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광제(道光帝)의 이름은 민녕(旻寧, 즉위전의 이름은 綿寧이었으나 피휘의 편의를 위하여 개명함)으로 건륭47년(1782년)에 태어났다. 도광제는 청나라 황제중 유일하게 황후의 적장자로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도광제는 가경제(嘉慶帝) 영염(永琰, 즉위후에는 피휘의 편의를 위하여 顒琰으로 개명함)의 둘째 아들(皇次子)로서(황장자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전에 요절함), 생모는 시타라씨(喜塔蠟氏)이다. 시타라씨는 부도통, 내무부총관을 지낸 허얼징어(和爾經額)의 딸이다. 건륭 39년(1774년)에 건륭제는 영염(가경제)에게 시타라씨를 적푸진(정실부인)으로 삼게 하는데, 이 때 영염의 나이 15세때였다. 영염이 가경제로 즉위하면서 시타라씨는 황후가 되는데, 137일간 황후로 있다가 병으로 죽는다. 이 때 민녕의 나이 16세였다. 가경제는 민녕을 특별히 아꼈다.
가경 25년(1820년) 7월 18일 61세의 가경제는 가을사냥을 위하여 원명원을 출발하여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향했다. 황차자 지친왕(智親王) 민녕, 황사자 서친왕(瑞親王) 면석(綿淅)이 황제를 수행한다. 7월 24일에 승덕 열하행궁에 도착하였는데, 황상의 몸이 좋지 않았고, 다음날인 7월 25일 사망한다. 가경제의 사망에 대하여는 병사라는 설 이외에도 번개를 맞아서 죽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설사 번개에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도 절대 정사에는 그렇게 기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는 민녕이 황위를 계승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몇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옹정제에서 시작한 비밀입저방식은 건청궁의 정대광명 편액뒤에 황태자 즉, 후임황제를 지명하는 유지를 담은 금갑을 남겨야 하는데, 가경제가 죽은 후에는 건청궁의 정대광명 편액뒤에 금갑이 없었다. 뿐만아니라, 이상한 것은 당시 피서산장에 있던 사람들이나, 북경에 있던 왕공들 중 그 누구도 사람을 북경 자금성으로 파견하여 정대광명 편액뒤를 살핀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가경제의 유지가 발견되지 않자, 황자들과 신하들이 당황하게 된다. 이 때 내무대신인 희은(禧恩)은 예친왕 순영(淳穎)의 아들인데, 황차자 민녕을 황제로 옹립하자고 주장한다. 다만, "군기대신인 탁진(托津)과 대균원(戴均元)은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고 망설였다. 희은이 강하게 주장하였으나, 중신들을 설득하지는 못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개 신하인 희은이 감히 나서서 황위계승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이유도 하나의 의문이다.
셋째, 효화황후는 북경에서 의지(懿旨)를 작성하여 오백리가급으로 피서산장에 보내는데 그 내용은 황차자 민녕을 황제에 즉위시키라는 것이다. 가경제는 두 명의 황후를 두었는데, 민녕의 모친인 시타라씨가 그 하나이고, 시타라씨가 죽은 후에 황후로 올린 뉴후루씨가 다른 하나이다. 뉴후루씨에게도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황삼자 면개와 황사자 면석이다. 그리고, 이 두 아들은 민녕과 황위를 놓고 경쟁관계에 있을 수 있는 두 황자였다. 민녕은 생모인 시타라씨가 사망한 후 효화황후를 생모처럼 따랐다고 전해진다. 민녕은 효화황후는 물론이고 두 동생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효화황후 뉴후루씨가 가경제의 유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친아들중의 하나가 아닌 민녕을 차기 황제로 하라는 의지를 보낸 것이다. 민녕이 효화황후의 의지를 받고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박고 절을 하며 감격해 마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청나라의 규정에 따르면 황태후에게 후임 황제를 결정하는 권한이 없다. 만일, 황제가 남긴 유지와 달랐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가? 이 부분도 하나의 의문이다.
넷째, 가경제가 남긴 작은 금갑은 피서산장에서 한참을 찾아도 나오지 않다가, 가경제의 시위중의 한 사람의 주변에서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가경4년 4월 10일 묘시초, 민녕을 황태자에 봉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 금갑을 탁진과 대균원이 찾아서 먼저 열어보니, 그 안에 가경제의 유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도 의문은 있다. 왜 금합이 정대광명 편액뒤에 있지 않았는가? 왜 금갑이 황제의 주변에 있지 않고 시위의 주변에 있어 며칠이 지난 뒤에야 찾았을까? 탁진과 대균원은 왜 금갑을 모두가 보는데서 열지 않고 먼저 자물쇠를 부수고 열어보았을까?
