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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염7

건륭제는 왜 재덕을 겸비한 황십일자(皇十一子) 영성(永瑆)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았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강희제 말년의 구자탈적(九子奪嫡)과 비교하면, 건륭제 말년의 후계자선택은 범위가 넓지 않았다. 그가 너무 오래 살아서, 대다수의 황자는 이미 사망했다. 17명의 황자들 중에서 겨우 4명만 남았다. 바로 황팔자(皇八子) 영선(永璇), 황십일자 영성, 황십오자 영염(永琰) 그리고 황십칠자 영린(永璘)이다. 이 네 명의 황자들 중에서, 황팔자 영선은 다리에 장애가 있었고, 황십칠자 영린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후계자에서 제외된다. 결국 남는 것은 영성과 영염의 두 황자이다. 재능으로 따지면 영성은 서화(書畵)에 모두 뛰어났다. 옹방강(翁方綱), 유용(劉鏞), 철보(鐵保)와 함께 건륭조 4대서예가로 꼽힐 정도이다. 명실상부한 대재자(大才子)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재.. 2021. 2. 7.
건륭제 후궁의 여섯 장문인(掌門人) 글: 명청사화(明淸史話) 얼마전에 TV드라마 <연희공략(延禧攻略)>과 <후궁(后宮) 여의전(如懿傳)>이 인기리에 방영도었다. 사람들은 그리하여 건륭제의 후궁에 관심을 갖게 된다. 확실히 건륭제의 후궁은 청나라 역대 후궁중 가장 다채로왔던 때이고, 여러 미인들이 총애를 다투었.. 2019. 1. 13.
건륭의 후손과 북경의 왕부 글: 장월(張月) 건륭제는 자녀가 아주 많았다. 제왕가에서 태어난 이들 황자와 공주들은 서로 다른 운명을 지녔다. 그리고 황실 구성원으로서 그들은 북경성 내에 많은 왕부(王府)를 건설한다. 수백년의 풍운과 변화를 거쳐 어떤 왕부는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수백년의 지난 이야기.. 2018. 11. 22.
건륭제의 후계자 선정은 왜 그리 힘들었을까? 글: 역사산인(歷史山人) 건륭(乾隆)은 청나라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을 수도로 삼은 일)이후 4번째 황제이고, 88세까지 살았다. 동시에 그는 중국봉건제왕중 장수의 기록을 세운다. 특히 그의 일생은 아주 순조로와서 그다지 큰 재난도 없었다. 그와 조부 강희(康熙) 부친 옹정(雍.. 2017. 10. 18.
[황자쟁위술] 이세탈인술(以勢奪人術) 온치후방패(穩治後方牌) 도광제편 도광제(道光帝)의 이름은 민녕(旻寧, 즉위전의 이름은 綿寧이었으나 피휘의 편의를 위하여 개명함)으로 건륭47년(1782년)에 태어났다. 도광제는 청나라 황제중 유일하게 황후의 적장자로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도광제는 가경제(嘉慶帝) 영염(永琰, 즉위후에는 피휘의 편의를 위하여 顒.. 2015. 8. 13.
건륭제(乾隆帝)의 후계자선정: 아들을 보지 않고 모친을 보다 글: 자일(子逸) 옹정은 비밀건저(秘密建儲)제의 창시자이다. 건륭은 제도의 첫번째 수익자이다. 그는 즉위한 이후, 여전히 이 제도에 따라 후계자를 지정했다. 건륭은 일생동안 3번 후계자를 선정했다. 이전 두 번은 모두 후계자의 요절로 실패했고, 마지막에 건륭은 황위를 황십오자 영염.. 2013. 4. 13.
건륭(乾隆)은 왜 자질이 평범한 가경(嘉慶)을 후계자로 정했을까? 글: 유계흥(劉繼興), 유병광(劉秉光) 청나라 초기에는 사해가 신복(臣服)하고 국위를 떨치는 강성한 국면을 이룬다. 그리하여 130여년에 이르는 "강건성세(康乾盛世)"가 나타났다. 여기에는 집권자들이 하나같이 사직을 보전하고,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걸출한 재능을 지녔다는 것 이외.. 2012.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