다. 40만에 이른다. 번준수는 비록 건국예군의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모두 섬북예서의 하남출신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인원수도 만명에 불과했다.


번종수는 스스로 정국공신으로 자처했고, 건국예군의 간판은 손중산이 친히 써준 것이다. 그래서 풍옥상에게 귀순할 뜻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군벌중에 오패부에게 기울어진다. 그래서 건국예군과 풍옥상의 국민연군의 석우삼부대는 먼저 에서 완락(宛洛)의 귀속을 놓고 충돌하게 된다.


묘흥(1891-1927)은 집안이 가난하여 8살때 소림사로 가서 항림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예를 힘들게 수련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호는 "금라한(金羅漢)이다.


1922년, 제1차 직봉전쟁이 발발하고, 직계군벌 오패부의 사장 장옥산(張玉山)이 등봉으로 온다. 그는 진청운(陳靑雲), 임응기(任應岐)의 부대를 수편(收編)하고자 한다. 이때, 번종수는 장옥산 수하의 단장(團長)으로 있었다. 그는 소림사를 지나면서 대웅보전이 부서진 것을 보고 수리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군무가 바빠서 그는 먼저 400원으로 물자를 구매해주고, 소림사의 사람들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1923년, 오패부는 직로예(直魯豫, 하북, 산동, 하남)삼성순열사가 되고, 장옥산은 명을 받들어 하남에서 병마를 모집한다. 모종의 필연성으로 그는 묘흥을 발견한다. 묘흥은 무예가 고강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도 있고 총도 있다는 것이었다. 묘흥은 장옥산 휘하의 제1려(旅)의 제1단(團) 단장이 된다. 이렇게 정식으로 오패부의 군사집단에 소속되게 된다.


1926년, 광주혁명군이 북벌을 시작한다. 풍옥상은 북양군벌에서 탈퇴할 것을 선언하고 혁명군에 가담한다. 오패부는 장작림과 합작하여 풍옥상을 공격한다. 다만 풍옥상과 북벌군에게 격패당한다.


1927년, 풍옥상이 서안을 점령하고, 북벌군과 협력하여 하남을 공격한다. 묘흥이 있던 오패부 수하의 제1단은 명을 받아 정주(鄭州)로 옮겨간다. 그리고 다시 무양(舞陽)으로 간다. 3월 6일, 풍옥상 부대와 교전중에 그는 사망한다. 나이 겨우 37살이었다. 묘흥의 시신은 제자가 소림사로 운반해가서, 절의 동북쪽 산자락에 매장한다.


그때는 북벌전쟁의 포화가 막 멈춘 때였다. 석우삼의 부대는 서북군으로 완락에 주둔한다. 그리고 낙양경비사령관을 겸임한다. 석우삼은 풍옥상의 국민연군 편제에 속했다. 하남에서, 그의 주요 적수는 직계 오패부의 부대, 봉계 장창종의 부대이다. 그리고 풍옥상과 오패부간에 오락가락하고 있던 진숭군(鎭嵩軍)이 있다.


만일 병력을 비교한다면, 번종수는 원래 석우삼과 싸우기에 부족하다. 석우삼의 국민연군 제5로는 병력이 거의 6만에 이른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쟁터를 누볐고, 막 봉군과 싸워서 이겨서 날카로움이 있었다. 심지어 풍옥상도 그의 부대를 어찌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번종수의 부대는 만명에 불과했고, 핵심외에는 다수가 새로 뽑은 예서의 토비였다. 그렇다면 번종수는 왜 계란으로 바위치는 싸움을 했을까?


번종수가 보기에, 그는 자격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석우삼은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여긴다. 설사 풍옥상, 장개석이라 하더라도 자신보다 후배라고 여긴다.


그외에 번종수는 지리의 우세가 있었다. 번종수의 부하는 대부분이 예서의 심산 출신이다. 그들은 원래 특별한 목적이 없이 군인이 되거나 토비가 되었다. 모두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한 것이다. 민단에서 번종수의 스승인 소림방장 항림은 등봉지방 민단의 단총이다. 항림이 죽은 후에 직위를 이어받은 묘흥, 묘전(妙全)은 모두 번종수의 사제이다. 지방민단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다.


1928년 3월, 번종수는 석우삼과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 번종수는 지휘부를 소림사내에 둔다. 이곳은 오랫동안 지방무력의 중심지였다. 통신과 지휘가 모두 편리했다. 그리고 민단의 협조와 협력을 받을 수 있었다. 자연히 이상적인 사령부 소재지였다.


소림사의 입장에서는 번종수가 소림출신인데다가 전국정치군사무대에서 이름있는 인물이니 그를 맞아들이는 것은 소림을 빛낼 수 있는 일이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지리적인 우세를 점한 번종수가 민단의 협조까지 얻었지만 여전히 석우삼의 적수는 아니었다. 중과부적외에도 관건적인 요소는 바로 석우삼부대의 무기가 뛰어났다는 것이다. 모두 소련에서 새로 가져온 총포였다. 번종수 부대의 장비는 많은 것이 한양(漢陽)에서 만들었거나, 지방에서 만든 것이어서 아예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쌍방의 격전이 벌어질 때 소람사의 승려들은 남십팔반에서 지리적인 우세를 이용하여 석우삼 부대를 막아내고, 번종수는 숭현의 심산으로 물러난다.


3월 15일, 승리를 거둔 석우삼은 번종수가 소림사에 설치한 지휘부를 접수한다. 그리고는 법당에 불을 붙여 태워버린다. 다음 날, 등봉에 주둔하고 있던 국민연군의 소명계(蘇明啓) 여(旅)는 병사들에게 명하여 석유를 소림사로 가져오게 해서 전체 소림사를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천왕전, 대웅보전, 장경각, 종루, 고루등 중요건축물은 모두 불바다가 된다. 화재는 40일간 계속되었고, 겨우 몇 개의 석주(石柱)만이 남아 있었다.


1936년, 장개석은 소림사를 참관한다. 수행한 등봉현장 모여채(毛汝采)는 소림사가 불탄 사정을 소개한다. 장개석은 이렇게 말한다: "석우삼이 나쁜 놈이군"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이후의 상황을 보면, 석우삼이 비록 국민혁명군 출신이지만, 시종 각종 세력 사이를 오가다가 최종적으로 장개석이 보낸 사람에게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1928년 소림사의 큰 불은 소림사에게 하나의 전환점이라 볼 수 있다. 개인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현대 총포의 적수는 될 수가 없다. 군벌혼전의 배경하에서, 인명은 초개와 같고, 소림사의 승려들도 예외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