당시의 상황을 보면 도광제가 황제로 즉위하는데 대하여 이미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있었고, 반대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실종친인 희은, 두 황자의 생모인 황후, 다른 황자, 신하들까지 모두 민녕이 황제에 오르는데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고, 찬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지가 담긴 금갑을 바로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약간의 해프닝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민녕이 아닌 다른 황자를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거나, 다른 황자가 황제의 자리를 노린 흔적은 없다.
민녕이 황태자로서 확실한 입지를 굳히는 데에는 한가지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 계유사변(癸酉事變)이라 불리는 사건인데 민녕이 32살때인 가경18년(1813)년에 임청(林淸)을 우두머리로 하는 천리교(天理敎) 교도들이 자금성에 난입한 사건이다. 이 날 가경제는 사냥을 나갔다가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이었고, 비가 많이 내려 연교(煙郊)에 머무르고 있었다.
천리교는 팔괘교(八卦敎)의 한 갈래로, 북경근처의 감괘교(坎卦敎)와 홍양교(紅陽敎)가 융합되어 이루어진 종교이다. 팔괘교는 산동성 단현의 유좌신(劉佐臣)이 창립한 비밀종교인데, 팔괘의 방위에 따라 전도했기 때문에 ‘팔괘교’라 불리웠다. 팔괘는 건,곤,진,손,감,리,간,태이다. 각각 서북,서남,정동,동남,정북,정남,동북,정서의 8개 방위를 가리킨다. 북경일대는 단현의 북쪽이므로 감괘에 속했고, 경기 대흥일대에는 감괘교 외에 홍양교도 있었다. 임청은 원래 홍양교에 가입하여 우두머리가 된 후, 감괘교를 흡수한다. 그리고 진괘교(震卦敎)의 이문성(李文成), 풍극선(馮克善)과 생사지교를 맺고, 자신의 말솜씨를 이용하여 이문성이 진괘교주가 되도록 도운다. 또한, <역경>의 “제출어진(帝出於震)”이라는 문구를 이용하여 진괘가 팔괘의 우두머리라고 내세워 이문성을 팔괘교의 총교주로 만든다. 이문성은 그의 도움에 감사하여 그를 “십자귀일(十字歸一)”로 모셔 사실상 두 사람이 공동우두머리가 되어 팔괘교를 통합하고, 통합후에는 ‘천리교’라 부르게 된다.
임청은 당시의 참언을 활용하여 가경18년 구월 십오일이 천리교가 신주(神州)를 광복시키고, 오랑캐를 몰아내며, 청나라를 소탕하는 날이라고 하면서, 그해 8월 하남도구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구월십오일을 거사일자로 확정한다. 그리고 140여명의 교도를 모은 후, 그 70여명을 뽑아 진상(陳爽), 진문괴(陳文魁) 두 명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한다. 그리고 미리 유득재(劉得財)를 비롯한 5명의 태감을 천리교에 입교시켜 자금성의 내부에서 호응하도록 한다. 천리교도들은 태감의 도움으로 동화문과 서화문을 통하여 자금성에 난입한다. 이때 민녕은 사냥에서 미리 돌아와 상서방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궁중에 반적(叛賊)이 난입했다는 고함을 듣자, 그는 바로 조총을 들고 성벽위로 올라가 친히 천리교도 2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을 뿐아니라, 황상에게 사람을 보내어 상황을 고하게 하고, 저수궁으로 가서 황모를 안심시키며, 친히 시위를 이끌고 서장가 일대를 수색하였다. 이날 모두 72명의 천리교도가 죽었다. 송장에서 승리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임청등은 다음 날 모두 체포되어 극형에 처해진다.
민녕이 이 돌발사건때 보여준 침착한 태도와 용기있는 행동은 가경제 뿐아니라 많은 신하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경제는 북경에 돌아오는 길에 보고를 받고는 즉시 민녕을 지친왕(智親王)에 봉하고, 그가 사용한 총에는 "위열(威烈)"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민녕이 황위계승자가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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